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은밀하고도 매력적인 북클럽의 세계로 [영화]

점령된 섬에서 이들이 살아남은 방법, 영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글 입력 2021.11.15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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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빼빼로데이를 핑계로 친구로부터 유치하지만, 귀여운 편지를 받았다. 작은 포스트잇에 빼곡히 적힌 글씨에서 어떤 말을 적을까 고민하는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작지만 소중한 마음이 느껴져 그날은 따뜻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나는 편지를 언제 썼더라. 기억조차 흐릿하다. 아끼는 사람의 생일, 왠지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날, 혹은 이처럼 사소한 핑계를 대며 그동안의 고마움을 편지에 담아 전달할 수 있다. 그 의미는 어떤 날, 누구에게 받느냐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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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편지가 소통의 보조적인 요소라면, 과거에는 중요한 소식을 알리고 가까운 사람의 안부를 묻는 주요 연락망이었다. 편지로 서로가 연결되고 그 안에 담긴 내용에 사람들은 울고 웃었다. 영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속 편지도 그러하다. 런던에서 활동하는 작가 줄리엣은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된다. 발신인은 건지섬의 양돈농부 도시. 둘은 우연인 듯 운명처럼 서로를 알아가게 된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돼지구이 만찬을 숨기기 위해 결성된 문학회 모임이다. 1920년, 영국의 건지섬은 독일군의 점령하에 있었다. 가축들을 모조리 빼앗겼고 주민들은 감자를 재배하기 시작했지만, 곧 바닥을 드러냈다. 전선은 모두 끊겼고 사람들은 철저히 고립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모두가 굶주렸었지만, 진정 무엇에 굶주렸는지 아는 건 엘리자베스였죠. 바로 사람들과의 소통. 유대감이었답니다.”

 

 

어느 날처럼, 감자 수프로 굶주린 배를 채우던 도시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푸줏간 칼을 가져오세요.” 아멜리아는 나치들 몰래 돼지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녀의 딸인 엘리자베스가 보낸 편지로 이웃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았지만, 외부적 환경으로 인해 어떠한 교류도 할 수 없었다. 소통의 부재는 계속되었고 힘든 시간의 나날이었다. 고독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오롯이 홀로 견뎌야만 했다.

 

비밀스러운 만찬은 시작되었고 첫 모임인 게 무색할 만큼, 대화 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각자 가져온 음식을 나눠 먹으며 그간 묵혀왔던 소통의 갈증을 해소했다. 점령기의 불안함을 이 시간만큼은 떨칠 수 있었다. 춥디추운 겨울이었지만, 방안은 따듯한 온기로 가득했다. 엘리자베스가 보낸 ‘편지’로 이들은 다시 관계의 고리를 맺었다. 전선은 모두 끊겼지만, 서로가 연결되었고 흩어진 삶은 한데 모였다.


만찬의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이들은 나치들과 맞닥뜨린다. 엘리자베스는 모임을 핑계로 위기를 모면한다. 모임의 목적은 문학회. 이름은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하필이면 그때, 우체국장인 에번 램지가 만든 감자껍질파이가 떠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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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은 우아하게 메시지를 전달할 줄 알았죠.”

“사회를 지탱하는 건 상호 예절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근간이 되는 것이다. 허나, 그것이 깨지는 순간 지옥문이 열리고 무시가 왕이 된다.”

 

- 제인오스틴

 

 

“제가 가난하고 이름도 없는 작고 평범한 여자라고 해서 영혼도 감정도 없는 줄 아세요? 아뇨, 저도 당신처럼 영혼과 감정이 한가득 차 있어요!”

 

- <제인에어>, 샬롯 브론테

 

 

얼떨결에 만들어졌지만,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진짜 문학회가 된다. 매주 금요일에 모여 작가의 작품을 낭독하고 평가하는 시간을 가진다. 접근 금지인 고서 중에서 희귀본, 시집을 불문하고 온갖 책들을 챙긴다. 장작을 태우며 소소하게 독서에 대한 감상을 말하고 책을 돌려 읽는다. 영화에는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 제인 오스틴, 메리 셸리, 앤서니 트롤럽, 샬롯 브론테 등 익숙한 이름이 등장한다.

 

극 중, 브론테 자매를 두고 토론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모임에서는 앤 브론테의 (브론테 세 자매의 막내) 평전 책을 낭독 후, 제한된 시간 안에 작품과 작가에 대한 의견을 자유롭게 이야기한다. 발화자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거침없이 주장을 내세운다.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집중한다. 책은 그들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되었다. 작가의 가치관이 담긴 문구와 책의 구절은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참혹했던 현실을 버티게 했다. 모임에서 하는 거라곤 이게 전부지만, 그들의 연대는 만날수록 깊어졌다.

 


“(책을 통해) 촛불 하나만으로도 암흑기에 자유롭게 새로운 세상을 탐독할 수 있었죠.”

“우리네 삶이 서로 다를지라도 책이 우리를 하나로 엮어준다는 걸요.”

