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조언의 가장 아름다운 형태 - 복서와 소년

글 입력 2021.12.11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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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것은 저런 말들을 사실은 놀랍도록 무심해지고 나약해진 요즘의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역시 조언이란 건 남의 상황을 빌어 자신에게 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며"

 

- '보통의 존재'(이석원 著), p.114

 

 

도움이 절실해보이는 누군가에게 종종 우리는 조언을 건넨다. 그 사람의 문제해결에 꼭 필요할 것이라는 출처 분명의 확신과 함께 전달한 말이 그러나 예상치 못한 순간 부메랑처럼 돌아오곤 한다. 누군가를 향해 조언을 건네고 싶다는 생각은 어쩌면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이 자신의 그것과 유사했다는 점에 기인한 일종의 동병상련식 공감 혹은 연민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타자에게 건넨 조언은 사실상 내 이야기일 수 있다는, 생각보다 꽤나 흔하게 마주할 수 있는 삶의 또 다른 일면. 오늘도 이 사실을 미처 인지 못한 누군가는 거울과 마주한 듯 자신의 처지가 투영된 도움을 빙자한 자기 고백을 실천한다.

 

7년 만에 다시 돌아온 <복서와 소년>이 바로 그런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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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외곽에 위치한 요양원에 한 노인이 들어온다. 척봐도 거동이 불편한 늙은이는 남은 기력을 쏟아부으며 장례식장 맞은편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자신이 타고온 휠체어를 조심스레 멈추던 남자는 방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아무렇지 않게 걸어다니며 창문을 연다. 남들의 눈을 피해 의도적으로 거동이 불편한 척 하는 이 남자의 이름은 '붉은 사자', 왕년의 복싱 챔피언이다.

 

'루츠 휘브너'의 원작(Das Herz eines Boxers)을 번안한 <복서와 소년>은 고독하고 쓸쓸한 70대 전직 복서와 반항심 가득한 10대 고등학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2인극이다. 오늘날 전세계를 강타한 <오징어 게임>의 음악을 맡은 정재일 음악감독과 김민기 연출의 만남으로 과거 화제를 모은 2012년 초연 이후 2013년, 2014년을 거쳐 7년 만에 더욱 탄탄해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랜기간 대학로의 터줏대감으로 자리매김해온 학전 표 연극은 상처 입고 소외된 외톨이들이 진심이 담긴 소통을 통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를 통해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을 하는 행위의 의미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인생에 대해 진중한 메시지를 던진다.

 

<복서와 소년>은 달라도 너무 다른 70대 노인과 10대 소년의 이야기를 유쾌하게 그려낸다. 억울한 누명으로 학교폭력 가해자가 된 고등학생 '셔틀'은 요양원에서 사회봉사 활동을 하게 된다. 요양원 가장 안쪽 구석에 위치한 창고용 독방에 페인트칠 봉사를 하게 된 소년은 파킨슨 환자 행세를 하는 붉은 사자와 마주친다. 서로의 존재가 불편하고 불쾌한 두 사람은 작은 일에도 사사건건 대립하며 날을 세운다. 어느 날, 붉은 사자가 복싱 챔피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셔틀은, 진짜 학교 폭력 가해자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붉은 사자에게 복싱을 알려달라 부탁한다. 이에 붉은 사자는 복싱을 가르쳐주는 대신 소년에게 그 또한 한 가지 부탁을 요청한다.

 

붉은 사자는 어린 시절 복싱에 대한 일념 하에 무작정 상경해서 밑바탁부터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입지 전적의 인물이다. 전신을 휘두른 빨간색 망토와 함께 붉은 사자란 이명을 얻은 그는 비록 세월이 지났다 할지라도 황학동 노인네들에게 기억될 만큼 왕년의 스타로서 영향력을 보유 중이다. 하지만, 아내와 딸 아이에게 버림 받은 이후 의욕을 잃은 채 삶을 허비하다 자발적으로 요양원에 들어선다. 자칫 잘못하다가 고독사 당할 수 있겠다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 하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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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서와 소년>, 2021년

 

 

반면 셔틀은 자신의 의지가 조금도 개입되지 않은 요양원 봉사활동 생활로 나름 삶에 환멸을 느끼는 철부지 소년이다. 허세 가득한 언사와 달리 학교에서 시종 일진 청소년들에게 괴롭힘 받는 것이 일상인 그는 무엇하나 즐겁지 않은 현생으로부터 잠시나마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힙합 음악을 즐겨 듣는다. 그 과정에서, 닭가슴살 마냥 퍽퍽한 자신의 삶을 리듬에 맞춰 랩으로 소개하는 도입부에서의 랩 장면은 캐릭터의 혈기왕성함과 무대 위의 참신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대목이다.

