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도서관을 좋아하세요? 中 [문화 전반]

글 입력 2022.07.28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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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교내 도서관은 이전에 다녔던 거대한 도서관의 반에 반도 못 미치는 크기였지만 아늑한 주황빛을 띄는 모습이 꼭 닮아 있었다. 오른쪽엔 두꺼운 책들이 왼쪽엔 얇은 책들이 나열되어 있었고 도서관 중심에는 동그란 도넛 모양의 하얀 소파가 놓여 있었다. 초등학교 도서관에 흰색 소파는 아이들의 손때나 볼펜 자국들로 꽤나 골칫거리였을 텐데.. 낡긴 했어도 항상 청결히 유지되었던 걸 보면 사서 선생님의 철저한 관리 하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부지런히 교내 도서관을 오가던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책을 많이 읽는 학생에게 주는 일명 ‘다독상’의 존재를 말이다. 책을 읽는 것에 꽤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과연 한 학기에 얼마나 많은 양의 책을 읽을 수 있는지 실험해 보고 싶었던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빌려 읽기 시작했다.

 

등교에 한 번, 하교에 한 번 도서관에 발 도장을 찍으며 사서 선생님이 날 알아보는 것에 뿌듯함도 느꼈다. 독서를 위한 독서가 아닌 다독상을 위한 독서로 변질되어 가는 스스로를 알아채지 못하고 빠르게 읽는 법만 터득한 채 한 학기가 지나가고 있었다.

 

다독상을 꼭 받고 말겠다는 집념은 내 이름 석 자가 적힌 상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도서관에 갈 때마다 항상 마주치던 안경 쓴 남자애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명만 주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아쉽긴 했지만 내가 1위로 다독상을 받았다며 읽은 책의 권수를 귀띔해 주는 사서 선생님의 말에 쑥스럽게 감사합니다를 소곤거리며 도서관을 나섰다. 선생님이 알려준 책의 권수는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모니터에 찍혀있던 그 당시 내가 한 학기 동안 빌려 읽었던 책의 권수는 112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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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독상을 가방에 넣고 집에 가던 길, 112권의 책을 읽었다는 사실보다 더 놀랐던 것은 그 많은 책 중 기억에 남는 책이 한 두 권 정도라는 것이었다. 분명히 내가 읽은 책들인데 무슨 책을 읽었었는지 어떤 부분이 재밌었고 좋았는지 정도는 기억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직접 고르고 빌린 책들이 맞긴 한가? 한 학기 동안 난 뭘 읽은 거지? 정말 읽긴 한 건가? 라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다독상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이 상이 내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퇴근하고 돌아온 부모님에게 다독상을 보여드리고 칭찬을 받았지만 마음 한편은 계속 불편해졌다.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고 이 사실을 부모님께 말하기엔 너무 부끄러웠다. 나의 부끄러운 점을 사실대로 낱낱이 밝히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다독상을 파일에 집어넣으며 앞으론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리, 예전처럼 읽고 싶은 책을 차분히 골라 한 글자 한 글자 소중히 읽어 나의 것으로 만드리라 스스로 다짐할 뿐이었다.


이날을 기점으로 교내 도서관으로 가는 발걸음이 많이 줄어들었다. 가끔 청소시간에 가서 새로 들어온 책 위주로 한두 권 빌렸고 사서 선생님은 왜 요즘은 자주 안 오냐는 질문을 더러 하기도 했다. 낯선 책들로 가득 찬 공간이었지만 이 중 내가 이미 읽은 책이 다수 있다는 사실은 선뜻 책을 고르기 힘들게 만들었다. 시간은 한 해 두 해 빠르게 흘러갔고 새로운 사서 선생님이 오면서 과거 도서관 다독상 1위는 기억 속에서 잊혔다.

 

*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언니가 빌려오는 인터넷 소설책과 로맨스 만화책을 함께 읽으며 새로운 문화에 눈을 뜨게 되었고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귀여니 소설과 궁, 5천 원만 주면 키스 해주는 놈, 늑대 주의보 등 지금으로서는 참 직관적인 제목들과 내용들로 가득 찬 만화책을 두근거리며 읽었다. 이런 책들은 학교 도서관에 배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동네 서점에 맛보기로 뜯어져 있는 걸 보거나 만화방에서 빌려 볼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다시 시작된 만화방 출입은 친구들과 노는 게 더 재밌었던 초중고 생활에 재미를 불러일으켰다. 중학교에 도서관이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고 (당연히 있었겠지만) 연애를 글로 배웠어요의 연장선상으로 사랑을 로맨스 만화책으로 배웠어요를 시전하며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여러 권의 만화책을 돌려 읽었다. 유치함과 짜릿함 사이를 오가던 그 당시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친구들과의 추억 이야기에서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질풍노도의 중학교 시절은 금방 지나갔다. 친구들과의 추억 쌓기나 단순히 재미를 위한 작품들만 접하기엔 대학입시를 코앞에 둔 고등학생이 된 나는 모든 게 유치하게만 느껴졌고 더 이상 만화방 출입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멀어진 도서관에 출입을 하지도 않았다. 등하교 버스 안에서 핸드폰으로 웹툰을 보며 가볍게 시간을 때울 뿐이었다.

 

이렇듯 단조로운 고등학교 생활 속에서 기억 저 편에 있던 도서관을 다시 끌어올려 새로운 활기를 되찾게 해준 건 친구 S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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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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