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능청스럽고 혼란한 이야기와 함께 – 엄청난 속도로 사랑하는 [도서]

글 입력 2022.06.2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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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청스럽고 혼란한 이야기와 함께



엄청난 속도로 사랑하는. 처음에 시집의 이름을 봤을 때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사랑의 속도를 표현하는데 ‘빠른’이라거나 다른 수식어가 아니라 ‘엄청난’이라는 단어를 고른게 매력있다. 그래서 어떤 내용의 시집일까 궁금해지기도 했는데 책을 다 읽은 지금 이 수식이 주는 단어의 느낌이 시의 내용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출판사에서는 구속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선사하는 해방감이라는 말로 책을 소개하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이 시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형적인 형태를 벗어난다. 물론 시의 중요한 역할이 기존의 관습과 정형에서 탈피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시답다고 말할수도 있을 것이다. 동시에 그만큼 독특한 시들도 많기 때문에 시의 정형적인 형태를 벗어난다고 표현하기에 다소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쉽게 접하고 흔히 배우던 것과는 차별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책 속의 시는 행과 연으로 구분되어 있는 형태가 아니고, 어미나 형식을 파괴하는 시의 형태도 아니고, 대부분의 시가 산문시의 형태이면서 이야기가 완결 구조를 이루지도 않는다. 물론 이정도 짧은 구조의 글에서 완결성을 바라는 것은 무리겠지만 ‘이야기’에서 흔히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뜻에서 위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조금 더 솔직하고 거칠게 말하자면, 책의 이야기가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튀고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유계영은 추천사를 통해 고민형의 시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것처럼” 굴지만, 이야기 양식을 주저 없이 위반하는 것을 통해 독자를 낯선 곳에 풀어놓는다고 말한다. 전통적인 이야기의 굴레에도, 시의 굴레에도 속하지 않고 어디로든 뻗어가려 하는 고민형의 언어를 통해 강렬한 해방감을 맛보기를 바란다.

 

- 출판사 소개



추천사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고민형 시인의 시집에서는 이런 부분들이 이야기를 흥미롭게 느끼도록 만들고, 동시에 난해하고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 부분이 고민형 시인과 그의 작품들에 대한 평가가 갈리게 될 주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이 시를 읽으며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라고 느낄 것이고 누군가는 추천사에서처럼 ‘강렬한 해방감’을 맛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책에 대한 감상평을 느껴야 하는 입장에서 조금 당황스러웠으나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해방감 비슷한 무언가를 나도 조금은 느꼈을지도 모르고, 그의 이야기가 능청스럽게 우리를 혼란하고 엉뚱한 곳에 데려가지만 그것이 능력 부족으로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 엉뚱한 곳에 작가만의 무언가를 준비해놨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한 편을 같이 살펴보자. 조금 길지만 분명 재미있을 것이다.

 

 

제목: 오 분


미치겠다. 모든 게 엉망이 됐다. 내 생각에 그 일은 어느 젊은 부부에 의해 일어났다. 아마도 잠깐 아이들이 버튼을 가지고 놀았고 다시 직원들에 의해 제지되었던 모양이다. 오 분 동안 주유소에서는 기름 대신 콜라가 나왔다. 신문에는 낙서가 가득했다. 사람들은 주먹으로 서로를 치는 대신 꼬집고 할퀴었다. 낙타의 혹이 하나 더 늘어났고 얼룩말과 기린의 무늬가 섞인 동물이 골목을 걸어 다녔다. 콜라를 넣은 자동차는 잠깐 하늘을 날았다. 마침 손을 잡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아기들이 태어났다. 한쪽 손에 크레용을 쥐고 태어난 아기들은 큰소리로 노래를 부렀다. 그들이 이불 안으로 들어가면 장롱이나 냉장고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다. 오 분 뒤에 모든 것이 돌아왔다. 옥상에서 떨어진 사람은 바닥에서 다시 튀어 오르지 않았다. 누군가 쏜 총에서는 비눗방을 대신 총알이 발사되었다. 초콜릿은 한 번 부러지면 붙지 않았고 땅에 떨어진 사탕에는 모래와 먼지가 묻었다. 동물원에서는 악취가 났다. 식탁 위에서 물고기가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일도 없었다. 남녀가 함께 잠을 자도 아기가 드물게 만들어졌다. 아기들은 자주 울었고 부모의 손에 무력하게 자신을 맡겼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겠다는 방송이 나오고 어느 젊은 부부의 아기가 어떻게 그 버튼을 가지고 놀았는지 분석하는 기사가 연일 나왔다. 오 분 만에 엉망이 되었던 도시는 몇 달에 걸쳐 복구되었다. 책임을 지고 사퇴한 직원이 야당의 대변인이 되었다. 그가 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오 분이 누군가의 의도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누군가는 권력을 잡고 있고 다시 그 오 분이 돌아오기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가 지지하는 야당의 대권주자에게 표를 던졌다. 그가 주장한 복지 정책에 내가 딱 들어맞았다. 그가 오 분 동안 정장 대신 기저귀를 차고 누군가의 품에서 응석을 부리고 있는 사진이 공개되었을 때도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 다시 오 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그를 비판하는 사설을 읽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이 책을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서도 사랑한다.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도 이 문장들이 좋다. 이 혼란함과 능청스러움이 좋다. 그런데 이것이 어딘가 익숙하다. 나는 분명 이와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다. 바로 삶이다.


