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헤어질 결심'을 다시 볼 결심 [영화]

한 번으로는 부족한 영화, <헤어질 결심>
글 입력 2022.09.06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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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할 결심


 

<헤어질 결심>이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얼른 영화관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왜인지 짬이 나지 않았다. 시간을 내서 볼 의향이 있었으나, 저조한 컨디션으로는 볼 엄두가 나지 않아 미루고 미루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감독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보지 못했던 것은 비단 체력만의 문제는 아니였다. 사실 체력보다도 문제가 되었던 건 다름 아닌 마음이였다. 새로운 자극을 받아들이기에는 꽉 차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관람 후 며칠 간은 오롯이 영화로 채우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기에, 뭘 더 채워 넣었다간 영화를 담지도 못한 채 전부 흘려보내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영화 채널 등 각종 매체에서 "역시 박찬욱!"이라는 리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동진 영화 평론가가 6년 만에 별점 5점을 준 영화라는 기사도 나왔다. 주변 지인들 사이에서도 영화 이야기가 자연스레 오갔다.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볼수록, 보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졌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개봉한 지 1달이 다되어가고 있었다. 더 이상 미루기에는 상영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곧장 심야 영화를 예매 했고, 그렇게 고대하던 <헤어질 결심>을 지난 7월 30일 관람 하였다.

 

 

헤어질 결심 포스터.jpeg

 

 

솔직히 말하자면,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다녔다. 독특한 전개 방식, 여우가 사람을 홀리는 듯한 아름다운 색채와 연출, 배우들의 명연기 등 어느 하나 거를 타선이 없었다.

 

그러나 영화의 어떤 면이 좋았느냐고 스스로 물었을 때, 명확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또, 각종 매체에서 짚은 관람 포인트들 중 캐치하지 못한 것이 많다는 것도 아쉬웠다. 영화에는 문외한이라 장면마다 쓰인 기법이나 효과와 같은 기술적인 부분을 알았으면 더 즐겁게 관람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늦은 시간에 본 탓에 집중을 하지 못한 건 아닐까? 더 맑은 정신으로 보았다면 좀 달랐을까?


재밌는 것은 영화를 본 직후에는 머릿속에 물음표가 몇 개 떠다니는 듯한 기분이였는데, 자꾸만 생각 난다는 점이었다. 영화 속 대사처럼 꼭 '물에 잉크가 퍼지듯 서서히 물드는' 영화였다고나 할까.


자꾸만 '안개'와 말러 교향곡을 찾아 듣게 되고, 일상 속에서 문득 해준과 서래가 생각이 나는 것이 '다시 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다시 볼 결심


 

그래서 다시 볼 결심을 했다.

 

불과 첫 번째 관람을 한 지 3일 만에 말이다.

 

대신에, 2번째 관람인 만큼 완전하게 즐기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먼저, 각본집을 구입하여 톺아보았다. 영화적인 지식은 단숨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일단은 내용만이라도 완벽히 숙지해가자는 것이 이번 회차 관람의 핵심이였다.

 

지난 번 관람은 집 근처 영화관에서 하였는데, 2회차 관람 때에는 좀 더 소리에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에 거리가 있는 영화관을 선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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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선택한 영화관은 연희동에 위치한 <라이카 시네마>.

 

음향시설도 훌륭하고 좌석도 편하다고 해서 방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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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고 물으신다면, 영화와 관련된 리뷰나 기사를 찾아보다 알게된 사실 때문이다.

 

영화 속 몇몇 장면에서 의도적으로 숨소리나, 아이스크림을 먹는 입소리를 크게 키웠다고 했다. 부끄럽게도, 지난 관람 때는 깊게 생각하지 못했던 포인트이기 때문에 집중해서 보고 싶었다. 또한 시각적인 면보다는 음악이나 배경 소리에 좀 더 집중해보고 싶어서 곧장 예매하였고, 그렇게 홀로 2차 관람까지 성공적으로 마쳤다.

 

 

*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 폭탄임을 밝힙니다. 원치 않으신다면 뒤로 돌아가셔도 괜찮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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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는 영화를 보면서 재미있었던 포인트들과 함께 필자의 생각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영화 해석에는 정답이 없으므로 가볍게 읽어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시작해본다.

 

 

1. 해준은 서래에게 단숨에 반했다. 시체안치실에서 처음 만난 장면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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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를 확인하기 위해 안치실로 들어오던 순간부터 장면이 끝날 때까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해준. 피해자의 아내라는 말에 동료 형사 수완은 놀라지만, 해준은 티내지 않고 곧바로 시체를 보여준다. 

