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진심이 담긴 예술 [미술/전시]

이중섭과 박수근
글 입력 2022.05.20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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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은 자신의 메세지를 한 차원 높여서 전달한다. 그 과정에서 작품 속 현실은 존재 양식을 바꾸어 더욱 모호하고 가상적인 무언가로 탈바꿈한다. 그렇다면 과연 예술작품은 허구인가, 진실인가?

 

예술작품을 볼 때, 내 개인적인 선호는 오직 창작자의 진심으로 결정된다.(지극히 ‘개인적’인 애호의 기준이다.) 영감을 얻어 순간적 아이디어로 창작한 것들보다는 예술가가 열정을 들여 피땀 흘린 작품들이 좋다. 그래서 조금 퇴행적인 관점일 수도 있지만, 혁신적인 현대 예술가들의 추상작품보다는 장인의 걸작이 좋다. 그리고 외형을 만드느라 피땀 흘린 작품보다는 그 속에 담긴 메세지가 진심인 게 좋다. 그저 미를 추구하며 창작한 작품보다는 예술가 자신만의 스토리와 간절함이 담긴 작품들이 내 마음을 울린다. 결국, 나는 진실인 작품들을 좋아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 미를 위한 예술이 아니라 예술가 자신의 표현인 예술, 순간의 마음을 담은 예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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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故 이건희 회장 소장전인 ‘어느 수집가의 초대’를 다녀왔다. 이건희 소장전에는 과연 우리나라 최고 소장가의 컬렉션답게 아름답고 유명한 작품들이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게 했다. 하지만 거대하고 화려한 작품들이 들어차 있는 가운데에서도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아주 수수한, b4 사이즈 남짓,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 작은 그림들이었다. 그 그림들은 자신의 삶,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현실을 진솔하게 담아내고 있었고, 그 앞에 섰을 때 눈이 아닌 마음으로 마주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주 유명한 그림들이라 웹서핑 중에, 잡지에서 몇 번씩 마주쳤던 기억이 있는데도 실제로 보았을 때 느껴지는 그림의 깊이는 감동을 넘어서 충격이었다. 집에 와서 그 작품들을 곱씹고 곱씹다, 이 소회를 공유하고 싶어 글을 쓴다.

 

 

 

이중섭 ‘춤추는 가족’, '현해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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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은 말년에 가족과 떨어져 지냈다. 그는 시시때때로 가족에게 그리움의 편지를 보냈으며 많은 작품이 가족과의 재회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도 그중 하나다. 이중섭과 아내, 두 아들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희미한 미소와 살색보다 조금 더 발간 색채의 사용은 가족과 함께하는 따스함을 잘 전달해준다.

 

춤추는 가족 장면이 유달리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가까이서 볼 때와 멀리서 볼 때의 느낌이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그림을 멀리서 보면, 우리가 익히 보았던 춤추는 가족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점점 가까이 다가갈수록 마치 눈에 눈물이 고여 바로 앞의 잔상이 흐려지는 것처럼 가족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청빛과 홍빛이 제각기 흩어져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효과가 가족을 멀리서 그릴 수밖에 없는 이중섭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또, 가까이 다가가려 할수록 궁핍한 현실을 느끼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이중섭의 처지를 나타내는 것 같아 마음이 시큰해진 채 오래도록 이 그림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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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해탄도 그의 절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현해탄에서 이중섭과 그의 가족들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며 손을 흔들고 있다. 바다보다 더 큰 인물, 인물보다 더 큰 배의 모습은 이중섭이 금방이라도 가족에게 닿을 듯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가족을 향하고 있지 않은 배의 방향, 인물보다 더 큰 물고기는 이중섭의 현실을 보여준다. 그는 가족에게 닿을 듯 말 듯한 상황들을 견뎌내며 그리움을 키워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중섭의 익살스러운 그림 속 아로새겨진 슬픔의 표시는 이국땅의 가족을 그리워하다 떠난 이중섭의 삶의 흔적이었을 것이다.

 

 

 

박수근 ‘아기 업은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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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캐릭커처 같이 단순한 선으로 표현된 소녀의 모습은 투박하다. 현대의 감상자들에게는 귀여운 만화 속 캐릭터처럼 사실적이지 않아 보이는 그림이다.

 

그러나, 작가의 시대 속에서는 어땠을까? 한국전쟁 후 부모 잃은 아이들은 서로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을 뿔뿔이 흩어지고, 어린 소녀는 가장이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림의 개성적이지 않은 얼굴은 그 당시 길거리의 수많은 소녀에게 대입될 수 있는 것이었으며 어린아이가 갓난쟁이를 업고 있는 모습은 흔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즉, 화가와 당시 사람들에게 아기 업은 소녀는 어떤 세련된 초상화들보다도 훨씬 현실적인 이미지로 여겨졌을 듯하다. 더하여 박수근은 그림 전체에 흙바닥의 색과 질감을 주어 재건 이전 삶의 터전이었던 흙바닥 골목길의 느낌을 배가하였는데, 이는 그림의 효과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주변에서 보이는 소녀를 한 치의 과장 없이 화폭에 남긴 박수근의 눈을, 주변을 둘러보고 그것을 정성들여 화폭에 담았던 따뜻한 마음을 여실히 느끼고 존경하게 되는 그림이다.

 

***


진심은 울림이 있고, 마음은 모든 기교를 뛰어넘는다. 앞으로 더 자주 진심이 담긴 작품들을, 아니 진심이 담긴 어떤 종류의 것들이라도 마주치고 싶다. 그리고 내 삶의 자취가 다른 사람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진정성이 가득한 것이길 바란다, 마치 이중섭의 작품처럼, 마치 박수근의 작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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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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