내 이야기를 잠시 해볼까. 나는 중학교때부터 고등학교때까지 상담사가 되고싶었다. 내가 가진 아픔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고 의미있는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서였다. 학교다니는 내내 그걸 목표로 공부했고 내가 읽는 책의 90%는 심리학과 관련된 책이었다. 그런데 결국 상담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학과에 갔다. 그 한 학교를 제외하고는 모두 상담 관련 학과를 지원했는데 혹시 모르니 장학금을 주는 학교에 안전하게 지원해보자고 했던 선생님의 권유에 못 이겨 쓴 학교였다.


하지만 입학만 하면 장학금은 준다던 그 학교에서는 또 여러 가지로 일이 꼬여 장학금을 받지 못했다. 그러고는 반수를 하려다 우여곡절 끝에 학교에 적응을 했고, 각종 대회에 성적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나는 이 길을 가겠구나 생각했는데 지금은 또 완전 관련이 없는 일을 하고 있다. 나랑은 전혀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도 나는 나름 적응을 잘 했고, 평생 이 일을 해볼 생각도 했는데 또 새로운 일을 준비하게 되었다.


오래오래 좋아했던 짝사랑과는 데이트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고, 이상형과 아주 멀다고 생각했던 누군가와 연애를 했다. 돌아보면 내 생각대로 된 일이 신기할만큼 없다. 그런 나의 눈에 들어온 또 한 작품이 있다.

 

 

제목: 새와


친구가 ‘새와 미술관’에 갔다고 했다. 나도 가고 싶었다. 그곳에 가고 싶었던 이유를 당신은 잘 모를 것 같다. 미술관은 새를 자기 안에, 꽃을 영화를, 그림을 전시실에 둔다. 나무와 미술관보다, 새와 미술관에 가고 싶고, 사탕과 미술관보다, 지하철과 미술관보다, 맥주와 미술관보다, 눈과 미술관, 눈과 미술관은 보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밥과 미술관보다, 티베트와 미술관보다, 양말과 미술관보다, 마룻바닥과 미술관보다, 치즈와 미술관보다, 새와 미술관에 가고 싶었다고 말하면 당신은 고개를 끄덕여줄 것 같다. 친구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잇다. 사실은 세화 미술관이었지만, 새와 미술관이어도 괜찮다고 이해해주는 친구들과 당신은, 영원히 알지 못할 거야. 이제 잠이 오고 자고 일어나면 다시 그곳으로 갈 수 있는 튼튼한 다리가 있으니까 괜찮다. 세화 미술관으로 가는 길엔 새가 지저귄다. 광화문에는 광화문 광장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찬성하는 사람들이 걷고 있다. 그들의 집, 오피스텔, 아파트를 지나면서 내가 떠올린 나무, 치즈, 맥주를, 모르겠지. 그럼! 알지 못하겠지. 당연하지. 우리는 그렇게 하기로 했으니까.


 

나는 혼란함과 능청스러움 한편에 있는 이 명랑함과 쾌활함이 좋다. 그게 보여주는 삶의 태도 같은 것들이 기분 좋다. 새와 미술관이든 세화 미술관이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진짜 중요한건 그게 아닐 것이다. 내가 생각하지 않았던 곳으로 나를 자꾸만 이끌고 가는 삶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걸까. 예측 불가능한 일상들을 받아들이는 일은 나의 몫이다. 또 한가지, 새와 미술관이든 세화 미술관이든 상관없이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걸어주는 친구가 있다면 그것도 정말 행복한 삶일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은 이 책이 나한테 그런 친구의 역할을 해줄수도 있을 것 같다.

 

 

 

추천사: 우연은 필연, 그러므로 순간은 모름 모름 모름! - 유계영(시인)


 

고민형의 시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것처럼 군다. 의자를 당겨 앉고 귀를 기울이게 한다. 읽게 하기보다는 듣게 한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척하는 포즈, 그런데 이건 다 너스레다. 이야기꾼이었다면 결코 어기지 않았을 이야기 양식들을 주저 없이 위반하는 것을 보라. 고민형은 기승전결을 꾀하거나, 이야기를 거점 삼아 시적 도약을 꾸미지 않는다. 때문에 고민형의 시는 이야기의 취향이 아니라 모험의 운명을 따른다. 시의 혈관을 타고 모험가의 기질이 흘러 다닌다. 우연의 순간이 필연의 결과를 맺는 위치까지 우리를 데려가놓고는, 다시 우연으로 뿔뿔 흩어져버리도록 우리를 낯선 곳에 풀어놓는다. 기대에 묶여 꼭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을 때, 이토록 상쾌한 손바닥!

 

시집을 읽다가 어떤 시에 멈추어 "한 단어, 한 단어가 사랑스럽고 너무 많은 비밀을 말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면, 그 또한 고민형이 계획한 장치가 아닐 것이다. 그는 "모름 모름 모름"의 징검돌을 딛고 이미 순간을 벗어나버렸기 때문에. 그러니 우리가 시 속에서 발견한 사랑스러운 비밀들은, 오롯이 그를 제외한 우리들의 것이다. 위성 사진을 통해 낯선 나라의 골목골목까지도 몽땅 들여다볼 수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아직은 모험가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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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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