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최규석 유니버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만화]

<공룡 둘리의 슬픈 오마주>, <송곳>, <지옥>을 맛보다
글 입력 2021.11.07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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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석. 이 세 글자는 2000년대 이후 한국 만화의 흐름을 파악하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그는 1998년 서울문화사 신인 만화공모전으로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줄곧 만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웹툰의 시대가 오고, 출판만화의 시대가 저문 지 오래됐음에도 여전히 출판만화가임을 자부한다는 최규석. 최근 그의 작품 <지옥>이 넷플릭스 시리즈로 제작되어 11월 19일 공개를 앞두고 있다. 이미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6부작 중 3편이 호평을 받아 기대를 모으고 있는 가운데, 그의 전작들을 돌아보며 최규석 유니버스의 깊은 맛을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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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중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둘리, 우리 사회의 슬픈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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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만화 영화, 둘리. 빙하 타고 내려와 엄마를 찾는 귀여운 아기 공룡 둘리는 이제 없다. 아기공룡 둘리의 20년 후의 모습을 그린 ‘공룡 둘리’가 실린 단편집 <공룡 둘리의 슬픈 오마주>는 최규석의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다. ‘공룡 둘리’에서 둘리는 공장 노동자로 생활하다 손가락을 잘려 초능력을 잃고 공사판을 전전하는 처지다. 한편, 원작 만화에서 둘리와 친구들을 키워왔던 고길동은 도우너에게 사기를 당한 충격에 죽고 만다. 이로 인해 아들 고철수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외계인을 해부하려는 연구자에게 도우너를 팔아넘기고 만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둘리는 도우너를 구하기 위해 고철수를 설득해 돈을 돌려받으려 하지만, 고철수는 사람을 패 감방에 갈 위기에 처해있는 희동이의 합의금으로 써야 한다며 제안을 거절한다. 결국, 모든 것을 체념한 둘리는 고길동의 묘지에 찾아가 소주 한 잔을 들이켜며 빙하기가 올 것 같다는 말을 남긴 채 진짜 공룡으로 변해버린다.

 

명랑 만화의 둘리를 이렇듯 암울하고 처연하게 바꿔 놓은 최규석의 솜씨에 원작자인 김수정 화백은 “‘공룡 둘리’만이 내가 인정한 유일한 둘리 2차 창작물”이라고 인정했다. ‘공룡 둘리’를 모두 보고 나면 씁쓸한 탄식이 저절로 배어 나온다. 아마 그 이유는 친구를 도우려 애쓰는 둘리가 그 냉혹한 현실에 속절없이 무너지기 때문일 테다. 어떻게든 친구를 도와주려는 명랑 만화 속 주인공의 태도가 어수룩한 처신으로 비치는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서일까. 오늘도 사회의 뒷골목 어딘가 쓰러져있을 또 다른 둘리를 염려하며 그 좌절이 오래가지 않길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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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 둘리’에서 알 수 있듯 우리 사회의 변두리에 놓인 이들의 생활상을 핍진하게 재현하는 그의 만화력은 데뷔 초부터 강렬했다. 단편집 <공룡 둘리의 슬픈 오마주>에는 ‘공룡 둘리’ 외에도 ‘사랑은 단백질’이라는 단편도 실려있는데, 여기서 그의 면모가 어김없이 드러난다. ‘사랑은 단백질’은 돈 없는 젊은 친구들이 저금통을 깨 치킨을 시켜 먹게 된다는 일상적인 배경의 이야기다. 젊은 친구들은 배달 온 치킨을 허겁지겁 먹으려 하지만 치킨집 사장 ‘닭’은 친구들을 말리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 부탁한다. ‘닭’은 그 치킨이 사실 자기 아들 ‘병아리(닭돌이)’라며 사고로 튀겨진 자기 아들을 배달하러 와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달라 한탄한다. 사실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 친구들은 먹은 닭돌이의 유골을 잘 빻아 하늘로 올려보내며 닭돌이의 명복을 기원해준다.

 

치킨집 사장의 고백을 듣고도 치킨을 맛있게 먹은 재호, 입에도 대지 못하는 경순 그리고 치킨은 먹었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껴 유골을 수습해준 몽찬까지. 작가는 사회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사건 하나로 압축해 표현한다. 특히 타인의 사연에 공감하지 못하는 재호의 행동을 보며 어느새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육식, 가난에 대한 착취를 비롯해 여러 가지 문제의식을 내포한 이 작품에서 작가는 공감 그리고 인간성이라는 지점에 방점을 찍는다. ‘사랑은 단백질’은 그의 또 다른 대표작 습지생태보고서의 원작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 작품은 가난한 젊은이들이 사는 방구석 세계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가 일품이다. ‘사랑은 단백질’은 <부산행>, <반도>로 유명한 연상호 감독이 단편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했으며, 후에 그는 연상호 감독의 여러 애니메이션 원화(<돼지의 왕>, <사이비>, <서울역>)를 담당하게 된다.