 

이윽고 사건 단서를 찾고자 피해자의 핸드폰 패턴을 풀기 위하여 "패턴을... 알고 싶은데요?" 라는 대사 이전에 이어지는 몇 초 간의 눈맞춤. 서래를 바라보는 눈빛 가득 호기심과 사랑이 묻어나는 그 장면에서, 우리는 해준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2. 서래를 미행하는 해준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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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형사가 잠복하는 시선은 꽤 흥미롭다.

 

그냥 보고 있으면 수사에 열중하는 형사로서의 당연한 행동일 수도 있으나, 해준이 서래를 바라본다고 생각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카메라는 마치 인간의 관음욕구를 겨냥이라도 한 것처럼 서래를 좇고, 비춘다.

 

인간의 눈으로는 불가한, 아주 기계적인 줌인과 줌아웃 또한 재밌는 요소다. 망원경 너머로 서래를 훔쳐 보는 해준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배경 및 거리감과 함께 보여주기 때문이다.


스마트 워치에 말로 기록해두는 해준의 모습 또한 재밌다.

뭔가 수사에 열중하는 듯 하면서도, 어딘가 묘한 그 녹음 파일들은 그가 서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게 해주는 또 하나의 장치기 때문이다.

 


3. 형사 그리고 피해자의 아내, 만남을 지속할 명분


그와 그녀는 꾸준하게 만남을 이어나갈 이유가 있다. 서래는 살인사건의 용의 선상에 있는 피해자의 아내, 해준은 그걸 좇는 정직한 형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심히 감시하고 단서를 찾아나가며 수사를 계속하지만, 마음 한 켠으로는 자살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윗선의 압박으로 사건이 종결되게 된다. 자의적인 것은 아니였지만, 어떻게 보면,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범인이 아닐 것이라는 믿음이 가슴 속에서 싹텄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사랑하면 알면서도 속아주는 그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작용되니까.

 

피해자의 유품을 전달해주러 그녀의 집에 간 해준. 그런 그에게 서래는 질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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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래 : "기쁜가요?"

 

- 해준 : "예? 제가 왜요?" 

 

해준은 명분이 사라져 아쉬운 마음이였을 테고, 서래가 그걸 모를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한 것은, 해준의 마음을 알면서도 확인하고 싶었을 거다. 으레 사랑하는 이들끼리 나누는 뻔한 이야기처럼 말이다.더 이상 서래를 볼 명분이 없어진 해준은 아쉬운 듯한 말투로 대답하고, 저녁을 먹었냐는 일상적인 물음을 한다.

 

이제 같이 있을 명분을 잃은 둘이지만, 해준은 자신이 할 줄 아는 단일한 중국요리인 볶음밥을 만들어 서래와 함께 먹는다.

 

저 단일하다는 말이 주는 어감이 묘하게 서래와 해준 자신의 마음이 같다는 걸 의미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장면이다. 중국 출신인 서래에게 중국음식 (서래는 중국식이 아니랬지만)을 나누어 먹는 설정이 묘하게 로맨틱 했달까.


 

4. 홍산오의 자살, 정안의 석류청과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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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오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준 사랑은 절절함 그 자체다.

 

형사 해준에게는 미결 사건을 정리해둔 벽이 존재한다. 그의 집에 놀러 온 서래가 그걸 보고서는 깜짝 놀랄만큼 눈 뜨고는 못봐줄 장면들이 즐비하다. 그 때 해준이 눈에 불을 켜고 잡으려고 하는, 질곡동 사건의 유력 용의자 중 한 명인 홍산오의 부연 설명이 나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서래의 질문과 그의 답변을 들은 서래의 말.

 

"죽을 만큼 좋아한 여자네?"

 

죽을 만큼 사랑해서 살인까지? 일반적인 상식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쓰레기 같은 남자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어하는 꼴은 보지 못하는 '순정파'일지도?

 

서래의 말을 들은 해준은 범인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곳에서, 정말로 홍산오를 잡는다. 경찰에게 거의 다 잡혀 이제 더는 도망갈 곳이 없는 마지막의 순간에도, 가인이에게 전해달라며 마지막 문장을 말하는 산오. 그녀에게 더 이상의 피해가 가지 않도록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 또한 그의 사랑 표현 방식이었을 거다.

 

여기서 팔자는 홍산오와 서래의 비슷한 점을 발견했다. 바로 살인이라는 잘못된 수단으로 사랑을 표현한다는 것. 홍산오는 살인으로 그녀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였고, 서래는 살인으로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이목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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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가 끝나고, 해준은 정안이 바라던대로 이포로 전근을 온다.

 

그런 그와 함께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석류청을 담그는 그녀. 함께 있으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는다.

