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원한 사랑 - 샤갈 특별전 : Chagall and the Bible

사랑을 그렸기에 아팠던 화가
글 입력 2021.12.30 12:5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포스터.jpg

 

 

"모든 생명이 필연적으로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사랑과 희망의 색으로 그것을 물들여야 합니다." - Marc Chagall

 

 

 

영원한 사랑


 

샤갈이 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영원한 사랑이다. 영원한 사랑은 어떤 사랑이길래 샤갈은 늘 사랑을 노래했을까? 사랑의 색을 그렸지만, 그의 삶은 마냥 따스한 색만 가득하지 않았던 그의 이야기를 적어보고자 한다.


작품을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그가 반복적으로 사용한 소재 몇 개를 알아보고자 한다. 몇 개의 작품을 보다 보면 유독 메노라(촛대), 바이올린, 꽃다발이 그려져 있다. 촛대는 샤갈 본인의 정체성인 유대인을 표현한다.

 

바이올린은 1887년 당시 러시아 유대인 가정에서 러시아인이자 동유럽계 유대인 하시드파로 태어나 모든 사물의 신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물, 동물, 인간들에게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신이 이 세상에 사랑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러시아 유대인으로서 출생, 결혼, 장례, 중요한 의식에는 늘 바이올린 연주자가 증인처럼 공간에 항상 존재했다. 그래서 바이올린은 화가인 자신처럼 예술을 통해 세상을 정화하는 존재를 표현하기 위해 바이올린을 그리곤 했다.

 

 

20211229230549_uwzdwngg.jpg


 

그리고 꽃다발은 사랑과 행복을 나타낸다. 이외에도 삼각형 지붕을 그린 집도 눈에 띄는데 이것은 그가 태어난 고향 비테스크 전경을 표현한 것이다. 염소 또한 유대인들이 자주 기르던 가축으로 샤갈은  1922년 러시아를 떠나고 단 한 번도 고향의 땅을 밟은 적이 없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자신이 사랑했던 마을 풍경이 모두 사라졌다는 걸 알았기에 달라진 고향 모습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던 샤갈은 고향에 가지 않았다. 물리적으로 돌아가진 않았지만 그림을 그리면서 고향의 풍경을 떠올리며 고향과 부모님을 그리워했다.

 

타지에서 고향의 풍경을 반복해서 그려냈기 때문에 그의 그림에는 과거와 현재 모습이 뒤섞여 있기도 하다.

 

 

 

푸른 물고기


 

20211229230334_ewrtgkre.jpg


 

샤갈의 아버지는 생선가게에서 일했다. 아버지는 슬픔이었다. 아버지는 평생토록 무거운 짐을 나르며 추운 날 청어를 만져야 했다. 그런데도 샤갈은 아버지의 눈동자만은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늘 부드럽게 빛났던 아버지의 눈동자는 샤갈의 작품 속 푸른 생선을 통해 투영되었다.


어머니 이야기를 덧붙이면 어머니 또한 집안일과 작은 식품점을 운영하면서 아홉 남매를 길렀다. 여유롭지 않은 형편에 예술가가 되겠다고 고향을 떠났던 샤갈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나의 예술은 부모님 삶에 그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삶은 나의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하며 장남이지만 가족들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던 자신이 부끄럽고 괴로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갈래의 얼굴


 

20211229230609_rcqhiqeu.jpg


 

샤갈 인생에서 또 다른 중요 인물은 벨라이다. 미국에서 망명하며 지냈을 때 가장 사랑했던 벨라를 떠나보내고 9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그림을 단 한 점도 그리지 못할 정도로 샤갈은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벨라를 잃었기에 모든 것을 잃었다. 벨라는 나의 재능이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그린 작품 <두 갈래의 얼굴>은 전쟁과 학살, 병마 속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감과 그런데도 화가로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 열망을 두 갈래의 얼굴로 표현했다. 또는 벨라와 자신을 투영한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8년 후 바바와 재혼하면서 어느 정도 정서적 안정이 찾아왔을 때, <바바의 초상>을 그렸다. 이는 그에게 다시 한번 사랑을 믿고 그 사랑을 통한 자기희생을 결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리를 향한 시선



02. 투르넬 강변 〈파리를 향한 시선〉.jpg

 

 

<투르넬 강변>을 보면 세 가지 색채가 눈에 띈다. 초록색은 생명력과 역동성 의미 담아 그렸으며 샤갈에게 파리는 제2의 고향이었다.

 

당시 파리에서 유행한 앙리 마티스, 피카소의 작품을 보면서 파리의 생동감, 역동성을 표현하기 위해 초록색을 사용했으며 사걀이 바라본 파리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샤갈의 동료들은 그를 시인이라 부를 정도로 문학적 감성이 풍부했다.


시는 단어가 가진 사전적 의미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그 내면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그림을 시라고 부르는 걸 좋아했던 샤갈은 이야기를 시각적인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샤갈의 성서


 

ㅇㄹㄴㄸㅅㄷㅅ.jpg

 


샤갈이 25년의 세월을 들여 그린 105점의 연작을 볼 수 있다. 그는 그림을 시처럼 그렸고 영감은 바이블 즉, 성서에서 받았다고 할 정도로 자연이나 일상이 아닌 성서로 시작되었다. 1930년 볼라르가 샤갈에게 구약성서 삽화를 그려달라고 의뢰하면서 본격적인 성서 삽화 작업을 시작했다.


