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스펙트럼'으로 타자 감각하기 - 2편: 돌봄 [도서/문학]

글 입력 2022.04.21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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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펙트럼으로 타자 감각하기- 1편: 언어>로부터 이어집니다.

 

 

사실 소설 <스펙트럼> 속 무리인은 아주 새로운 형태의 외계인이라 보기 어렵다. 외형적 특징은 쉽게 이미지화할 수 있을 만큼 전형적인 모습이고, 의식주 형태 역시 원시적인 인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전형성'을 소설의 전반적 서사와 관련해 이해해볼 필요도 있다.

 

소설은 희진에 의한 일방적인 묘사를 독자가 수용하는 서술 형태를 취한다. 여기서 희진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에서 아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무리인에게서 발견되는 ‘인간적인 특징’을 위주로 설명하게 된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이는 재난 상황에서도 희진이 학자적 열망을 태우고 무리인들과의 소통의 의지를 다질 수 있었던 서사적 동력이 되었다 느낀다.

 

 

 

타자화 체험: 외계 행성에서의 조난


 

사르트르는 희곡 <출구 없는 방>의 대사를 통해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문장으로 변주되어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격언처럼 자리잡았다. 타인이 지옥이라 함은 단순히 나를 괴롭히거나 갈등을 빚어내는 타자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주체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고, 타인의 판단에 입각해 스스로를 판단하게 됨을 지적한 것이다. 즉, 주체는 타인의 평가와 판단에 지나치게 얽매이게 되며 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는 지옥과 같다. 타인은 나를 끊임없이 대상화하며 주체성을 훼손시키는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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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트럼」에서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점이 있다면, 이 작품에서 타자적 위치에 있는 인물은 무리인이 아닌 희진이라는 사실이다. 즉, 희진의 1인칭 시점과 손자의 관찰자적 시점에 속기 보다는 무리인들에게는 희진이 외계인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외계 행성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자신의 외계성을 깨달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고, 그렇기에 외계에서의 조난이라는 갈등은 분명한 함의를 지닌다. 그저 허황된 소재로 취급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자신을 타자의 위치에 둘 수 있는 태도는 타자의 범위가 무한히 확장될 가능성이 있는 미래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자질이다. 이 작품은 순수한 열망을 지닌 학자 인물을 앞세워 그 필요성을 몸소 드러낸다. 타자를 관찰함으로써 ‘인간이 아닌 특징’을 소거해가며 인간을 정체화해온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타자에 의해 관찰당할 기회는 그렇기에 신선하고도 소중하다.

 

앞서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언급했는데, 「스펙트럼」은 이 정의의 역설적인 지점을 보여준다. 바로 타인은 주체를 지옥으로 밀어넣는 투쟁의 대상인 동시에, 그에게 존재 가치를 부여해줌으로써 나와 세계를 연결해주는 매개자라는 점이다.

 

희진이 조난 당한 외계행성에서 희진의 존재를 분명히 세운 것은 그림을 통해 그를 관찰하고 기록한 루이의 행동뿐이었다. 그는 어떠한 언어적 소통도 이룰 수 없는 완전히 낯선 땅에서 희진과 세계를 이어주는 매개가 되어 주었다. 아무도 나를 인식해주지 않고 분류하지 않고 정의 내려주지 않는 공간에서는 오히려 타자의 존재가 소중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찰과 증명의 행위는 일방적이지만은 않다. 희진 역시 무리인과 루이에 대한 관찰을 이어가고 잎종이에 이를 기록하기 때문이다. 루이는 희진을 정의할뿐만 아니라 기꺼이 정의 당해주는 타자로 작용한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각자의 사고의 틀로 이해하려는 느즈막한 시도가 소설 전반에서 계속되는데, 국소적인 사고의 틀로 성급한 정의를 내리곤 하는 오늘날의 우리의 태도와는 상반된다. 희진은 연이어 지적 소통에 실패하면서도 좌절에 빠지지 않는데, 루이와의 고요하고 꾸준한 관계를 붙드는 것은 오히려 그 끝없는 실패에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루이와 희진은 서로에게 훌륭한 타자이다.

