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까만 커피와 하얀 설탕, 흑과 백. 이들은 섞일 수 있을까 [공연]

글 입력 2022.03.21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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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흑백다방’은 한때는 경찰이었지만 지금은 잘 나가는 심리상담사가 된 다방주인과 그에게 상담을 받기 위해 온 한 손님의 이야기다. 다방의 주인은 그곳에서 심리상담을 한다. 1년 내내 다방 문을 여는 주인이지만 딱 하루 쉬는 날이 있다면 바로 아내의 기일이다. 비가 심하게 내리던 기일 날 불안정해 보이는 손님 하나가 찾아오고 주인은 신뢰를 쌓아야만 상담을 시작할 수 있다며 서로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럼에도 손님은 여전히 불안해 보인다. 그리고 과거 경찰이었던 다방 주인이 손님의 신뢰를 얻기 위해 감추어두었던 치부이자 지난날의 후회를 털어놓는 순간, 그는 그제야 오늘 찾아온 손님이 과거 자신이 심문했던 대학생 중 한 명이었음을 기억해 내고 절망에 빠진다.

 

 

 

서로에게 오롯이 집중해야만 완성되는 2인극


 

<흑백다방>은 여러 측면에서 다른 연극무대들과는 차별되는 연극이다. 두 명의 배우들로만 진행된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상연 내내 암전 한번 없었다는 것과 무대와 객석의 거리가 매우 가깝고 음향효과 하나 없이 진행되어도 몰입을 전혀 깨지 않는 점은 분명 다른 무대들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2인극은 극을 1인극이나 다인극으로 분류하는 연극계에서 흔한 구성은 아니다. 등장인물 둘에게 초점을 맞추어 극의 전개가 펼쳐질 수는 있지만 그러기 위해선 다른 인물들의 등장이 필요한 연극들이 다수인 것이다. 의사소통의 최소 단위로 극을 집중적으로 이끌어가는 2인극은 그 둘에게만 집중해야 하기에 자칫하면 지루한 연극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흑백다방>은 오히려 2인극이어서 돋보였던 무대였다. 두 명의 배우만이 등장하는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선이나 서사는 오롯이 서로를 향할 수밖에 없다. 연극의 흐름 또한 전적으로 두 사람의 행동에 따라 움직이므로 둘에게 무대의 모든 요소가 집약되고 이에 관객은 무대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된다. <흑백다방>의 무대는 두 주인공인 다방주인과 손님의 등장만으로 꽉 채워진 느낌이었다.

 

극 초반에 흑백다방 주인역할을 맡은 다방주인의 등장에 이어 손님역할인 손님이 등장하기까지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객석의 입장은 극이 시작되기 10분 전에서야 이루어졌는데 무대에서는 이미 배우가 나와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무대의 가운데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고, 입장하자마자 배우를 마주한 관객들은 그를 호기심 어린 눈길로 쳐다본다. 10분이 흐르고 그는 아무 말 없이 일어서서 구두를 닦고 LP판을 정리하고 무대 한편에 놓인 그림을 그리다가 또다시 테이블에 앉는다. 그는 결코 서두르거나 조급해하지 않는다.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그에게 집중하고 압도된다. 그때 비에 쫄딱 맞은 손님 역이 호들갑을 떨며 무대에 등장한다. 처음으로 무대에 소리가 등장하는 순간이다. 곧이어 둘의 대화가 이어지자 관객들의 고개가 두 배우 사이를 왔다, 갔다 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렇게 온전히 그 두 명에게 몰입하게끔 만든 것은 <흑백다방>이 노린 2인극의 특징을 잘 구현해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인물에 집중된 극인 만큼 그것에 관해 이야기 안 할 수가 없는데, <흑백다방>의 다방주인과 손님라는 두 캐릭터 자체가 설득력 있게 그려졌던 점도 눈여겨볼 점이다. 인물들의 대사는 극적이지 않았고 상황은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차곡차곡 쌓아졌으며 성격은 극의 전개에서 비롯된 성격들이라 이질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흑백다방이라는 공간



소규모 2인극인 <흑백다방>의 무대는 LP판과 오랜 팝가수들의 이미지와 과거 7080세대를 떠올리게 하는 옛날 풍의 다방으로 꾸며져 있었다. 조명의 변화도 거의 없었다. 자그만 방 하나에 불을 켠 것처럼 같은 밝기를 유지하다가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주인공들을 향해 핀 조명을 떨어뜨렸을 뿐이었다.

 

대신에 무대는 여러 가지 소도구들로 채워졌다. 구두닦이 세트와 LP판들, 유화 그림, 테이블과 탁자, 그리고 그 위에 커피 잔들, 누렇게 변색된 신문지, 옛날 성냥 등 소품의 디테일들은 극의 분위기를 살렸다. 조명은 다양한 변화를 주어 많은 역할을 했다기보다는 <흑백다방>의 이름에 걸맞게 무대 가운데는 백, 가장자리로 갈수록 어두워지는 조명 하나만을 떨어뜨려 분위기를 잘 조성했다.

 

<흑백다방>은 ‘다방’이라는 공간에서 극이 전개되긴 하지만 극의 사건들이 다방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로 발생하진 않는다. 이미 극의 중요 사건은 과거인 연극 무대 밖에서 일어났고 그 이후의 사건들을 다방이라는 무대 안으로 끌고 왔기 때문이다. 흑백다방이라는 공간은 더 이상 사건을 발생시키지는 않지만 매우 상징성 있는 공간이다. 더 이상 예전처럼 고문이나 무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상담이 이루어지는 상담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두 주인공의 애환이 얽히고 분노와 증오, 믿음과 복수, 위안과 용서가 말로써 풀어지는 공간이자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무대는 다방이라는 공간으로서가 아니더라도 ‘흑백’으로서의 공간 또한 의미를 갖는다. 까만 커피와 하얀 설탕, 흑과 백같이 섞일 수 없는 다방주인과 손님은 흑백논리에 감추어진 진실을 못 본 채 몇십 년간 살아오다 화합의 순간-설사 그것이 아주 찰나의 순간일지라도-을 처음 흑백다방에서 마주하게 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순간은 관객들도 마주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공간 자체가 연출가가 의도한 무대의 핵심은 아닐까.

 

 

[박민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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