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스케치] 이리와, 따뜻한 죽음이구나.

<할머니의 팡도르>, 안나마리아 고치 글 · 비올레타 로피즈 그림
글 입력 2022.06.26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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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팡도르.jpg

 

 

 

#삶 #죽음 #인생 #할머니 #팡도르 #크리스마스

 

 



Essay.


 

그날, 나는 빵을 굽고 있었어. 여느 날과 다름없었지.

 

죽음이 정말로 날 찾아왔을 땐 많이 놀라지 않았어. 나는 걔를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근데 타이밍이 안 맞았어. 가기 싫었던 건 아니고, 단지 타이밍이 아주 안 좋았을 뿐이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준비할 디저트를 반죽 중이었거든. 마침 그 반죽 덕을 볼 줄이야! 날 재촉하지 못하게 재빨리 반죽을 걔 입에 넣어버려서 위기를 모면했지. 그렇게 달콤한 맛은 죽음마저도 거부할 길이 없었던 게야.

 

걔는 한 번도 누군갈 기다려준 적은 없다고, 빨리 가야 한다며 나를 재촉하더라(기다릴 땐 오지도 않더니!). 그래도 착한 애였어. 단번에 날 데리고 가지는 않았지.

 

꼭 내 손주 같아서 나는 걔한테 빵도 주고 쿠키랑 아몬드도 주고 누가도 주고 귤도 까 주었어. 아마 처음 맛보는 것들이었을거야. 그렇게 시간을 번 덕분에 대망의 크리스마스 디저트, 팡도르까지 완성을 할 수 있었지.

 

그래, 정말 난 거기까지만 할 예정이었어. 그런데 마지막 디저트인 핫초코를 내밀었는데 세상에, 애 얼굴이 완전 울상이더라고. 가엾은 죽음, 그는 삶을 맛본 거야. 그렇다 해도 죽음이 삶 속으로 들어올 이유는 결코 없었겠지만. 그래도, 그 감정에 다다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야.

 

나는 죽음을 안아주었어. "이리와, 따뜻한 죽음이구나" 하고.

 

 



Point note.


 

1) 흐름 및 구성 - 눈이 내린 흰 언덕에 작은 집이 있다. 천막을 걷어내듯 죽음이 언덕 아래에서 고개를 내밀고, 할머니가 사는 작은 집으로 찾아가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가 정면에서 죽음과 할머니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점으로 그림책은 진행된다. 따로 확대되거나 강조되는 부분은 없다. 일관된 구도로 인해 둘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바라보는 느낌이 든다.

 

빨간 동그라미는 여러 종류의 디저트를 포괄하거나 대표하는 조형이지만, 이 그림책에서 리듬감을 만들어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 빨간 동그라미는 죽음의 몸속으로 들어가 심장처럼 빛을 내는 것 같기도 하다가, 죽음의 품 안에 쌓였다가, 흰 눈밭에 펼쳐지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시각적 강약을 조절한다.

 

2) 그림과 글 - 그림에 빨간색 동그라미로 그려진 디저트는 사실 여러 종류이다. 글이 지시하는 내용에 따르면 이 빨간색 동그라미는 어떤 장면에서는 빵이고, 어떤 장면에서는 아몬드이거나 팡도르라는 걸 알 수 있지만, 어쨌든 그림만 보면 모두 같은 빨간색 동그라미일 뿐이다. 글은 팡도르를 '금빛의 별 모양'이라 써 놓고, 정작 그림은 단순한 동그라미 형태에 빨간색으로 그린 것이다. 이 간극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림책에서 글과 그림은 일대일 대응 관계가 아니다.* 이 관계를 이해하면 글과 그림을 원하는 방식으로 배치하고 활용할 수 있다. 이 그림책에서는 다양한 디저트를 제대로 묘사하여 보여주는 것을 포기한 대신, 전체 흐름에서 리듬감을 표현할 장치를 만들어냈다. 여러 종류의 디저트를 하나의 조형(빨간색 동그라미)으로 통일함으로써 책장을 넘기는 독자는 그림에서 바로 디저트를 알아볼 순 없지만, 시각적인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면 글은 한껏 섬세한 묘사를 뽐내고 있다. "건포도 조각 속에는 가을날 포도밭의 정취가 가득했어요. 쏟아지는 햇볕과 부드러운 바람, 달콤하게 익어 가는 포도 향기에 사신은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이처럼 맛을 느낀 죽음의 당황스럽고도 황홀한 감정을 탁월하게 전달하는 문체가 곳곳에 돋보여서 마치 문학 작품을 읽는 느낌이 든다.

