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백(告白)은 우리의 힘 [문화 전반]

HBO TV 시리즈 <걸스 (GIRLS)>와 함께 알아보는 진실의 모티프
글 입력 2022.04.11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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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사랑하는 모티프는 '고백(告白)'이다. 여기서 고백이란, 연인 간의 속삭임을 말하기보단, 사전적 정의 그대로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감춰 둔 것을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함'을 뜻한다.

 

특히 그 솔직함이 너무 지나쳐서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주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추구하는 형태를 띨 때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조금 변태 같다는 걸 잘 알지만, 원래 예술이 가진 목적 중 하나가 마음의 해소 아니겠는가.


어쨌거나, 그렇기 때문에, 지질한 행동이나 속에 담아둘 법한 말을 그대로 구현하고자 노력한 작가와 작품을 '최애'로 꼽곤 한다. 사실, 이런 취향은 종종 남들 앞에서 떳떳이 밝힐 수 없는 것들이 포함된다. 굳이 나열하면 우디 앨런, 홍상수, 척 팔라닉, 미셸 우엘벡과 그들의 작품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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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HBO에서 방영했던 TV 시리즈 <걸스 (GIRLS)>를 말하고 싶다. 해당 작품은 뉴욕에서 살아가는 네 명의 여성을 통해 여섯 시즌 동안 우정, 사랑, 꿈- 불안한 청춘을 보여준다.

 

위 포스터 속 정면을 응시하는 주인공 '해나'는 본 작품의 기획자 및 극본가인 레나 던햄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나를 아는 것은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데, 해나는 고백- 지나치고 불쾌한 솔직함을 제대로 보여주는 캐릭터다. 해나는 표면적이고 단순한 체험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나라한 상황을 묘사하면서 자신이 경험한 감정이나 생각을 거의 토해내는 수준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해나의 발설은 정말이지 통쾌하고, 동시에 심각하게 역겹다. 사실 그런 대사와 장면은 모두가 살면서 조금씩이라도 겪어본, 잘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싶은, 그렇기에 아무도 내색하지 않았고 드러내기 꺼렸던 것들에 대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나의 그런 말들은 때로 다른 인물에게 상처를 준다. 종국엔 관계를 파괴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진실한 고백과 그것을 참을 수 없는 해나의 성격은 그의 곁에 여러 사람들이 머무는 까닭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이 작품이 매력적인 이유 역시 사회적 가치, 도의적 판단에 따라 늘 피해왔던 주제를 곧바로 직면하고자 하는 태도다. 이렇듯 누군가에겐 ‘지나치고 불쾌한 솔직함’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발칙하고 통쾌한 진실’임을 되새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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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이 TV 시리즈의 한 캐릭터를 언급하고 싶다. 작품 속 네 명의 인물 중 해나와 가장 다른 성격을 지닌 '마르니'다.

 

마르니는 현 남자친구 '데시'와 싸우고, 같이 살던 집에서 나온다. (첫째 사진 참조) 그러다가 길거리에서 자신의 전 남자친구 '찰리'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둘째 사진 참조) 마르니는 찰리와 파티에 들러 신나는 밤을 보낸다. 함께 깔깔 웃으며 걷다가 호수와 한 척의 보트를 발견한다. 찰리가 배를 가리키며 마르니에게 타라고 말하자, 파티에서 자유롭게 놀던 마르니는 어디로 갔는지 ‘우리 배가 아니잖아’라며 딱딱하게 답한다. 찰리의 계속된 요구로 이내 보트에 오르면서도 마르니는 여전히 이 보트의 주인이 누군지 찰리에게 묻지만, 알 리 없다.


