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좋은 문화'에 대한 고찰

글 입력 2022.03.02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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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화’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처음 들었을 때 퍽 당황스러웠다. '좋은 문화'에 걸맞는 조건이 퍼뜩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흔히 문화생활로 일컬어지는 가요, 드라마, 영화, 전시 등의 대중문화를 떠올려 보았지만 이내 ‘잠깐만, 대중문화 외에도 경제, 정치, 종교, 음식, 지역에 속하는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의 문화가 있잖아? 문화는 말 그대로 우리의 일상생활 자체를 뜻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문화’라는 용어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말마따나 ‘문화는 그것이 속한 담론의 맥락에 따라 매우 다양한 의미를 띠고 있는 개념’이니까. 따라서 ‘좋은 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 역시도 한두 마디 조건으로는 정립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의 조건과 정의를 만족하기 위해 스스로 많은 질문을 던져야 했고, 다양한 각도에서 문화를 바라봐야 했다. 그리하여 다음의 3가지 조건을 만족하면 그나마 ‘좋은 문화’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까, 짐작했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 문화라는 용어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므로 해당 본문에서 나열하는 조건들 역시 ‘좋은 문화’의 조건을 모두 포괄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점을 알린다. ‘좋은 문화’에 대한 개념은 각자의 가치관과 생활환경, 개인적 경험 등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질 테니 말이다. 이러한 상대한 차이에 유념하며 보편적인 기준에서의 ‘좋은 문화’란 과연 무엇일까, 거듭 고민했다.

 

 

 

1. 세대의 공감을 아우를 수 있는 문화



첫 번째 조건은, 특정 문화가 세대의 공감을 아우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문화라는 것이 우리의 일상을 좌우하는 지표나 다름없는데, 사회 구성원의 전반적인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문화라야 좋은 문화의 전제 조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중문화를 예로 들자면, 책과 영화가 대표적이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즐길 수 있는 장르가 각기 체계적으로 마련되어 있는 덕에 대체로 낮은 연령대부터 고령층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즐길 수 있다. 또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으로 특정 계층만 소비할 수 있는 문화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대중문화’의 영역에 가깝다. 어릴 적부터 으레 접하는 디즈니와 픽사 영화뿐만 아니라 전문 서적의 내용을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쉽게 풀어놓은 만화책 또는 그림책을 떠올려 보면, 내게 책과 영화는 세대의 공감을 아우를 수 있는 좋은 문화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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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2009)

 

 

그런데 세대의 공감을 도출한다고만 해서 ‘좋은 문화’라 할 수 있느냐면 그건 또 아니다. 연령대 제한을 떠올려 보자. 전체이용가가 아닌 영화는 12세 이용가, 15세 이용가, 심지어는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까지 그 제한의 범주가 다양하다. 또 전시회나 콘서트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만 7세 또는 9세 이상 관람가로 연령대 제한을 정해두는 경우가 많다.

 

문득 중학교 1학년 시절에 처음으로 콘서트 스탠딩(콘서트에서 서서 있는 구역)에서 공연을 관람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굽 높은 신발을 신었음에도 아직 키가 크지 않아서 (지금보다 7cm나 작았다) 2시간 동안 좋아하는 가수의 실물은커녕 앞사람의 새까만 머리만을 올려다보고 온 그날. 그 뒤로 몇 년마다 스탠딩에서 공연을 관람할 때면, 콘서트 전후나 도중에 실신한 이들이 한두 명씩은 꼭 나왔던 것 같다. 이처럼 나의 옛 경험에 비추어보건대, 특정 문화에는 특정 연령대 이상만이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특정 집단이나 연령층만이 온전하게 즐길 수 있는 전시회나 콘서트는 좋은 문화가 아닌가?


천만의 말씀이다. 내게는 최고의 문화생활이나 다름없는 콘서트와 작가의 창작물을 눈앞에서 마주할 때면 늘 무언의 영감을 얻는 전시회가 분명 좋은 문화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좋은 문화’의 요건에는 또 어떤 것이 필요할까?

 

 

 

2. 문화참여자들 간 연대의 힘이 느껴지는 문화



그렇게 떠오른 다음 조건이 참여자들 간 ‘연대의 힘’이 느껴지는 문화다. 사실 독서와 영화 감상은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에 가깝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행위 자체만으로는 문화참여자들 간 소통의 부재로 창작자와 참여자, 참여자와 참여자 간 느슨한 결속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문화참여자를 현장으로 끌어들이는 뮤지컬과 콘서트, 전시회, 연극 같은 경우는 어떠한가? 참여자들은 작품을 직접 마주하는 과정에서 낯선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모종의 연대 의식을 느끼곤 한다.

