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불의 잔해 속에서 고물처럼 굴러다닌 여섯개의 엉덩이 - 연극 '육쌍둥이'

글 입력 2022.07.19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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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산 참사 현장에 남겨진 여섯개의 엉덩이



10년도 넘은 세월 전에 용산의 망루에서 불이 솟구쳐 올랐다. 솟구쳤던 불 아래에 송수관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낙타처럼 동그란 두 덩어리에 허벅다리처럼 뻗어나 형태를 한 송수관은 어린아이의 뒷모습처럼 보였다. 그것들은 부끄럼 없이 엉덩이를 내놓은 아기처럼 보였고, 또 그런 참사에서 태어난 것처럼 보였다. 설치미술을 구상하던 작가는 기저귀에 이름을 써서 엉덩이를 가려주었다. 고철을 줍는 고물상처럼 그는 그것들을 수거해 작품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이름을 가진 육쌍둥이의 탄생이었다.

 

연극 '육쌍둥이'는 용산 참사 현장에서 발견한 송수관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송수관에 둘러싸인 기저귀처럼, 연극의 등장인물도 이름이 적힌 기저귀를 차고 등장한다. 이들은 등대 아래에서 사랑을 나눈 어린 커플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섯명의 아이는 그들에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나가던 고물상에게 거두어져 자라게 된다.

 

고물상은 더러운 고철 덩어리 사이에서 여섯 아이를 키웠다. 그 아래에서 이들은 제대로 된 교육받지 못하고 폭언과 폭력에 시달렸다. 그런 고물상에게도 아내가 있었다. 아내는 고물상의 폭력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느리고 어눌한 아내는 밥을 주는 것 외에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지 못했다. 지적 장애가 있는 막내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집을 나왔다.

 

이들이 다시 모인 것은 고물상이 죽고 나서였다. 밖에 나온 이들은 각자 밖에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이야기하고, 아버지에게 갖고 있었던 어두운 감정들을 공유한다. 폭력을 당하고, 쫓겨나고, 끔찍한 환경에서 각자 발버둥 친 이들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한데 모인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들에게 재개발할 땅을 남긴다. 단, 땅을 분배할 권리는 막내에게 있었다.

 

막내에게 관심이 쏠리던 그때, 말을 아끼던 막내가 폭발하여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것이 밝힌다. 아버지는 재개발로 인해 다른 집단과 갈등 관계에 있다가 어머니에게 그 분노를 표출한다. 막내는 그를 막아서다 죽이고 만다. 막내는 아버지에게 붙었던 불이 자신에게 옮겨붙었다고 소리 지르면서, 가족들에게 이 불을 가져가 달라고 부탁한다. 형제들은 막내에게 몰려와 오랜만에 어린아이들처럼 웃으며 서로를 껴안아 본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도 잠시, 막내는 그런 그들을 모두 살해한다. 그리고 고물상의 아내에게 불이 꺼졌느냐고 묻는다. 아내는 그렇게 묻는 막내를 조용히 찌르고 그 자리를 빠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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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욕망과 희망의 언어 불


 

용산에 붙었던 불은 순식간에 옮겨붙어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리고 그 불을 옮겨붙게 한 것은 거대한 자본과 권력이었다. 고물상의 아버지에게 붙은 것도, 불게 타는 형상이 여섯 아이에게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것도 다 그것이 원인이었다. 불을 꺼달라는 막내의 외침에 들러붙은 여섯 아이가 모두 불이 붙어 죽고 말았다.

 

하지만 불은 단순히 자본의 욕망만을 상징하지 않는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성을 정의하는데 돈을 제외할 수 있을까? 우리는 소비를 통해 존재한다. 자본은 나를 정의하고 남을 구분 짓는다. 자본주의 사회뿐만 아니라, 문명이 시작된 이래 우리는 자본을 통해서만 사회적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자본은 인간을 구별 짓게 만들었지만, 반대로 그 덕에 그 자신을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육쌍둥이'의 끝에선 비극의 대물림으로 재현된다. 돈, 혹은 욕망은 형제들이 잠깐이나마 뭉칠 수 있게 하는 매개체이기도 했지만, 꺼지지 않는 불이 옮겨지고부터 모두를 잔혹한 죽음으로 이끈다. 흥미로운 것은 막을 장식한 그들의 어머니가 10년 정도 차이가 나는 형제로 등본에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고물상의 친딸인지, 육쌍 쌍둥이와 같이 어디서 고물처럼 주워온 아이인지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는 어머니 역할을 떠맡았을 뿐, 그들의 형제와 같은 존재라는 점이다.

 

막내와 마찬가지로, 어머니 역시 용산 참사의 망루 아래 어딘가에서 거둬진 삶을 살아왔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들이 아버지에 대한 분노, 그들을 버리고 간 형제들에 대한 분노를 느꼈을 수도 있다. 빨간 옷을 입은 그녀는 어쩌면 모든 재산을 독점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막내를 찌르고 돌아가는 어머니의 눈빛에는 실없는 웃음이나 망설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그가 마지막 불씨가 되어 관객석을 가로질러 떠났다는 것뿐이다. 연극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야말로 이 사회에서 묵묵히 굴러가는 현대인을 대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꺼지지 않는 불씨는 다시 객석으로 돌아와 우리 사회에서 남아 불타오를 때를 기다린다. 그것이 새로운 기회가 될지,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 될지는 모른다. 용산참사에서 타오른 불이 용산주민의 탐욕이라는 오명을 쓰고 민중의 촛불로 이어지지 못한 것처럼 순식간에 꺼져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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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곱 개의 이야기