 

<복서와 소년>은 상처 입고 소외된 외톨이들이 진심이 담긴 소통을 통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서사는 단순히 경험 많은 자와 성장기 소년 간의 일방향적 소통이 아닌,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보듬아주고 보완해주는 방식을 지향한다. 초반은 혈기만 왕성한 소년에게 조그마한 꿈을 심어주는 계기를 붉은 사자가 마련한다. 어쩌다 우연히 셔틀의 처지를 전해 들은 붉은 사자는 자신을 괴롭힌 아이들에게 저항할 수 있는 힘과 더불어, 자신이 짝사랑하는 편의점 알바생 누나에게 진심을 고백할 수 있는 용기의 필요성을 소년에게 실감시켜 준다. 이제까지인생을 스스로 주도해본적 없던 셔틀은 자신을 진정으로 대해주는 할아버지를 통해 점차 성장의 발판을 구축한다.

 

하지만, 붉은 사자 또한 셔틀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인생을 주도하지 못하고 회피했다는 점에서 그 또한 소년을 통해 세상과 맞설 용기를 다잡는다. 자신이 과거에 다녔던 체육관장의 아들이 보낸 편지를 읽은 붉은 사자는 요양원을 벗어나 목포로 도망칠 계획을 세운다. 그 과정에서 붉은 사자는 복싱을 가르쳐주는 대신 셔틀에게 자신의 도주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건넨다. 하지만, 결전의 날 예상치도 못한 사고로 요양원을 벗어나는 것은 물론, 그간 파킨슨병 환자 행세를 한 것이 들통난 그는 요양원 측으로부터 퇴실 조치를 전달 받는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소년은 왠지 모르게 어색한 붉은 사자를 향해 묻는다, "밖에 나가기 무서운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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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서와 소년>, 2021년

 

 

세상을 향해 다시금 발을 내딛는 것이 두려웠던 붉은 사자는 벗어나고자 했던 독방에서 나홀로 늙어갔다. 그가 머무르는 방이 창고로 활용되었던 폐기용도의 공간이라는 점과, 바로 마주하고 있는 장례식장이라는 위치적 특성은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붉은사사자의 처지를 은유한다. 어느덧 붉은 사자를 누구보다도 의지하고 진정으로 아끼기 시작한 셔틀은 붉은 사자에게 다시금 도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지만, 탐탁치 않은 기색을 통해 그의 숨은 속내를 눈치챈다. 복싱을 가르치면서 자신에게 건넨 조언을 똑똑히 기억한 소년은 정작 도움이 필요한 자신의 선생님에게 일갈함으로써 받았던 조언을 되돌려 준다. "승패가 중요하지 않다, 당당히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누가 그랬죠?"

 

<복서와 소년>은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을 하는 행위의 의미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인생에 대해 진중한 메시지를 던진다. 2인에 불과한 연극의 구성은 얼핏 허전해 보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채로운 무대장치들이 이를 충분히 메꿔준다. 특히, 짝사랑 하는 누나에게 차마 보낼 용기가 없어 부치지 못한 편지라는 명목하에 고스란히 보관만 하는 소년의 문자 메시지를 중간중간 스크린 화면으로 띄어주거나, 작품의 생생함을 배가시키는 음향효과가 아주 좋은 예다. 더불어, 작품을 온전히 책임진 배우들의 열연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셔틀을 연기한 '임규한' 배우의 경우, 고장난 나침반처럼 끊임없이 배회를 거듭하는 소년의 혼란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드러낸 붉은 사자를 향한 진심을 격정적으로 묘사해내며 관객이 클라이막스에 몰두할 수 있는 몰입감을 제대로 고취시키는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복서와 소년>은 단순히 인물을 향한 연민에 그치는 것이 아닌 보다 더 잘 되길 바라는 진심어린 응원을 견지한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타인의 도움 없이 살기에는 우리 존재는 나약한 부분들이 있음을 쉽게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끊임없는 소통의 노력과 더불어 타인의 상처와 결핍을 편견없이 받아들이고 공감하는 순간 우리 모두 서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존재로 변모한다. 그 순간 우리를 옥죄어 온 과거와 내면의 나약함을 뒤로 한 채 새로운 세상을 향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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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서와 소년>, 2021년

 

 

그런 의미에서, 작품의 클라이막스는 사뭇 감동적이다. 실패에 따른 무기력함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붉은 사자의 마지막 결단, 그리고 이에 응답하는 소년의 흡사 <테넷>을 연상시키는 한 편의 역행쇼는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단순히 값싼 연민에 입각하지 않았음을 신선하게 보는 이들에게 제대로 각인시킨다. 그 과정에서, 가장 올바른 형태의 조언이 성립되는 순간을 작품은 아름답게 구현한다. 이는 곧, 서로가 서로의 정답이자 해결책이자 버팀목이라는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쉽게 성취하기 어려운 썅방의 가치를 가리킨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준다는 당연한 메시지를 다시한번 강렬하게 알려주었다는 점.

 

그것 하나만으로, <복서와 소년>이 7년 만에 귀환했어도 여전히 의미가 있음을 충분히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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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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