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돈에 대한 꿈을 꾸다 - 신신방 [공연]

그리고 그 꿈은 무참히 무너진다. '만추리아 드림'에 대하여.
글 입력 2022.02.20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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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어둑하고 적막하다. 양옆엔 철제 기둥이 늘어서있고 뒤편으론 길쭉한 나무 박스를 이어 길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중앙엔 책상 몇 개와 가지가 앙상한 나무가 있다. 곧 신신방의 사무실이 될 공간이다.


조명이 켜지지만 여전히 무대는 어둡다. 푸른빛이 도는 걸 보아 저녁, 혹은 이른 새벽인 듯하다. 보따리를 인 중장년의 여성 ‘영란’이 기차역에 도착한다. 그곳에 모여 웅성거리는 사람들은 모두 노동자로서 팔려가는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들이다. 훈련소에서 직업 훈련을 받았다는 그들은 모두 자기가 어디로 가게 될지 잘 모른다.


한 젊은 남성이 어딜 가도 고생만 하다 죽을 거라며 기차역을 이탈한다. 총성과 함께 그는 (아마도) 즉사한다. 그 소리를 들은 나머지는 허튼 생각 말고 왜국의 명령을 따르기로 한다.


영란은 만주에 도착한다. 그녀가 일하게 될 곳은 세계대전에 참전 중인 일본군을 위해 군복을 만들어 파는 군납 공장 ‘신신방’이다. 신신방의 사장은 모두 조선인이다. 계약 건수를 늘리기 위해 일본인에 아첨하는 그들의 행동은 매국노와 다름없어 보인다.


전쟁의 끝없는 연장을 기원하는 군복이 수천만 개 생산됐다. 창고가 가득 찼다. 그러나 일본은 점점 패전하고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인다. 더 이상 일본군복이 필요하지 않아졌다. 재고를 처리할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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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창작산실 / ⓒ 유경오


 

연극 <신신방>은 2021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연극 부문에서 발표된 작품이다. <왕서개 이야기>, <붉은 낙엽>으로 호평 받았던 김도영 작가와 <국물 있사옵니다>, <발가락 육상천재>로 위트있는 연출을 보여줬던 서충식 연출가, 그리고 극단 실한이 함께 했다.


광복이 가까워지던 1945년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당시 만주에서 큰돈을 벌겠다며 떠난 조선인들의 ‘만추리아 드림’을 소재로 한다. 일본 군복을 납품하는 공장 ‘신신방’의 젊은 청년 사업가들과 이 공장에서 일하는 조선인 노동자 영란이 주인공이다. 일본이 패전함에 따라 공장은 파산 위기에 처하고, 낯선 땅 만주에서 이 고비를 넘기고자 하지만 결국 절망과 상실에 처하며 끝을 맺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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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창작산실 / ⓒ 유경오

 

 

 

관찰자 영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만주의 자본가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책임진 영란이 극의 주인공인 건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녀는 일개 노동자(공작의 식모)고 말수도 적다. 오히려 본격적인 사건을 끌고 가는 건 신신방의 공장주들이다. 영란은 극 진행에서 한발 물러선 채 이들의 사업이 번창하고 또 망해가는 과정을 지켜본다.


참을성 있게 제자리를 지키는 영란과 달리 이 네 명의 공장주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씩 화를 내고, 그러다 웃고, 그러다 절망하기를 반복한다. 모든 건 돈 때문이다. 그들은 휘황찬란한 만추리아 드림을 꿈꾸며 위대한 자본가가 되고 싶어 하지만 조선인이란 낙인 탓에 쉽지가 않다.


영란이 보이지 않는 극의 중심, 관찰자가 된 이유는 그가 유일하게 돈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극 중 모두가 돈 때문에 무릎을 꿇고, 아첨하고, 배신할 동안 영란은 딱히 어떠한 액션도 취하지 않는다. 그저 고요히, 제자리에 머물며 할 일을 할 뿐이다.


