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언어를 배우는 일이 여행이라면 - 언어가 삶이 될 때

글 입력 2022.04.20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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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아니라 과제였던 영어


 

외국인과 긴밀하게 소통할 일도 없었고 외국에서 살아본 적도 없는 내게 영어는 교과 과목의 하나였다. 그래서 종종 영어도 하나의 언어라는 것을 잊고 지낸다. 집을 떠나본 적 없는 사람이 집의 의미를 깊게 고찰할 일이 많지 않듯, 모국어와 멀리 떨어져볼 일이 거의 없었던 나는 언어에 대해 고찰할 일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한국이 아닌 곳에 살고 있다면, 외국어를 가르치는 게 직업이라면, 또는 가족 구성원 중 한국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언어에 대해 갖는 감각은 지금과 아주 다를 것이다.


『언어가 삶이 될 때』의 저자는 그런 면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에 있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부모의 이혼 이후 베트남에서 온 새엄마와 함께 살았고, 미국 대학에서 영어를 공부했으며, 현재는 일본에 거주하며 영어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자가 여러 언어와 관계 맺는 이야기, 언어를 넘나들며 만났던 새로운 세계 이야기, 그리고 언어가 삶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지금까지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언어가 아니라 넘어야 할 산이나 과제로 생각해왔다면, 여기서는 삶 속에 깊이 들어와 나와 내 삶을 만들어가는 '언어로서의 외국어'를 바라볼 수 있다.

 

 

 

'원어민'이라는 허상의 목표를 넘어


 

이런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언어가 삶을 만들어간다 할지라도 결국에 언어를 공부하는 것은 취업을 더 잘하기 위해서, 외국어를 사용하는 직장에서 업무능력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닌가. 게다가 시중의 많은 영어 교재나 강의가 '원어민처럼 말하기'를 목표로 내세운다. 뚜렷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가장 효율적으로 전력 질주하는 방식의 학습이 익숙한 우리에게 언어가 삶이 된다는 말은 추상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외국에서 외국어르 가르치며 누구보다 원어민처럼 말할 것만 같은 저자는 '원어민처럼 말하기'라는 목표에 회의적이다.


 

제2언어 학습은 흰색에서 검정색으로, 비원어민에서 원어민으로 가는 중간 과정이 아니다. 제2언어를 배우는 이유는 그 문화에서 나고 자란 원어민과 똑같이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의 시선으로 그 언어와 문화를 직접 바라보기 위함이다. 나다운 고유함이 가장 소중하다.

 

-p.80

 


언어는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어제는 교정되어야 했던 단어가 시간이 흐르면 사전에 등재되기도 하는 것처럼. 그렇기에 '원어민처럼 말하기'에서 원어민이란 누구의 어떤 말씨를 지칭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특히나 영어처럼 전 세계 다양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그런 경향이 더 강하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원어민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어민을 비롯해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소통하려는 의지와 노력이다. 아무리 유창한들 그러한 말씨에 담기는 것이 일방적인 자기 얘기 뿐이라면, 그래서 아무와도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할 수 없다면 언어를 배우는 이유도 없다.


원어민처럼 유창해져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영어에 관한 오랜 열등감을 넘어서면 훨씬 더 많은 길이 열린다. 책에는 언어 학습의 단계로 언어에 '대해' 배우기/언어'로' 무언가를 해보기/'언어'와' 함께 내 경험을 만들어가기 를 언급한다. 세 단계 모두 언어를 배울 때 중요하지만, 이중에서도 특히 세 번째 언어'와' 함께 내 경험을 만들어가는 일은 그 중요성에 비해 실제 학습 과정에서는 간과되는 부분이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나이보다 그 언어와 어떤 경험을 쌓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하니 포기할 필요 없다고, 저자는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언어로 세계의 경계를 밀어보기


 

흔히 언어는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라고 말한다. 하지만 언어는 단지 도구'만'은 아니다. 어떤 도구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 또한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내용으로 발표를 한다 해도 영어로 발표할 때와 한국어로 발표할 때의 자세와 손동작, 목소리 톤이 다르다는 걸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영어로 말할 때와 한국어로 말할 때의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몇몇 교포 출신의 연예인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일은 또 다른 자아를 만드는 일과 같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건 익숙한 모국어 세계를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떨어지는 일이다. 외국어를 배우며 우리는 그에 맞는 자아를 새롭게 만들어간다. 태어나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 단단한 껍질처럼 굳어진 모국어 자아를 벗어나면 움츠러드는 게 당연하다. 저자는 자신이 미국과 일본에서 해당 국가의 언어를 잘 알지 못해서 경험했던 당혹스러운 일들을 들려준다.

 

그러나 다른 언어를 배워야만, 내게 피부 같은 언어를 벗어나 경계에 서야만 알게 되는 것들도 있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말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내 세계의 한계가 내 언어의 한계라는 말도 성립할지 모른다. 새로운 언어를 익히는 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언어로 세계의 경계를 쭉쭉 밀어보지 않으면, 언어의 경계도 딱 거기서 머무르는 것 같다.


-pp.230-231

 

 

우리가 여행을 하는 까닭 중 하나는 더 넓은 세상을 만나고, 그 세상 속에서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기 위함이다. 그런 면에서 한 언어를 공부한다는 것은 여행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흔히 여행을 떠나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 외국어를 배우곤 하지만, 실은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 자체가 여행인 셈이다.

 

다른 언어를 배우다 보면 익숙한 모국어의 세계에서 만들어져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모국어 자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와 만난다. 그곳에서 무엇을 새롭게 쌓아 올릴지는 각자의 자유다. 새롭게 배운 언어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나만이 맺을 수 있는 관계를 생각하다 보면 그 어떤 광고 문구를 볼 때보다도 외국어를 공부하고 싶어진다.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길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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