 

그렇기에 40년 후 기적적으로 생환한 희진의 태도는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희진은 자신을 ‘최초의 조우자’라 주장하면서도 그럴듯한 증거를 대지 못한다. 실제로 희진이 손자에게 들려주곤 하던 이야기는 종종 인과관계가 맞지 않았고, 매번 내용이 조금씩 바뀌기도 했다. 손자를 비롯한 지구인들은 희진 이야기의 진위를 끊임없이 의심하지만, 필자는 그가 일부러 증거를 제시하지 않은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희진은 타자성 앞에서 드러나는 지구인들의 이기심을 잘 안다. 무리인들과 달리 극한의 타자성을 받아들이기에 아직 그들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하다는 점도. 오랫동안 학자적 시선으로 지구인들을 관조하며, 또 지구인으로서의 자신을 돌아볼수록 이는 더욱 확고해졌으리라. 희진은 루이를 비롯한 무리인들이 지구인들에 의해 타자화되는 순간 그들이 맞닥뜨릴 물적·심적 침범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리인은 어쩌면 인간보다도 더욱 인간적인 지향을 세우고 실천하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타자와 돌봄: 부양과 소유


 

인간의 욕구 중 성욕보다도 더 음흉한 심리가 있다면 그것은 부양 욕구라는 글을 본 적 있다. 성적 욕구는 내 앞에 욕망하는 실체가 없더라도 적당한 자극만 주어진다면 느낄 수 있는 흔한 것이지만, 정말 무서운 것은 누군가를 거두고 먹여 살리고 싶다는, 그로 인해 그의 생의 일정 부분을 소유하고 싶다는 부양 욕구라는 설명이다.

 

이처럼 타자를 돌보고자 하는 욕구는 언제나 ‘소유욕’과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부모가 자녀에게 느끼는 부양욕은 아주 숭고한 종류의 것이라 주장하는 이도 있겠지만, 자녀를 향한 소유욕이 낳는 비극을 우리는 여럿 목격 또는 경험한 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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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선 사회 문제에 대해 재고하고자 한다. ‘사랑’이라는 낭만을 두른 폭력들, 실은 타인을 소유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범죄들 말이다. 가정폭력, 아동폭력, 흔히 데이트 폭력이라 일컬어지는 연인 간의 폭력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 우리에게 「스펙트럼」 속 루이와 희진의 관계가 주는 함의는 상당하다. 우리에게는 어쩌면 희진과 루이처럼 건조하면서도 느긋한 돌봄 관계를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희진과 루이의 부양 관계는 그들이 서로에게 아주 이상적인 타자임을 보여준다. 루이는 희진이 자신의 소유임을 의미하는 뿔모양 장신구를 달아주는데, 그것을 본 다른 무리인들은 희진을 위협하지 않는다. 장신구를 자신이 루이의 소유임을 나타내는 표식으로 이해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루이는 묵묵히 희진의 생존권을 보장하지만 그에게 어떤 보상을 요구하거나 행동을 제한하지도 않는다. 타자에게 돌봄노동을 제공하고 그로 인해 그의 생의 일부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욕심이 희진과 루이 사이에서는 관찰되지 않는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문법의 관계가 생겨날 것이라는 은유, 혹은 그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타자와 돌봄: 유한한 존재들의 공생


 

돌봄의 대가로 타자의 삶을 장악하지 않는 무리인의 태도는 그들의 짧은 수명과도 관련 있을 것이다. 무리인의 수명은 약 3~5년 정도인데, 특히 루이는 희진의 영향인지 더욱 짧은 삶을 살다 떠난다. 희진은 그곳에 머물면서 총 5명의 ‘루이’를 만나는데, 그들은 모두 이전 루이의 그림을 살펴보고는 동일한 존재가 아닐까 의심될 만큼 그를 똑같이 돌본다. 김초엽 작가는 거북이를 반려동물로 키우는 인간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를 SF적 상상력으로 변주한 루이와 희진의 관계는 우리를 타자적 위치에 놓을 가능성을 제공한다.

 

헌신적인 부양자는 떠나고, 그 부양의 의도와 저의조차 알 수 없었던 피부양자는 혼자 남게 된다. 끝없는 의문에 대한 답도 주지 않은 채, 애정도 채 지니기 이전에 떠나기에 그 흔한 슬픔 또한 느끼지 않는다. 이 모든 과정이 느즈막하게 진행된다.