 

 

문학회 모임은 고립된 섬에서 하나밖에 없는 교류의 장, 도피처이자 안식처였다. 불안한 시대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무엇이 최선인지에 대한 질문에 나름의 답을 내리고 주체적인 삶을 이어가게 했다. 또한, 책은 이들에게 유일한 구원이었다. 암울한 점령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지배의 삶 속에서 하루를 살아가는 원동력이자, 비참한 삶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패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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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도 귀소본능이란 게 있어서 어울리는 독자를 찾아간다는데 사실이라면 즐거운 일이지요."

 

 

줄리엣은 런던의 인기있는 작가다. 어느 날, 그녀는 편지들 사이에서 낯선 이름을 발견한다. 발신인은 건지섬의 양돈농부인 도시로 내용은 찰스램의 셰익스피어 선집을 구할 수 있는 런던 서점을 알려달라는 것. 도시는 무작위로 챙긴 고서에서 찰스 램의 엘리아 수필 선집을 발견한다. 이는 줄리엣이 중고서점에 팔았던 것으로 그녀의 주소와 이름이 적혀있었다. 건지섬에는 점령 당시 서점이 폐쇄됐기 때문에 그녀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그와 주고받는 편지가 쌓일수록, 줄리엣은 문학회의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진다. 곧장 건지섬으로 떠났고 글로만 마주했던 북클럽에 참가한다. 필명 뒤에 숨어있던 자신을 드러내고 책을 순수하게 좋아하는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북클럽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작가로서의 길을 고민하면서 한층 성장하게 된다. 지루했던 그녀의 삶에 즐거움이 생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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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엣은 건지섬에 머물면서 이들의 이야기를 원고에 담고자 한다. 하지만, 얘기를 듣자 북클럽 멤버들은 이를 거부한다. 이유의 중심에는 북클럽과 만찬을 주도했던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에 주민들은 함구하기 바빴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줄리엣은 사건을 파헤치면서 점령기의 아픔을 발견한다.

 

엘리자베스는 군의관인 독일군과 사랑에 빠져 딸 킷을 낳게 된다. 행복할 것만 같던 이들의 관계는 금방 들통이 났고 엘리자베스는 나치들에게 잡혀간다. 그 후, 그녀의 소식은 묘연해졌다. 줄리엣이 수소문한 결과, 엘리자베스가 폭행을 당하던 한 소녀를 구하려다가 총살을 당한 사실을 알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두려움에 항상 당당하게 맞서 싸웠다. 고국을 빼앗긴 아픔을 독일군에게 울부짖을 줄 알았다. 본인도 어려운 처지였지만, 남들을 우선시하기 바빴다. 그녀는 끝까지 불합리한 상황에 처절하고 고독한 저항을 이어갔다. 종전되기까지 수많은 엘리자베스의 희생이 존재했다.


 

“아버지께서 1차대전 때 용맹히 싸우셔서 받으신 거야. 이걸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 용감해진단다. 두려울 때조차도 말이지. 느껴지니? 그러면 문질러보자. 따뜻해야 마법이 일어나거든.”

“세상에. 많이 닳았네요.”

“용기가 많이 필요했거든요.”

 

 

종전 후에도, 건지섬에는 전쟁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있다. 부모를 잃고 남겨진 아이들, 아름다운 해변에 설치된 이질적인 독일군의 초소와 지뢰 매설지 폭발위험 간판. 점령의 흔적은 주민들의 마음에도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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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미국 소설인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건지섬 사람들의 이야기를 편지글 형식으로 그렸다. 흥미로웠던 점은 작가인 메리 앤 섀도 문학 클럽의 회원이라는 것이다. 자전적인 경험에서 비롯해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이 소설은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를 차지하며 꾸준히 스테디셀러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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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여행을 다녀왔다. 우연히 들어간 서점에서 문득 떠오른 사람을 위해 책을 구매했다. 첫 페이지에 서투른 마음을 짧은 문장에 담아 선물했다. 이렇다 할 연결고리가 없던 사이에 작은 계기가 됐으면 싶었다. ‘내가 너의 첫 문장이었을 때’라는 제목이 마음을 콕콕 찔렀다. 서로 다른 삶이더라도 이 책이 우리를 하나로 엮어주길 바란다.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힘이 책에 깃들어 있다면, 그 힘을 한번 믿고 싶다. 훗날, 어떠한 이유로 멀어지는 관계가 됐다면 이 책이 우리를 다시 연결해주길 막연한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이 영화를 통해 ‘연결’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길 바란다. 먼저 관계의 진정성을 되짚어보자. 그리고 떠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자. 가벼운 안부를 묻든 사소한 핑계를 대며 짧은 편지를 건네든 어떤 것이 되더라도 좋다. 한 사람을 생각해서 고른 책 선물은 상대방이 당신을 진정한 '관계'로 재정의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고독한 사회를 따뜻하게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감정에 좀 더 솔직해지고 상대방에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해보자.


우리는 ‘초연결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점령기의 건지섬은 현대 사회와 별반 다를 게 없다. 타의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연결의 따뜻함보다 외로움이 더 크다. 고독사, 1인 가구의 증가는 역설적인 모순의 현실을 증명한다. 코로나로 인해 거리를 둬야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하는 요즘. 서로를 아끼고 위하는 마음은 일상 속 따뜻함을 전하고 내일을 살아가는 힘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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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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