 

1부에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꼭 1주일에 1번은 섹스를 해야 한다고 말하던 정안은 이제 주말 오후부터 석류를 뜯으며 여성호르몬 이야기를 하다가, 중년 남성의 우울증에서 결국 남성호르몬을 언급하며 자라 진액 이야기를 한다. 그런 정안에 정색하는 해준.

 

석류를 까다 말고, 별안간 이주임이라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자라를 취소한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와 석류청을 다시 담근다. 사실 물어보기도 전에 주문을 해둔 것이다.

 

정안은 이포에 해준이 와 있어서 행복하다고 한다. 그러나 해준의 표정은 밝지가 않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사.

 

- 정안 : "당신은 살인이랑 폭력도 같이 있어야 행복하잖아."

 

이 씬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관람 회차에 따라 말해보고 싶다. 우선 첫 번째 관람을 했을 때는 그저 재밌는 씬이라고만 생각했다. 중년 남녀의 사랑이란 이런 온도일까 싶으면서도, 사랑을 원하는 정안의 모습이 짠하지만은 않게 위트를 가미해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번째 관람에서는 보이지 않던 게 보이기 시작했다.

 

1부에서 해준은 밤길을 달려 정안이 있는 이포로 와서 손수 매운탕을 끓여준다. 초밥 시켜 먹어도 되는데 왜 고생스럽게 요리 하냐 묻는 정안. 아무 초밥이나 먹이기 싫어서란다. 그리고 이어지는 잠자리.

 

2부애서 정안은 남편의 기력을 걱정하며, 우울증 이야기를 미끼로 정력에 좋다는 자라를 먹이려고 한다. 대뜸 자라 이야기를 하는 아내가 못마땅한 해준. 그런 해준을 보다가 눈치를 보고 이내 자라를 먹이지 않기로 하는 정안.

 

이 장면을 통해, 사랑은 서로가 원하는 걸 제 때 주는 게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정안이 원하는 건 해준의 정성어린 매운탕이 아니라 식탁을 두고 마주 앉은 일상이었고, 해준이 원하는 건 가정과 배우자가 주는 안정감이 아니였을까.

 

 

5. 2부 내내 서래를 범인으로 점 찍어두고 의심하는 해준

 

1부 끝에서 서래가 범인임을 확신하고, 자신은 붕괴되었다고 표현한 해준.

 

품위있는 형사라고 표현한 서래의 말에 그건 자부심에서 나오는 것이었는데, 경찰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해 수사를 망쳤기 때문에 이전의 자신은 모두 망가졌다고 말한다.

 

그런 그를 보며, 한편으로는 놀라기도 하고 가슴 아프기도 한 그녀. 해준이 나간 뒤 '붕괴'를 검색해본다. 이윽고 서래는 '무너지고 깨어짐'이라는 풀이를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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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뒤, 이 둘은 이포에서 우연을 가장하여 결국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사건이 터진다.

 

이제는 범인을 눈 앞에 두고도 놓치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해준은 첫 번째 수사에서 줄곧 보여주던 침착한 모습은 지우고 서래를 처음부터 의심한다. 무죄 추정의 원칙 같은 것은 잊은 채 말이다. 

 

살인을 결국 의심하는 마음은 그의 마음과 정신이 온통 그녀에게 가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저 해준 스스로 서래와 계속 연결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였을까. 앞서 이야기 했듯, 언제나 자신이 맡은 사건에 열을 다하는 해준. 그가 직업관에 투철하다는 인물 설정 또한 모두 서래를 향한 마음을 끊임없이 드러내고자 하는 장치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그런 해준이 2번째 수사 동안에 보여준 모습은 조금 찌질해보이기도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서래가 범인이라고 단언하는 모습, 취조실에서 식사를 시켜주는 장면 등을 통해 우리는 사랑의 구질구질한 면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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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수사 때는 아주 고급 초밥을 먹는데, 두 번째 취조실에서는 핫도그를 내어주기 때문이다. 이 씬은 개인적으로 너무 귀여워서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다.

 

 

6. "다른 남자와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그래서 결혼했습니다."

 

영화를 통틀어 제목이 나오는 유일무이한 대사.

 

서래의 두 번째 남편 사망 후, 이포의 취조실에서 결국 해준과 다시 마주 앉게 된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대사를 들으며 꼭 시집의 메인 작품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시집을 보면 가장 중심이 되는 작품 제목을 시집 제목으로 쓰지 않는가.

 

형사이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는 해준은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그녀가 이해되지 않는다. 

 

- 해준 : "왜 그런 남자랑 결혼을 했어요?"

