[Review] 신도 울고 갈 연주, 임주희 피아노 리사이틀, 밤과 꿈 - 힉엣눙크! 페스티벌

한 여름 밤의 '꿈'과 같은 피아노 연주
글 입력 2022.09.06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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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이었다. 신도 울고갈 정도의 경지였다. 천재라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단계. 예술을 삶에 두어야 하는 이유를 임주희 피아노 리사이틀 <밤과 꿈>에서 발견했다. 살면서 이정도로 '신의 경지'에 오를만큼 노력한 적이 있었나 반성하게 된 계기였다.


롯데콘서트 R석 B구역에 앉은 것을 굉장히 기쁘게 생각했다. 비록 정면으로 마주하진 못했지만, 관객의 시선에서 왼쪽 맨 앞줄에 자리해 그녀의 현란한 연주를 아낌없이 감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사적 감정이 고조되면 고조될수록 폭발하는 에너지를 보여준 연주자에 더더욱 몰입했다.

 

집중하면 고개가 앞으로 기우는 버릇이 있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턱과 목이 빠질 뻔했다. 건반 앞 피아노에 비친 손가락 움직임을 동시에 바라보며 ‘신도 대성통곡할 정도의 노력과 열정’임을 감지했다. 그만큼 그녀의 연주는 완벽 그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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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의 현재와 미래가 함께 모인 ‘2022 힉엣눙크! 뮤직 페스티벌’의 세션 중 ‘임주희 피아노 리사이틀’은 그야말로 환상의 정점이었다. 2000년에 태어난 그녀는 2012년 13살 당시 런던 심포니의 내한 공연 때 깜짝 협연자로서 라벨의 협주곡 1악장을 연주한 이후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후 10년이라는 시간동안 정도의 길을 갈고 닦아 정명훈, 게르기에프 같은 지휘자들과의 협연, 해외 초청 연주 등 자신만의 올곧은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2022년 8월 29일 오후 8시, 롯데콘서트홀에서 진행된 임주희 피아노 리사이틀은 특별히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바로 오는 10월 미국 데뷔를 앞두고 동일 프로그램을 한국에서 먼저 선보인 것이다. 그녀는 “음악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카네기홀에서의 데뷔는 꿈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번 연주에서 관객들과 삶의 어둠을 뚫고 나아가는 한줄기 빛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다짐을 밝혔다.


이번 공연에서 그녀는 총 3번의 텀으로 프로그램을 꾸몄다. 21세기 작곡에 이름을 남기고 있는 레라 아우어바흐의 피아노 솔로곡 ‘메멘토 모리’, 무시무시한 손가락의 움직임들로 채워진 난곡으로 곱히는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 브람스의 소나타 3번으로 구성했다.


 

<메멘토 모리>는 단일 주제에 기초하면서도 세 악장의 음악 양식과 분위기가 극명하게 대비를 이루는 무거운 작품이다. 1악장 ‘레퀴엠’에는 레퀴엠 특유의 절망과 분노의 정서에 리스트 후기 음악의 색채가 가미되어 있다. 2악장 ‘다시 유년기로’는 라흐마니노프적 멜랑콜리를 언뜻언뜻 드러내다가 쇼스타코비치 같은 유희적인 분위기로 전환된다. 마지막 ‘성년기’는 맹렬하게 반복되는 화음으로 시작해 점진적으로 속도와 힘을 더해간다. 마지막 악장은 유명한 ‘진노의 날’을 모티브로 연상시키는 긴 애가로 마친다. 

 

글. 2008 헥사메론(Hexameron)

번역. 윤인영

 

 

첫번째로 연주한 레라 아우어바흐의 메멘토 모리를 통해 임주희 피아노의 차별화 강점을 알 수 있었다. 폭풍우가 잠실을 휩쓸고 지나간 듯, 엄청난 힘으로 맹렬한 속도와 힘을 과감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임주희는 인터뷰를 통해 이것이 너무나 무거운 주제이지만, 현실을 담담히 돌아보아야 하는 의미를 발견했다고 전했다. 그녀의 말대로 우리는 <메멘토 모리> 연주에서 인간의 삶 속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절망과 유희를 한꺼번에 느꼈다. 뜨거운 감정을 드러내는 흐름 속에서는 동물의 왕국에서 사자가 거침없이 싸우는 모습이 떠오르기도, 헤어진 연인 또는 위기의 부부들이 한 치의 양보없이 논쟁하는 장면이 상상되기도 했다. 청각으로 피아노 연주를 듣고, 시각으로 다양한 스토리가 저절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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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가스파르,M.55>는 ‘물의 요정’, ‘교수대’, ‘스카르보’에서 각기 다른 피아노 연주 기술뿐 아니라 독특한 음악 어법과 서사적 시각을 보여주었다.