연극 육쌍둥이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작중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살아있다는 점이다. 연극에서는 그들의 의자가 약간씩 다르게 장식된 것으로 표현된다. 가난과 아버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자기 삶을 꾸려나가지 못한 어머니와 막내 조진 내는 아버지가 끌던 수레에 앉아있다. 막내가 아버지의 유산-불-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첫째 박화자는 끝까지 집에 남아있지만, 아버지의 압력과 가난에 못 이기고 그 냄새가 자신에게 묻어나는 것을 고통스러워한다. 그는 집에서 뛰쳐나온 후에야 자신의 향기를 되찾는다. 그는 이제 자신의 정체성과 자기 삶을 되찾은 것이다. 오랜만아 있었던 만큼 아버지의 시체를 처리하는 등 장남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집과 다시 연루되는 것을 피한다.

 

둘째 이기라는 집안에서 쫓겨나듯 나왔다. 아무것도 없이 내쫓긴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짜장면집 주인에게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는 결국 그들의 양녀가 되는 데 성공한다. 낙관적이고 밝은 그는 이제 짜장면집 딸에게서 멈추지 않고 아이돌이 되는 것이 꿈이다. 이기라는 다른 형제들에게 애교도 부리고 반가움도 표현하는 등 친근한 모습으로 대한다. 하지만 형제 중 가장 현실적이고 야망도 큰 인물로, 재산과 관련해서 가장 먼저 말을 꺼내고 이야기를 주도한다.

 

셋째 최고야는 아버지의 폭력을 심하게 당한 인물이다. 그는 가출한 후 부유한 집에 입양되었지만 폭력을 당한다. 최고는 pc방을 전전하면서 현실을 부정하면서 살아간다. 최고는 극 중 내내 현실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항상 가짜 총을 가지고 다니는 그는 이 현실 세계에서 부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중에서는 막내에게 주먹을 휘두른다. 폭력적인 언행은 그가 아버지에게 당했던 것으로, 그가 여전히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넷째 신기해는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았지만 또한 당했다. 그는 아버지가 도운 덕에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살았다. 그는 박화자와 마찬가지로 집안의 냄새를 끔찍하게 싫어한다. 신기해는 아버지를 마냥 미워하지 않는 것처럼 표현하지만, 사실 그 안에는 최고야와 비슷한 음습한 분노가 잠들어 있다. 최고야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완벽한 사각형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인물이다.

 

다섯째 박수처는 집을 나온 뒤 술 취한 노숙자로서 생활했다. 그는 작중 내내 알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내고, 가족들로부터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박수처의 이야기들은 작품의 핵심 메시지를 뚫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주제를 끌어내 가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아버지의 악을 이어 더 큰 악이 되는 아들의 이야기나, 가출한 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조진 내의 이야기가 그렇다. 거리의 철학자처럼 그는 약간 달관한 태도로 일련의 사건을 관찰한다.

 

막내 조진내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말이 어눌하고 명확한 판단이 되지 않는 그는 아버지의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그는 자신이 아니라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를 막다가 살해했다. 마지막 순간 형제들이 껴안을 때 그는 약간 벅찬 표정을 짓지만, 결국 모두를 살해한다. 그리고 그 옆에는 조진 내를 너무나 닮은 어머니가 있었다. 형제들의 말처럼, 이들은 정말로 닮았다. 이들은 아버지의 폭력 밑에서 조용히 고통을 감내하고, 마지막 순간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것들을 찔렀다.

 

 

 

4. 나가며


 

연극 육쌍둥이는 한 가지 메시지로 어려운 작품이다. 용산참사를 다루고 있지만 어떤 행동적 메시지를 촉구하기보다, 퍼져나가는 불 속에서 여러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충실히 담아낸다. 같은 날 태어난 이들은 다른 삶을 살았지만 같은 비극 속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서로 같은 시간에 지리는 아이 같은 존재기도 하다. 이러한 연극의 표현은 돈이나 욕망에 울고 웃는 우리의 얼굴들을 상상하게 한다.

 

작중에서는 불로 표현되었지만, 육쌍둥이의 비극을 초래한 것은 단순히 돈만은 아니다. 당장 아버지는 그들을 거두어준 은인인 동시에 삶을 파괴한 장본인 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반대로 재개발 사업에서는 피해자의 역할에 섰다. 그렇다 해서 조진 내와 고물상의 아내를 때린 것이 오로지 불만은 아닐 것이다. 불이 옮겨붙고 모든 것을 불태웠다 해서 그것이 모든 것의 원인이라 보기도 어렵다. 어쩌면 불에 너무 가까이 가서 몸이 타버린 것이 문제인 건 아니었을까?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았던가?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비극으로 이어졌을지언정- 형재가 조진내를 감싸 안는 장면이 꿈처럼 아름답게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조진 내는 자신의 불을 끄지 못하고 주변인까지 끔찍한 결말을 맺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조진내는 고통을 지운 표정을 지우고, 형제들은 마티스의 춤처럼 행복한 표정으로 주변을 둥글게 돌았다. 모닥불에 모인 가족들처럼 따뜻해 보이는 그 가능성이 이 혼란스러운 세계를 희망찬 시선으로 다시 마주할 이유 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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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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