 

- 서래 : "다른 남자와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그래서 결혼 했습니다."

 

아무튼 물리적 거리감도 결국 그와 그녀를 완전하게 이별시키지는 못했던 것이다. 해준과의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결혼을 하고, 또 그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서 결국 범인이 된 자신을 다시 수사하게 만들어 붕괴 이전으로 돌려 놓으려는 그 마음이 진짜 사랑이 아닐까. 표현 방식이 한참 잘못 되었지만.


사실 그냥 듣고 보면 아주 어이 없는 대사다. 다른 남자와 헤어질 결심을 하기 위해,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과 결혼을 한다는 말이니까. 그러나, 생각해보면 일부러 못된 놈들만 골라 만나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서래의 곁에는 좋은 남자들이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나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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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호미산의 대사에서도 알 수 있다.

 

- 서래 : "해준 씨 같은 바람직한 남자들은 나랑 결혼해 주지 않으니까. 얼굴 보고 한 마디라도 하려면 살인사건 정도는 일어나야 하죠."

 

정직한 형사인 해준은 그가 흥미를 가지는 살인이나 폭력과 같은 소재가 있어야만, 한국에 밀입국한 보잘 것 없는 자신과의 접점이 생긴다는 소리로 해석된다. 아무튼 그런 서래 입장에서 해준과의 만남은 인생의 엄청난 이벤트였을 거다.

 

이렇게 멋지고, 품위있고, 대단한 남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것이 설령 수사일지라도) 심지어 나를 위해 증거 인멸을 권유하다니. 이게 사랑이 아니면 대체 뭐가 사랑이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한낱 꿈같이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그 마음과 시간에서 벗어나려면, 그녀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해준이 붕괴되기 이전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수밖에. 그래야 꿈에서 깰 수 있으니까.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그이도 일상을 회복할 수 있으니까. 그럴러면 상황을 망가뜨려서 더 이상 사랑하지 못하게, 아니 아예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방법만이 유일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만일 필자가 서래였어도... 그녀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7. 애증의 마음

 

어떤 사랑은 가라이에 옷 젖듯이 사랑하는지도 모르게 사랑하게 되어버린다. 해준은 파도처럼 사랑이라는 감정에 압도 당하였으나, 의식적으로 그녀를 밀어내려고 하는 것을 관객은 다양한 장치 - 정직한 형사, 품위있는 태도 -에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첫 번째 사건 종결 이후, 절에서 하는 서래와의 짧은 데이트 장면에서 사랑의 감정을 받아 들이고 표현하기도 하는 그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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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잠시, 서래가 돌보는 어르신의 핸드폰에서 사건의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하게 되고 정직한 형사로서의 투철한 정신이 발휘된다. 영화 첫 장면에서처럼 138층이라는 그 단서가 진실임을 증명하고자, 그는 서래의 루트를 상상하며 구소산을 오른다.

 

피해자였던 그녀의 남편 '기도수'가 오른 루트를 올랐던 해준은 이제 피의자임이 기정사실화 된 서래가 오른 길을 걷는다. 그리고 그 날의 상황을 생생히 그려본다. 알고 있지만 아니라고 부정하던 마음을 사랑이라고 인정하던 순간처럼, 그녀의 살인을 깨닫게 된다.

 

그렇지만 그는 그녀를 마냥 미워할 수 없다. 그녀가 이제껏 당해온 일들을 알고 있고, 지금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미 형사로서의 스탠스는 잃은 지 오래였기에, 산에서 내려와 서래의 집에서 그녀를 원망하듯 토해내며 이야기한다.

 

- 해준 : "왜 그렇게 맞으면서, 무슨 가축처럼 몸에 낙인까지 찍혀가면서도 경찰에 신고를 안 해요! 왜 경찰을 안 믿어요!"

 

- 서래 : "중국 돌려보낸다고......."

 

두 번째 사건 때도 마찬가지다. 왜 그런 사람이랑 결혼해서 또 고생을 하냐고 묻는다. 서래가 범인임을 확신하는 마음 이면엔 그녀를 가엾게 보는 마음이 남아있다. 이건 결국 사랑하지 않으려 애를 써봐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런 운명적 사랑임이 틀림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8. 물거품처럼 사라졌지만, 잉크처럼 가득히 퍼져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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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려오는 파도 앞에서 녹음 파일을 들으며, 몇 십분 전 서래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그녀가 한 말을 곱씹어본다. 그제서야 자신이 내뱉은 '사랑' 고백을 깨닫고, 허망함에 하늘을 올려다 보는 해준. 그토록 찾아 헤메이던 그녀가 바로 자신의 발 밑에 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공자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자신을 바다 사람이라고 표현하던 서래는 결국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깊은 바다로 돌아가게 되었다.

