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복수의 화신이 맞게 될 결말에 대하여, 프리츠 랑의 '니벨룽엔' [영화]

글 입력 2022.07.28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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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주의는 독일에서 활발하게 논의된 예술 사조이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바실리 칸딘스키 등의 회화 작가들을 시작으로, 문학, 연극, 영화까지 다양한 예술 장르로 그 영향력을 확대한다. 전 장르를 관통하는 표현주의의 특성을 명확히 정의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바로 독일 표현주의는 20세기 초반의 독일의 시대적 상황을 철저하게 반영한다는 점이다. 특히 영화에서 그 특징은 두드러진다. 제1차 세계대전과 경제 대공황, 히틀러의 등장 등 굵직한 사건들이 독일을 휩쓸던 그 때, 영화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가?

 

독일 표현주의 영화에서 떼놓을 수 없는 감독, ‘프리츠 랑’. 그의 주요작은 이후의 영화들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대표적으로 ‘마부제 박사의 유언’, ‘니벨룽엔’, ‘메트로폴리스’ 등이 있다. ‘마부제 박사의 유언’은 최종 악당의 정체를 알 수 없도록 커튼으로 가려놓는 장면을 만들어냈다. ‘메트로폴리스’는 현대 SF영화의 시초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며, ‘니벨룽의 노래’는 ‘반지의 제왕’, ‘호빗’ 등 판타지 영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러니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 중 상당수는 프리츠 랑의 영화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 중 ‘니벨룽엔’에 얽힌 이야기들이 꽤나 흥미롭다. 오늘 오피니언에서는 ‘니벨룽엔’에 담긴 시대적 문제와 프리츠 랑이 제시한 방향성을 살펴본다.

 

‘니벨룽엔’의 줄거리는 이렇다. 모험심 강한 지크프리트가 크림힐트와 결혼하기 위해 군터와 브룬힐트의 결혼을 돕는다. 이후 지크프리트는 하겐의 계략에 의해 살해되고, 크림힐트는 지크프리트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훈족의 에첼 왕과 결혼하게 된다. 종국에는 모든 이들이 멸망에 이르게 된다.

 

사실 이 영화는 게르만 민족의 신화를 재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 ‘니벨룽엔’이 등장인물을 그려내는 방식은 시대 상황에 특수적이다. 프리츠 랑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영화는 그것이 만들어진 시기의 대중들이 직면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당시 독일 대중이 직면하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니벨룽엔의 서사는 독일이 민족주의적 결집이 필요할 때마다 등장한다. 나폴레옹의 침입이 있었을 때, 독일 민족은 ‘니벨룽의 노래’를 통해 독일 민족의 고유성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을 겪고 독일 국민은 상실감에 빠져 있었다. 또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정치·경제적 혼란은 좌절감을 심화시켰다. 이 시점에서, 다시금 독일 국민은 민족의 고유한 정체성에 목마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프리츠 랑은 니벨룽 신화를 어떻게 재구성하였는가? 다시 말해, 왜 프리츠 랑은 하필 1924년에, 그러한 해석을 시도했는가? 본 글은 이 영화의 핵심 인물, 크림힐트를 중심으로 이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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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니벨룽엔’ 속 크림힐트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다


 

크림힐트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냉혈한 여전사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신화에서보다 영화에서 크림힐트의 감정선을 보다 상세하게 묘사한다. 이는 영화적 특성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무성영화임에도, 감독은 텍스트와 연기, 배경, 카메라 기법 등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관객이 크림힐트의 감정에 수긍하도록 하고 그녀의 무자비한 복수에 정당성을 부여하도록 한다.영화 1부에서 크림힐트는 사랑스러운 공주로 묘사된다. 동시에, 순종적이고 남자의 사랑을 기대하던 여성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어쩌면 수동적으로까지 보이기도 한다. 자신이 느끼는 불안함을 직접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하겐 등 주변 인물에 의존하여 해소하고자 한다. 그러나 2부에서 크림힐트는 결혼과 자신이 낳은 아이마저 복수의 수단으로 사용하여 복수라는 목적을 반드시 달성하려는 냉혹한 여전사의 모습을 보인다.

 

이는 시각적으로도 명확히 드러난다. 1부에서의 크림힐트는 순백의 옷을 주로 입었으며, 그녀의 화장 또한 2부에 비하면 굉장히 연한 편이다. 그러나 지크프리트의 장례식에서 검은색 옷을 입은 후 그녀는 다시 백색의 옷을 입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는 아예 사라지고, 완전히 굳어 있다. 1부와 2부의 전환에서 지크프리트를 잃은 데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보다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2부에서의 크림힐트의 모습이 납득가도록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크림힐트가 지내던 부르군트족의 성이 굉장히 정적으로 묘사된 것도 흥미롭다. 그녀의 감정이 동요되고 고조되어 피의 복수를 결심한 후, 그녀는 정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역동적인 세계로 이행한다. 바로 훈족의 왕, 에첼의 왕국이 그러하다. 보름스 성은 굉장히 웅장하고 정제된 성이다. 보름스 성의 영웅들은 모두 키가 크고 건장하며, 굉장히 세련된 무기를 갖춘 모습이다. 인물들의 의상의 문양을 살펴보면 기하학적이고 화려하다.