돈에 미친 자들과 딱히 신경을 쓰지 않는 자. 그렇기에 영란은 관찰자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무덤덤한 영란과 비교될수록 다른 이들의 물질 숭배가 더 일그러져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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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창작산실 / ⓒ 유경오

 

 

 

그때나 지금이나, 영끌!



 

“만추리아 드림이 이민과 개척을 통하여 부를 향한 소망이었다면, 헬조선, 3포 세대에겐 코인, 주식, 부동산, 즉 영끌의 시대입니다.”

 


극단 실한의 정현준 대표는 아르코예술극장과의 인터뷰에서 ‘영끌’이란 단어를 언급했다. 있는 것 없는 것 전부 긁어모아 어떻게든 자산을 불리려 하는 욕심, 그 욕망이 과거나 현재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일본이 패전함에 따라 군복 판매량이 급감하고, 원 재료값과 인건비를 충당하기 위해 졌던 수천만 원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 신신방 청년 사업가들은 말 그대로 영끌한다. 이자를 대출로 막고, 대출을 다시 담보로 막고, 담보가 넘어가기 전에 투자로 손을 벌린다. 그럼에도 돈이 새는 구멍은 막아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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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창작산실 / ⓒ 유경오

 

 

어떻게든 돈을 박박 긁어모으려 할 때, 그렇지 않으면 당장 파산하고 거리로 나앉을 위기에 처했을 때, 연극은 이 내몰린 상황에서 발생되는 인간의 파괴에 대해 다룬다. 고통에 대한 역치가 개개인마다 다른 탓에 누구는 쉽게 포기하고 망가진다.


대표적인 예가 미나미의 애인이자 바지사장 고겡이다. 풍류를 즐기는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였던 그는 파산 위기에 처하자마자 가장 먼저 무너진다. 불안과 무기력에 잠식돼 결국 아편에까지 중독된다.


상대적으로 고통을 잘 버티고 있는 듯해 보였던 가네다와 유지, 미나미에게도 약한 구석이 보인다. 감정의 고조에 따라 가네다와 유지 형제는 서로에 폭력을 휘두르기까지 한다. 결국 승자는 유지였다. 그는 모든 빚을 동업자에게 떠맡긴 채 몰래 만주를 떠난다.


하지만 과연 유지가 정말 승자라고 볼 수 있을까? 경제적 위기에서 홀로 살아남긴 했지만 그 역시도 이후의 행복을 보장할 순 없다.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일본인, 혹은 돈이 많은 친일파에게 굴욕적으로 충성해야 하며, 조선으로 돌아가고 나서도 먹고 살기 위해 다시금 영끌 해야 할 것이다.


이 또한 나약함이다. 우정과 신뢰이란 가치 있는 것까지 지탱할 여력은 없었던 나약함. 뒤꽁무니 빼는 비열함은 사실 악이 아니라 일종의 나약함인 것이다. 이 모든 사건을 일으킨 돈이야 말로, 인간을 가장 큰 두려움에 처하게 하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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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엔 분명 돈에 매달리며 사는 나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 극단 실한의 정현준 대표 인터뷰 中

 

 

돈이 만들어내는 괴상한 풍경은 시대를 막론한다.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만들고, 인간성이라 불렀던 그것을 상실케 한다. 연극 <신신방>은 돈에 대한 집착과 욕망이 불러일으키는 파괴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저 인간 군상의 특징일 뿐이다.


이 보편적 성격은 일제강점기, 전쟁이란 특수 상황에서 더욱 극한으로 몰린다. 아무런 인프라도 없었던 허허벌판의 땅 만주를 배경으로 한 것도 그 이유에서다. 만추리아 드림이 얼마나 무참하게 무너졌는지, 절망이 희망과 비교될수록 얼마나 더 참담해지는 지를 보여준다.


결국 돈 대신 남은 건 신뢰를 상실하고 외로움에 발버둥치는 사람들뿐이다. 기약할 미래가 없는 그들의 막막함은 딱히 현대의 우리와 다를 게 없다.


“그 속엔 분명 돈에 매달리며 사는 나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극단 실한의 정현준 대표가 말한다. 조금도 해결되지 않는 인간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여기 <신신방>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박태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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