 

예컨대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방문할 때면, 공연장에 모인 이들과 한마음 한뜻으로 동화되는 느낌이 드는 것과 비슷하다. 특정 가수를 좋아하는 열정 하나로 함께 노래를 따라부르고, 함성을 내지르며 있는 힘껏 가수를 응원하면서 말이다. 가수의 팬 사이의 소통을 넘어 팬들과도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공연 자체를 온전히 즐기는 것이다. 외부적인 현장감을 중시하는 문화예술의 경우, 책과 영화를 보면서는 느끼지 못할 생동의 경험을 문화참여자에게 고스란히 건네준다.


여기서 어떤 문화가 더 낫느냐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피장파장인 셈이다. 내면의 소리와 정적인 행위에 집중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독서와 영화 감상이 좋은 문화로 취급될 수 있고, 현장에서 직접 소통하며 생동하기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전시회나 콘서트가 좋은 문화로 여겨질 수 있다. 어느 경우든, 내게 있어 문화생활을 더욱 즐겁게 만들어주는 것은, 결국 해당 문화의 참여자들과 다양한 의견을 공유하며 연대의 길로 나아가는 행위 자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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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천국>(1988)



앞서 영화 감상이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에 속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극장에서의 경험은 또 다른 이야기가 된다. 내가 극장을 자주 찾는 이유 중 하나는 큰 스크린과 선명한 화질, 고음질의 음향으로 작품을 온전히 즐기려는 목적도 있지만, 이에 못지않게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영화를 보는 관객들과의 실시간 소통이다. 물론 입으로 발화되는 직접 소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해당 영화를 ‘함께 보고 있다’라는 간접 소통에 불과할 뿐이지만, 이는 빈번히 나를 극장으로 이끄는 강력한 동기가 되기도 한다.

 

상업영화는 함께 작품을 즐길 수 있는 관객이 많아 좋고, 예술영화는 적은 상영 회차에도 불구하고 극장을 찾는 관객들과 나름의 동질감을 나눌 수 있어 즐겁다. 특히나 개봉 날부터 예매율이 1% 안팎을 넘나드는 예술영화를 관람할 때면 이러한 ‘연대의 힘’은 알게 모르게 더욱 단단해져 있다. 혹자가 ‘극장 대관’이라는 말을 들어봤을지 모르겠다. 넓디넓은 상영관에서 다른 관람객 없이 오로지 홀로 영화를 관람할 때를 일컫는 말인데, 관객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나로서는 그다지 맞닥뜨리고 싶은 상황은 아니다. (솔직히 조금 무섭기도 하니까) 지금까지 한 번도 ‘극장 대관’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은 나름의 행운이라고 칭할 수 있겠다.


여하간 상영관이 고갈 난 예술영화를 보러 오는 관객들과 해당 작품을 함께 관람하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다. 영화가 끝난 이후 극장 문을 나서는 관객들에게 ‘이 영화 어떠셨나요? 저는 너무 좋았는데.’ ‘영화 재밌게 보셨나요? 저는 살짝 난해하더라고요.’와 같은 속마음을 쏟아내고 싶은 걸 겨우겨우 허공으로 삼키는 게 다소 고역이긴 하지만. 이로써 세대의 공감을 아우를 수 있고, ‘연대의 힘’이 느껴지는 영화 관람은 내게 썩 좋은 문화로 느껴진다. 극장 관람뿐만 아니라 현장감이 느껴지는 독서 모임, 콘서트, 전시회 등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문화공간에 참여하는 행위 못지않게 문화 자체에 내포된 내용물을 살펴보는 것 역시 중요하다. 다수가 즐기는 문화 속에서도 약자를 배척하는 혐오 표현이 은밀하게 내재되어 있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어떤 것들은 대중의 눈과 귀를 홀릴 만한 매우 그럴듯한 논리를 가지고 매우 교묘한 형태로 약자를 차별하는 행위에 가담하기 때문에 우리는 특정 문화에 접근할 때, 해당 문화가 특정 계층이나 사회적 약자를 배척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켜보는 감시자 역할도 행해야 한다.