 

아주 극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서래가 묻힌 자리에 생기는 물의 소용돌이를 보면서 말이다. 그녀는 이 세상에선 죽고 없지만, 바라던 대로 해준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될 그녀이지 않은가. 

 

이 장면에서, 서래가 녹취한 파일을 듣고서야 자신의 마음이 완전한 '사랑'임을 깨달은 뒤 해준의 표정은 정말 압권이었다. 차마 말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을 모두 담아낸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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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서래가 죽기 직전인 조금 전에 나눈 통화에서의 말이 반복되는 듯, 서래의 사랑이 끝난 순간 다시 해준의 사랑이 시작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사랑할 결심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한참이나 보다가, 노래가 끝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래의 죽음으로, 해준은 그녀가 바라던 대로 잠에서 깨어나 다시 눈을 감을 때까지 그녀 생각을 하게 될 것을 생각하니 압도적인 먹먹함에 휩싸였다. 관객인 나도 이렇게 파도처럼 슬픔이 덮치는데 해준은 오죽할까.

 

이렇게 단 두 번의 관람을 통해, 작품을 사랑할 '결심'이 섰다.

 

 

결심 : [명사] (과거 또는 현재 시점으로부터) 미래에 무엇을 하고자 마음을 굳게 먹는 것.

 

 

그것은 작품을 향한 결심이기도 하지만, 영원히 사무칠 사랑을 사랑할 결심이기도 했다. 영화를 보면서, 저들처럼 '내가 이제껏 만나온 인연들 중, 과연 내 목숨을 바칠 만큼 사랑했던 시절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랑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아도, 모든 행동들이 사랑의 단서로 작용할 만큼 깊이 있는 사랑이란 얼마만큼의 깊이와 너비를 가지고 있는걸까.

 

그리고 깊은 회상에 빠졌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랑에 압도 되었던 적은 있었으나 이별 앞에서 상대방이 힘들어 하지 않게 '붕괴 이전', 즉 나를 만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가져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사랑하는 '나'를 사랑했지, 상대를 저만치 사무치게 사랑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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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서야 이동진 평론가의 평이 눈에 들어왔다.

 

 

파란색으로도 보이고 녹색으로도 보이는 그 옷처럼, 미결과 영원 사이에서 사무치도록.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다.

 

우리는 사랑 앞에서 자주 영원을 약속하지만, 사실 이 세상에 영원한 사랑이란 없다. 영원처럼 보이는 꾸준한 사랑만이 존재하는 것, 그 뿐이다.

 

그렇다면 미결은 어떠한가. 미결은 영원과 뜻은 다르지만, 한 편으로는 결이 비슷한 존재다. 결정되거나 해결되지 않은 상태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언제까지나 해결되지 않는다면 영원하다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닌가?

 

어찌 되었든, 해결되지 않음과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 상태에서 서래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또 사랑할 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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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래는 해준에게 마침내 영원한 '미결'의 존재로 남게 되었다. 한 번도 스스로 그녀를 좋아하는 그 마음을 '사랑'이라고 결정내린 적 없고, 그녀와 얽혀있는 사건 또한 해결하지 못하고 그녀를 놓쳤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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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흐르는 물이 바다로 흘러가면 그것은 바다의 물인가 산의 물인가 하는 것처럼, 영화 속 등장하는 것들의 모든 경계를 흐릿하게 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생각할 여지와 사색에 잠기는 시간을 선사한 작품인 <헤어질 결심>. 역시나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으며, 다양한 '사랑'을 참 잘 다룬 영화라고 생각하였다.

 

청록의 영화 <헤어질 결심>은 나에게 영원히 여운을 남기는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끝나지 않을 서래와 해준의 사랑처럼, 끝없는 n회차 관람을 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영화. 아직 못 본 분이 계시다면, 꼭 한 번 쯤은 관람하셨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글을 마친다.

 

 

*필자는 위 글을 쓰면서, 3번째 관람을 마쳤다! 영화를 즐길 때는... 불륜 프레임은 잠깐 벗어 두시고 사랑에 조금 더 집중하며 봐주시기를 청하며...

 

 

윤화 컬쳐리스트.jpeg

 

 

[강윤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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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 신지예
    • 헤어질 결심을 딱 한번 봤는데, 이번 글을 통해 작품에 대해 훨씬 더 깊이 이해하고 생각해볼 수 있었어요 ㅎㅎ 좋은 글 감사합니다!!
    • 1 0
  •  
  • YJW
    • 영화본 이후로 그 여운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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