 

사실 죽음은 수많은 타자성이 한곳으로 모일 가능성을 내제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희진과 루이는 공유할 점이 전혀 없는 극단적인 타자처럼 보이지만, 적어도 ‘존재의 유한성’이라는 특징에서 조우한다. 즉, 필멸이라는 존재 방식은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타자성으로 인한 갈등이 죽음의 가능성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는 지점은 역설적이면서도 흥미롭다. 3년이든 30년이든,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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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트럼」 속 루이와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자크 데리다의 ‘동물 타자’ 개념을 연상시킨다. 우리 사회에서 인간과 공생하는 타자로서 묵묵히 자리잡은 동물은 인간과 다른 언어 체계, 소통수단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나마 외게인과 동치해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희진이 루이의 행동을 자신의 사고의 틀에 맞춰 해석하듯이 우리도 종종 동물의 행위를 일방적으로 해석하곤 한다.

 

자크 데리다는 실제로 샤워를 하고 나온 후 발가벗은 채 반려묘 앞에 섰을 때 ‘수치심’을 느끼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이처럼 데리다는 동물의 시선에 포착된 인간의 곤란함, 부끄러음을 상상하도록 제안한다. 사실 자연 속에서 ‘벌거벗음’에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인간뿐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동물타자의 건조한 시선이 낳은 수치심을 통해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 동물 타자 개념은 다양하게 적용될 여지가 있겠지만, 필자가 주목한 바는 시선의 주체가 동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이 전환과 함께 나를 인간으로 정체화해준 고양이는 ‘고유한 시선을 가진 하나의 실존’이 될 수 있다. 타자의 시선은 ‘모든 걸 발가벗기는 수치스러운 응시’가 아닌 오히려 ‘발가벗기기에 순수한 주체만 남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소설 「스펙트럼」을 한 발짝 떨어져 객관적으로 관조하면 희진과 루이가 서로의 실존을 단단하게 하는 ‘타자의 시선’을 제공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타자의 시선인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주체적 시선이기도 하다. 무리인인 루이는 지구인 희진에 대한 어떠한 사전 인식이 없고, 반대로 희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각자의 시선으로 서로를 관찰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기록해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단단히 구축해나간다.


 

 

마치며: 충분한 타자 되기


 

「스펙트럼」은 그 어떤 매개로도 소통이 불가능한 극단적 외부세계, 온갖 타자성을 다 지닌 극단적 타자인 외계인, 그럼에도 그와 소통하고자 하는 지구인의 학자적 열망과 연이은 실패의 과정, 그리고 끝에 미온하게 남은 애정까지를 보여주는 일련의 텍스트이다. 지금까지 이 작품의 SF적 장르가 지닌 타자성, 소쉬르의 기호학에 비춰본 서사 분석을 통한 타자적 관계를 분석해보았다.

 

교차하는 타자성으로 인해 수없는 사회적 갈등이 빚어지는 요즘, 김초엽을 비롯한 SF 작가들은 아주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그 속에서 기꺼이 타자다운 타자가 되어가는 우리의 모습을 꿈꾸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SF는, 특히 SF 소설은 그런 문제 의식을 신선한 서사에 녹여 발화할 수 있어야 한다. 소설 「스펙트럼」은 온전한 소통이란 불가능에 가깝지만, 이를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자의 비효율은 사랑스러움을 여실히 느끼게 한다. 타자성이 난무한 한국 사회를, 언젠가는 ‘다양성이 난무하는 사회’로 기꺼이 바꿔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스펙트럼」은 새로운 타자의 등장은 곧 나의 존재 방식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걸 일깨운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이 소설을 통해 타자란 이해보다는 감각의 영역에 속한 존재라는 걸 느꼈다. 적어도 내 스물 남짓한 삶이 내린 결론은 그러하다. 그러나 아직 자신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단단히 발 붙인 현실에서 서로의 부피감을 지속적으로 확인하면서도 결국에는 가닿지 못함 인정하고, 나와 타인 사이의 애정 교환이 완전히 평등할 수 없음을 수용하면서도 끝없이 마음을 긁어 사랑하는 일은 막막하게도 느껴진다. 다만 타자적 시선이 나를 괴롭게 할 때마다 「스펙트럼」 속 루이와 희진의 관계를 자주 떠올리게 될 듯 싶다. 나는 그저 ‘나’라는 주체이자 충분한 타자로 머물면 되는 것이라 곱씹으며.

 

 

[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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