 

이처럼 글과 그림이 긴밀하게 상응하지 않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글과 그림이 서로 보완하거나 보충하는 느낌보다 각각의 역할을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말하면 나는 글과 그림을 따로 보는 게 더 편했고 집중이 잘 되었다. 오히려 글을 보고 그림을 다시 확인하면서 그림책을 보면 흐름이 깨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경우, 글과 그림이 함께 그림책으로 만들어졌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조금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확실히 그림을 단순히 내용을 설명하는 도구에 그치지 않고 시각적인 재미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는 흥미로운 책이다.

 

*<그림책론>, 페리노들먼, 86쪽 각주 - 글은 그림을 해석하는 방법을 제공해주기는 하지만 그림이 담고 있는 풍부한 서사를 결코 완전히 제시할 수는 없다. 그림 또한 글의 서사를 충분히 담아낼 수 없다. 따라서 글과 그림의 관계는 항상 일대일의 대응 관계가 아니라, 차이를 갖는 아이러니로 나타난다.

 

3) 캐릭터 - 형태: '죽음'이라는 무형의 개념을 어떻게 표현할까? 여기서 해답은 '캐릭터로 만들기'이다. 죽음의 얼굴은 커다란 구멍 모양이고 검은 담요를 머리까지 두른 듯한 둥근 형체에 팔과 다리가 달린 캐릭터로 그려져 있다. 이 형체는 어떤 장면에서 실처럼 흩어지기도 하고, 맨살을 드러내기도 하고, 얼굴과 몸 전체를 그릇으로 사용하는 등 변화한다.

 

이렇게 캐릭터의 기본 형체가 다양하게 변화하거나 응용되는 모습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시각적인 형체에서 내용이 비롯한 건가 하는 짐작이 들 만큼 자연스럽다. 그림 작가가 글의 내용을 충분히 인지하고 캐릭터를 설계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부분이다.

 

- 성격: '죽음'. 그는 성실하지만 단호하지 못하며, 마음이 따뜻하다. 성실했기에 할머니를 데리러 매일 찾아가지만, 단호하지 못하기에 번번이 실패하고 할머니는 디저트를 완성할 수 있었다. 결국 마음 약한 죽음이 죽음을 이행하지 '못하고', 할머니가 죽음을 이끌어가는 새로운 형국에 이른다. 독자 입장에서는 캐릭터의 성격을 단지 이야기 속에서 깨달을 수 있을 뿐이지만, 작가는 처음부터 기획해야 할 것이다. 이 그림책처럼 캐릭터의 성격은 이야기를 만들고, 반전의 요소까지 내포하기 때문이다.

 

4) 색 - 빨간색, 검은색, 파란색, 세 가지 색이 사용되었다. 검은색은 죽음을 상징하는 색이고 빨간색은 피와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의미 자체는 대립적이지만, 시각적으로 색은 조화롭게 공존한다. 파란색은 아주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지만, 빨간색과 검은색의 경계를 풀어주는 듯한 느낌이 든다.

 

 


Brief comment.


 

꽤 오랜 시간, 누군가 죽으면, 죽임당한 것처럼 믿어졌다. 이런 나의 '오해'는 죽음에 관해 한 가지 생각만 고집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죽음이 다정한 것이라면 언제든 오라 초청할 수 있을 것이고, 죽은 사람이 어떤 다정함 속에 있다고 생각하면 아주 많이 슬퍼하지 않을 수도 있을 테니까.

 

실상 죽음에 따뜻함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수있느냐, 누군가는 반문할지 모르겠다. 이때 힘을 발휘하는 것이 이야기다. 어떤 이야기는 객관적인 진위 여부나 공식적인 논리를 앞세우지 않고 먼저는, 자기 자신에게 더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아보라고 안내한다. 그리고 기다린다. 우리가 그 세계에서 한 번은 놀 수 있도록, 자기만의 이야기를 '다시' 쓸 수 있도록.

 
 
 
Workshop Idea.

 

1) 캐릭터 - 무형의 개념을 캐릭터로 만든다면 새로운 형체를 만들 것인지, 기존의 사물이나 동물에 성격을 부여할 것인지 결정한다. 그 형태와 색깔이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과 연관이 있는지 생각한다. ex) 불안한 감정을 나를 자꾸 따라다니는 '새'로 그려보기. 새는 어디든 날아갈 수 있고, 내 옆에 있을 수도 있다는 성격을 활용해본다.

 

2) 이야기 - 두렵거나 나쁜 것이라 생각했던 감정, 사람, 에피소드 등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는 이야기를 만든다. / - 그림책에 반전의 요소를 넣고 싶은가? 두 캐릭터의 역할을 말미에 바꿔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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