 

‘물의 요정’은 인간 남자를 유혹하는 물의 정령 운디네를 묘사한다. 일렁이는 C# 장조 음형은 얼마 지나지 않아 투명한 선율을 위한 배경이 된다.

 

‘교수대’는 밀도 높은 짜임새를 가진 음악적 공포물이다. 베르트랑의 동명의 시의 한 구절은 이 곡의 음악적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수평선 아래있는 머나먼 도시의 성벽에서 들려오는 종소리이며, 교수대에 목매달려 석양에 붉게 물든 시신이다”.

 

‘스카르보’는 지금까지 고안된 것 중 가장 무시무시한 손가락의 움직임들로 채워진 19쪽 분량의 곡이다.

 

글. 블레어 존스턴(Blair Johnston) 일부 발췌

번역. 윤인영

 

 

두번째로 연주한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는 건반 음악의 테크닉적 풍경을 새로이 바꾼 역사를 지녔다. 순서대로 '물의 요정'에서는 C# 장조 음형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끊임없이 운동하는 '물'의 특성을 느낄 수 있었다. 투명한 분수대가 문득 떠오르기도 하며, 귀여운 요정들이 분수대 주변으로 모여 사랑의 이야기들을 속삭이는 모습이 그려졌다.

 

다음으로 '교수대'는 특히 심리적 긴장감을 깊게 유발한 파트였다. 종소리를 악곡 전체에 지속적으로 등장시켜 무서운 텐션과 긴장에 젖게 했다. 마지막 '스카르보'는 특유의 뛰어난 리듬감을 무엇보다 강조한 곡이다. 빠르게 반복되는 음뿐만 아니라 다이내믹한 전환에 따르면 보는 사람마저도 정신없이 보물찾기를 하며 달리는 느낌이었다.

 

임주희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가장 명확한 스토리전개가 드러난 곡을 꼽으라면, <밤의 가스파르>를 고민없이 선택하겠다. 물의요정과 교수대, 스카르보를 통해 탁월한 피아노 작법을 실감할 수 있는 동시에 선명하면서도 대비되는 감정의 결을 느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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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소나타 3번 F 단조, 작품번호 5>는 브람스의 가장 큰 규모의 피아노 독주곡이며, 그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이기도 하다. 격동하는 1주제와 평화로운 2주제로 이루어진 1악장은, 끝없이 복잡하게 변화하는 리듬과 함께 극명한 대조의 전형을 보여준다. 2악장에서는 선율들이 충분한 시간을 두고 크게 꽃피우는 한편, 활기차고 통통 튀는 3악장 ‘스케르초’는 짧은 프레이즈들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4악장 ‘회고’는 추가적 악장으로, 음울한 묵상으로 재구성되며 어떤 부분에서는 거침없는 가속도가 붙는다. 마지막 악장은 론도 악장으로, 경쾌한 1주제부터 벅차오르는 서정적 선율, 위풍당당한 행진곡, 심지어 기교를 과시하는 몇몇 순간들까지 거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글. 하워드 포스터(Howard Posner) 일부 발췌

번역. 윤인영


 

대망의 마지막 곡, 브람스의 독주곡 <피아노 소나타 3번 F단조>는 곡의 시작부터 끝까지 숨막히는 호흡을 놓치지 않고 '진인사대천명'한 연주였다고 표현하고 싶다. 1853년 중엽부터 말엽까지 브람스는 이곡을 작곡했고, 무명의 19세 피아니스트였던 브람스가 20세 스타 음악가로 탈바꿈한 그 시기였다.

 

이번 공연을 보고 난 후 임주희 피아니스트의 나이가 23세라는 걸 알게 되며, 한번 더 마지막 곡에 대한 애정을 쏟게 되었다. 연주자의 나이와 브람스의 작곡시기가 비슷한 20대 초반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다양한 아이디어로 가득 찬 피아노 소나타 3번은 "차라리 교향곡에 가깝다"는 평이 나올 정도로 곡의 구성과 짜임이 풍부했다.

 

*

 

<밤과 꿈>이라는 제목에 맞게, 8월 한 여름 '밤'에서 '꿈'과 같은 피아노 연주였다.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와 함성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앵콜 공연에서까지 최선을 다해 준비한 모든 것을 발휘한 피아니스트 임주희. 그녀는 홀가분하고도 행복한 표정으로 공연장을 나갔다.

 

그녀를 통해 삶에서 예술을 가까이두어야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예술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우리가 생각할 수 없었던 더 높은 경지를 바라보고 감탄할 수 있게 한다. 임주희 피아노 리사이틀을 통해 음악에서 더 나아가 인간의 폭발적인 잠재력과 가능성, 그리고 예술의 의미를 살펴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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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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