 

 

 

3. 약자가 소외되지 않는 문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될지도 모르겠다. 앞서 책과 영화는 비교적 어린 시절부터 즐길 수 있는 문화라는 점에서 ‘좋은 문화’의 범주에 속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좋은 문화’에 속해있다고 해서 모든 책이 유익한 것은 아니며 모든 영화가 세대의 공감을 자아낼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작품 하나하나를 주도면밀히 따져보면 실상 약자를 도외시하는 예술품이 수두룩한 것이 현실이다.

 

또 책과 영화는 특정 기간이나 해당 날짜에만 체험할 수 있는 전시회, 콘서트, 뮤지컬, 연극의 경우와 달리 누구든 밤낮없이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축적’되는 문화에 가깝다. 따라서 문화예술을 영위하는 이들의 규모나 수요가 더욱이 클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몇백 년이나 그 명맥이 이어져 온 서적처럼 ‘축적되는 문화’에서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점은, 무엇보다 오랜 시간 약자로 살아온 이들 계층이 소외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축적되는 시간만큼이나 점점 더 많은 후세대 사람들이 지난 시대의 작품을 돌아볼 것이기 때문이다.

 

책과 영화는 어떤 형태로든 약자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으며 이는 약자 스스로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매우 교묘한 술책으로 행해질 수 있다. 사실 차별 표현이냐 아니냐에 관해서는 그 경계가 매우 모호한 부분이 있어 나조차도 해당 대목이 혐오 표현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지나칠 때가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은 작품에서 사회적 약자, 예컨대 여성, 어린이, 장애를 지닌 사람, 성 소수자, 동물 등이 겪는 개별 폭력을 사회적 담론으로 끌어오려는 목적이 느껴지기보다 그저 전개상 재미를 위해 해당 표현을 ‘소비’하는 행위에 그칠 때다. 사회에 고질적으로 남아 있는 차별적 언행이나 행위를 맹목적으로 사용할 때 해당 작품에 자동으로 반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한마디로 문화양식에 대한 일말의 고찰 없이 약자를 향한 사회·언어·물리적 폭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문화는 내게 그리 ‘좋은 문화’로 다가오지 않는다.

 

 

 

‘다양한 사회 구성원을 최대한 포용할 수 있는 문화’



‘좋은 문화’에 대한 세 가지 조건으로 세대의 공감을 아우를 수 있고, 문화참여자들 간 연대의 힘이 느껴지며 이와 동시에 약자가 소외되지 않는 문화를 언급했다. 종합하여 보건대 이 모든 조건을 합치면 아마 ‘다양한 사회 구성원을 최대한으로 포용할 수 있는 문화’ 정도가 되지 않을까. 지금까지 나열한 조건들에 만족하는 좋은 문화의 구체적인 예시를 떠올려 보자.


우선 영화의 경우, 어느 연령층이든 즐길 수 있는 대중영화 중에서도 세대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재미 요소가 넘쳐나고, 약자에 대한 대상화를 찾아보기 힘든 영화라야 한다. 혹자는 어떤 영화가 떠오르는가? 이런 완전무결한 영화가 어딨느냐는 생각이 스치기도 할 테지만, ‘살면서 꼭 봐야 할 명작 영화 100선’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여기에도 나열한 3가지 조건들에 한참 못 미치는 영화들이 수두룩하지만. 언급한 모든 조건을 얼추 만족하는 영화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내게는 <반지의 제왕> <아바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정도가 떠오른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보건대 유치원 때도, 초등학생 때도, 중학생 때도, 고등학생 때도, 심지어는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의미 있게 볼 수 있는 이 작품들이야말로 진정 ‘좋은 영화’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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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그렇다면 책의 경우는? 전반적인 사회 구성원이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읽어 내려갈 수 있는 도서 중 독자 개개인에게 의미 있는 지점을 건넬 수 있고, 약자를 대상화하지 않으며 사회적 문제를 환기하는 책 정도가 내게는 좋은 책으로 느껴질 터다. 당장에 떠오르는 책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한강의 『소년이 온다』 정도다. 3가지 요건이 다소 가혹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해당 조건을 대체로 만족하는 작품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대중문화를 포함한 전반적인 문화 양태가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물론 이러한 특정 조건에만 사로잡혀 획일화된 문화가 양산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앞으로도 다양성 작품을 꾸준히 만나보았으면 하는 문화참여자로서 나열한 조건을 포괄하는 작품들이 주류 문화로서 작동하고, 대중의 문화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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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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