 

그에 반해, 훈족의 왕국은 흙으로 지어진 건축물이 주로 등장하며, 에첼 왕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의 모습이 부르군트족에 비해 왜소하다. 기개 넘치는 부르군트족의 풍채와 대조적으로 다소 우스꽝스럽고 경박스러운 몸짓이 강조되기도 한다. 또한, 구성원이 대체로 갑옷은커녕 제대로 된 옷을 갖춰 입지 않고, 원시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나무 주위를 도는 의식을 치르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정반대되는 세계로의 이행은, 크림힐트의 감정선과도 유사하다. 그녀는 자신의 들끓는 분노와 요동치는 슬픔을 안고 복수를 결심한다. 그리고 복수에 대한 굳은 의지를 보이며,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고 숨기면서 냉혈한의 크림힐트로 나아간다. 2부에서 내내 크림힐트는 딱딱하게 굳은 모습이다. 그러나 1부에서 2부로의 전환에서 그녀의 감정이 고조되는 것에 대한 충분한 묘사가 있었기에 굉장히 역동적이고 혼란스럽기까지 한 훈족으로의 이동은 그녀의 감정선에 대응되는 행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묘사는 관람객이 크림힐트의 복수에 더 몰입하도록 하며, 더 긴장하도록 한다. 크림힐트는 복수를 위해 자신의 세계를 깨고 나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세계까지 깨고 나온 크림힐트의 복수가 과연 어떻게 진행될지 관객들이 더 기대하고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크림힐트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관객이 그 복수에 몰입하고 정당성을 부여하도록 한다. 즉, 독일 민족들이 당시 1차 대전 패배 및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겪고 있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태도로 독일 민족의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지는 ‘복수’와 ‘충의’ 등의 가치를 떠올린 것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영화에서 제시되는 중요한 가치들을 체화함으로써 독일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각인하게 된다. 동시에, 당시의 고통을 불러일으킨 것에 대한 복수 혹은 폭력적인 타개의 당위성을 얻게 된다. 그 적이 형체 없는 적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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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심? 나치즘?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의 각본가이자 프리츠 랑의 아내인 테아 본 하르부는 나치 당원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프리츠 랑도 나치즘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의 정치적 색은 불분명하다. 히틀러가 등장할 즈음 프리츠 랑은 미국으로 망명하여 나치즘을 비판하는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으나, 이 영화가 나치즘을 지지하기에 좋은 영화라는 점과 결정적으로 그의 아내가 나치 당원이었다는 점이 나치즘에 대한 의심이 지속되게 했다. 이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서술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겠다.

 

테아 본 하르부는 이 영화의 각본을 제작할 때, 이미 유명한 작품이었던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를 참고하지 않았다. 두 작품의 가장 큰 차이는 다음과 같다. 바그너의 작품에는 신과 그의 후예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고, 랑의 영화는 지상의 인간들에 집중되어 있다. 직접적이고 현실적으로 독일인의 민족성을 보여주려 했다는 의도로 파악할 수 있다.

 

이는 당시 독일인이 직면한 문제, 즉 자존심, 민족성, 고유성 등에 대한 고민을 해소하는데 이 영화가 매우 큰 역할을 했다는 주장에 더 강한 설득력을 부여한다.이처럼 프리츠 랑은 자신의 영화를 통해 독일 민족이 바라고 있던 독일 민족성의 결핍을 크림힐트를 비롯한 신화의 등장인물이 지향하는 가치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 같다.

 

특히 정치적, 경제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매우 강인한 영웅을 그려낸 영화는 국민의 애국심을 북돋우고 위로하기에 좋은 수단이었을 것이다. 프리츠 랑은 실제로 이 영화가 독일의 국민을 위로하고, 그들의 애국심을 돌보기 위함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므로 중세의 영웅 신화를 단순히 독일인에게 보여주겠다는 의도가 아닌, 그런 신화적인 사건이 1924년 당시 국민의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주의의 성장은 나치즘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위한 배경이 되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지크프리트는 용맹하고 위대한 정복 민족인 전형적인 고대 아리아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아리아 인종의 혈통을 가장 순수하게 보존하고 있는 집단이 다름 아닌 게르만 민족이며, 따라서 유대인은 종교적으로 이질적일 뿐만 아니라 독일 고유의 민족성을 해치는 적대적인 존재로 대상화된다. 결국, 영화 ‘니벨룽엔’은 독일 민족이 마주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제작되었으나, 또 다른 시대적 사건을 낳게 된 나치즘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오용되기도 한 것이다.

 

가장 독일적인 예술사조 ‘표현주의’. 표현주의는 비평가들마저 의견이 일치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개념을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렵다. 그러한 표현주의를 관통하는 가장 큰 특징은 시대를 반영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프리츠 랑의 영화 ‘니벨룽엔’은 시대를 철저하게 반영하는, 어쩌면 가장 표현주의적인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기존의 신화를 그 시점에 독일 민족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재해석했다는 것을 통해, 영화 ‘니벨룽엔’은 특히 표현주의 영화로서 시대적 배경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시대적 문화 산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기선. (2010). 현대예술 및 문화 : 신화의 소재와 영화 -시구르드 Sigurd/니벨룽 Nibelung 영웅 신화의 경우. 브레히트와 현대연극, 22(0), 223-252.

매일신문, 2007.03.31., “(이 책을 읽는다)‘게르만 신화·바그너·히틀러’”, (최종검색일: 2022.05.31.)

명정. (2022). 게르만 신화 에다 다시 읽기 - 구드룬의 복수를 중심으로. 독일언어문학, 95, 61-83.

오순희. (2018). 모더니즘의 눈으로 바라 본 중세-프리츠 랑의 영화 <니벨룽엔>을 예로. 129

이솔.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의 텍스트성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4. 서울

 

 

[장민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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