이전까지 시도하지 못했던 눈에 보이는 형체가 아닌 이념을 담은 성서를 꿈꾸며 작업했다. 그렇지만 샤갈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고 인간 창조를 제일 먼저 그림으로써 인간에 대한 관심은 계속 이어나갔다.


작업도 허투루 진행되지 않았다. 성서 장면 하나씩 조형적 아름다움을 살리기 위해 105점 모두 종이 위에 과슈(gouache, 물감)로 작업하며 그림 그렸다. 또한, 에칭 작업을 통해 흑백과 색을 입혔을 때 느낌이 어떻게 다른지 확인하며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던 중 출판 의뢰했던 볼라르가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성서 삽화 작업이 중지될 위기에 처했지만, 샤갈은 멈추지 않고 샤갈의 딸 이달이 아버지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노력하여 1956년 출판된다.

 

 


푸른 다윗 왕


 

07. 푸른 다윗 왕.jpg

 


샤갈은 다윗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 샤갈은 음악을 좋아했고 시인이었다. 그런 샤갈에게 다윗은 음악과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다윗을 투영해서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 또한 당시 샤갈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그림이다. 파란색으로 가득 메운 이 작품은 눈에 눈물이 가득 차 있을 때 바라본 풍경을 표현하고 있다. 샤갈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 세상을 바라봐야 했던 이유는 바로 미국 망명해 살아가야 했던 자신의 처지에 있었다.

 

 

 

강기슭에서의 부활


 

06. 강기슭에서의 부활.jpg

 


앞선 파란색과 대비되는 붉은 색으로 가득 찬 그림은 샤갈이 1941년 미국 망명 당시 그렸던 작품이다. 1930년대 중반 1940년대 초반에 샤갈의 그림은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1933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는 샤갈을 퇴폐 미술 화가로 명명했다. 그의 작품을 파괴하고 훼손했다. 그리고 2차 대전이 발발하여 유대인 대량 학살이 비일비재하고, 가장 지키고 싶었던 벨라를 세상에서 떠나보내게 되는 시기였다.


샤갈은 이 시기를 ‘내 눈앞에서 모든 것이 사라져만 간다. 부서져만 간다’고 말하며 샤갈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런 경험으로 인해 샤갈의 그림에서 밝음이 어두운 청색으로 대치되고 날카로운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표현되며 색 명도를 단일 색으로 칠하며 우울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그림을 그렸다.

 

 

 

또 다른 빛을 향하여



08. 또 다른 빛을 향하여.jpg

 

 

화가는 정착해서 살아야 한다. 이동하면 할수록 그의 작품은 훼손되고 분실될 위험이 크다. 그래서 초기 샤갈 작품은 몇 개 남아있지 않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창작활동이 자유롭지 않았다. 그래서 화가가 되고자 했지만, 자신의 나라에서부터 자신의 그림을 부정당하는 삶을 살았다.

 

미국 망명 당시 그림은 아픔이 가득하다. 프랑스에 정착하기 위한 과정에서 내가 머무는 이곳이 결국은 언젠가 떠나야 하는 곳이라는 걸 알기에 쉽게 정을 주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본인이 지키고 싶었던 사람도 지키기 힘들었던 삶 속에서 화가로서 살아가는 숙명에 대한 고민이 마지막 작품, <또 다른 빛을 향하여>에 많이 담겨 있다.

 

 

 

인간이자 화가로 살았던 샤갈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인간 내면의 슬픔과 2차 세계 대전 시작 시기에 벌어진 유대인 대량학살, 그리고 자신이 가장 사랑한 벨라가 사망하면서 샤갈은 인간 존재 의미를 상실했다. 그리고 화가인 자신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지 고민하며 괴로워했다. 인간이 마냥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러나 그런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자기희생적 사랑을 받아들이기까지 샤갈은 무수히 많은 감정을 이겨내었다.


사랑을 노래한 화가 샤갈은 강렬한 감정보단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사랑으로 보았다. 사랑의 완성은 자기희생이다. 진정으로 사랑에 빠진 사람은 나 스스로 바꾸기 때문에 지키고 싶었던 신념이 학살 전쟁으로 인해 무너졌지만, 세상은 계속되고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샤갈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을 선택했다. 가장 바뀌기 어려웠던 나를 바꿈으로써 세상을 이해했다.

 


ㅇㄹㄸ.jpg

 

 

샤갈이 죽기 수개월 전부터 유화 물감 거의 사용 안 하고 스케치만 그렸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가면서 얼마나 절망적이고 끔찍한 상황이 일어나도 다시 이젤 앞에 앉는 그림을 그리는 것,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을 떠나도 다시 한번 붓을 잡는 것이 화가의 숙명임을 선언하고 약속하듯, 샤갈은 97년의 삶의 마지막 작품을 그린다.

 

거의 한 세기를 산 화가는 마지막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화상을 그렸다. 유대인, 이주민, 모더니스트로서 샤갈은 자신만의 그림을 그렸다. 입체파 야수파가 도래했던 시절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이 그리고 싶었던 그림을 그리며 생을 마감했으며, 죽기 전까지도 다양한 시도를 했다. 벽화, 천장화, 모자이크 등 자신이 보는 최선의 세계를 보여주길 희망했다.

 

샤갈의 그림만 보면 어느 시대에 그려진 건지 유추하기 어렵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기에 핍박과 외로움을 겪었지만, 사랑의 힘으로 세상을 바라봤고, 자신의 외로움과 고통도 그려냈다.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고자 했던 시인이자 화가인 샤갈이 바라보는 시선을 그가 그려낸 그림들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나시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