아름다운 호수 분위기에 빠져 입을 맞추던 그때, 배는 휘청이며 호수 밑으로 그들을 밀어 넣는다. 마르니는 물에 빠진 순간, 눈을 크게 뜨고 무언가를 응시한다. 마르니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끝까지 밝혀지지 않지만, 알다시피 보트(Boat)는 예술 작품에서 기회, 운명, 때 등의 메타포로 쓰인다. 사실 이 시점의 마르니는 어린 시절부터 계속해서 간직해온 꿈- 가수가 되기로 결심하나, 어떤 성과도 내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트의 주인을 묻던 마르니가 찰리와 키스하자 어이없게 전복되는 보트란,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답을 구하는 마르니'에게 신이 주신 '기회'가 아닐까. 온전히 본연의 힘으로 서야 함을 깨닫게 해주는 기회. 잔잔한 호수에 배가 뒤집힐만한 파도는 칠 리 없으니 말이다.


다음 장면에선 갑자기 노상강도가 등장해 귀중품과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한다. 달라고 하지도 않았던 귀걸이까지 겨우 내주고서야 떠나는 강도를 통해 마르니는 모든 것, 어쩌면 거짓으로 일군 것을 모두 버린다. 이어 마르니는 찰리의 방을 둘러보다 발견한 찰리의 주사기에 마약이냐며 화를 내지만, 운영하던 스타트업이 망하자마자 아버지의 죽음까지 연달아 닥쳐 당뇨를 앓게 됐다는 찰리의 말을 듣고 번질 뿐이다. 빈털터리 신세에 건강까지 악화된 찰리를 보며 마르니는 전 남자친구에게서도 자신이 바라는 것은 찾을 수 없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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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니는 그저 지난밤의, 어쩌면 지나온 모든 날을 뒤로하고 신발도 없이 옷 한 벌 차림으로 길을 나선다. 마르니가 데시와 함께 살던 플랫에 도착하자 데시는 계단에 앉아 마르니를 기다리고 있다. 마르니는 데시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짐 몇 가지를 챙겨 나가겠다며 데시를 지나쳐 계단을 오른다. 이때 마르니는 위로, 데시는 아래로 향한 모습은 마르니의 상황- 모든 걸 차치하고서 자신의 삶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기로 한 마르니에게 어울리는 상승의 이미지다.


마르니가 짐을 챙겨 나가겠다며 올라간 뒤 정말로 어떤 것을 또 얼마나 챙겨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이어진 화면에서 마르니는 찰리의 집을 나서며 허망한 표정으로 길을 나섰던 모습 그대로 맨발에 붉은 드레스와 후드집업뿐이다.

 

하지만 마르니가 서 있는 곳은 자신을 속박하는 데시와의 공간도, 거짓된 광란의 밤도, 지나간 연인 찰리의 집도 아니다. 마르니는 아침 해가 밝게 떠오르고 많은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하는 배경을 지나온다. 그렇게 해나의 집에 도착해 해나가 잠들어 있는 침대로 파고든다. 마르니는 해나의 따스한 환영을 받다가, 이번에도 무언가를 응시한다.

 

마르니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번엔 그 답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


이 기점부터 마르니는 자신의 꿈을 좇고자 하는 욕망을 제대로 마주하며 내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듯 보인다. 다시 말해, 스스로 솔직하게 대하고 투명하게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자기 자신을 '고백'하고서야, 겨우 모든 것이 시작된다.

 

이건 그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다. 전술했듯, 고백은 때로 무례하게 전달되기도 하고, 나를 좀먹거나, 관계를 파괴하는 등 나쁘게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르니가 꽁꽁 숨겨둔 몸과 마음의 상처를 이끌고 간 곳은 해나의 품이었다. 진실된 고백은 때로 구역질과 카타르시스를 넘어 따뜻한 위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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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告白)'의 가톨릭적 정의는 '고해 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고자 고해 신부에게 지은 죄를 솔직히 말하는 일'이라고 한다.

 

우린 이따금 진실한 태도로 누군가를 해치고, 동시에 죄책감과 해방감을 느끼기도 하며, 누군가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한편, 공감을 유도한다. 그래도,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자. 실수하면 사과하고, 사랑하면 표현하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그때에, 우리의 고백은 분명 우리를 안아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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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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