 

 

 

그대, 송곳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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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약자들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일.’ 최규석은 노조 투쟁을 이렇게 정의한다. 이처럼 최규석 작가가 실제 까르푸 노조 투쟁을 각색해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한 것이 바로 <송곳>이다. <송곳>은 정규직, 비정규직 갈등과 노조 투쟁의 지난한 과정을 때론 차갑고, 때론 아주 뜨겁게 펼쳐 보인다. 웹툰은 육사 장교 출신 마트 정규직 이수인이 노무사 구고신의 도움을 받으며 회사의 부당한 비정규직 해고에 저항해 노조 운동에 투신하게 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사실 기존에도 노동 투쟁을 다룬 작품이 몇몇 있었지만, 그럼에도 송곳이 비범한 것은 바로 ‘언더도그마’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약자는 당연히 선이고, 강자는 악일 것이라 인식하는 현상. 우린 곧잘 비정규직은 약자니 선할 것이며, 기업과 고용주는 강자이므로 절대적 악일 것이라 단정한다. 하지만 최규석은 보기 좋게 이 기대를 무너뜨린다. 함께 투쟁했던 비정규직 직원이 회사의 회유에 넘어가 노조를 배신하기도 하고, 힘겹게 싸워서 얻어낸 권리라는 결실을 고맙다는 인사조차 없이 누리기도 한다. 강자 역시 마찬가지다. 거대한 악처럼 끈질기게 괴롭혔던 강자가 알고 보니, 하잘것없던 보신(保身)주의자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처럼 흑백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노조 투쟁의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는 작가의 도전은 10대 위주의 네이버 웹툰이라는 척박한 플랫폼에서도 아름답게 꽃 피었다.

 

 

 

신은 결코 선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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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종종 신은 존재하는지 의문을 품는다. 만약 존재한다면 신은 어떠한 존재일까, 신의 거대한 뜻을 우리는 온전히 수용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최규석, 연상호 콤비가 다시 뭉친 <지옥>을 봐야 한다. <지옥>은 지금껏 연상호 감독이 천착해온 신과 종교가 중심 소재로 등장한다. 웹툰은 어느 날부터 천사의 형상이 찾아와, 지옥으로 갈 날짜를 고지하는 초자연적 현상이 발생하는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지옥의 고지를 당하게 된 사람은 불에 타 죽는 ‘시연’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시연을 ‘죄를 지은 자가 벌을 받는 것’이라는 신의 뜻으로 해석하는 새진리회가 등장하고, 사회 곳곳에 그 교세를 이용해 영향을 미친다. 특히 화살촉이라고 불리는 새진리회 광신도 집단은 신의 뜻을 빙자해 폭력 사태까지 벌이기도 한다. 사회가 점점 새진리회의 입김에 좌지우지되고 있을 무렵, 갓 태어난 아기가 고지를 받는 일이 생긴다. ‘죄를 지은 자가 벌을 받는 것’이라는 새진리회의 진리가 아기에 대한 고지로 무너지게 되자, 새진리회는 필사적으로 이 아기를 숨기려 한다. 하지만 아기의 부모는 진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마침내 찾아온 시연의 날에 부모는 스스로 희생하며 신의 고지를 거부해 아기를 살린다.

 

<지옥>은 속도감 있는 전개와 서사가 전개될수록 드러나는 반전으로 독자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특히 오랜 역사 속에서 되풀이된 신의 뜻을 대리한 종교 집단의 부조리한 면을 비판했을 뿐 아니라 신 자체에 대한 의문도 제기한 점이 인상적이다. 작중에서 신은 우리 행동의 선악 여부에 크게 관심이 없다. 마치 동전 던지기나 제비뽑기처럼 다음번 희생양을 고를 뿐이다. 신이 정말 선한 존재인 건지, 선하다 해도 그것이 인류의 이익과 같은 방향인지에 대해 우리는 알 수 없다. 연상호와 최규석은 무지로부터 오는 무력감과 불안을 오롯이 직시하며, 지금 눈앞에 있는 우리 관계에 집중하자고 말한다. 인간성에 대해 회의하면서도 결국은 인간 찬가를 노래할 수밖에 없는 우리네 숙명처럼, 작가도 부모의 희생에 의해 생존한 아기를 통해 인류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다. 11월 19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공개되는 <지옥> 역시 이 웹툰을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며, 유아인과 박정민 배우가 참여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거대한 자연재해와도 같은 현상에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될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2009년 예루살렘 상을 받으며 “높고 단단한 벽과 그 벽에 부딪혀 깨지는 달걀이 있다면, 저는 언제나 달걀 편에 설 것입니다.”라는 수상소감을 밝혔다. 하루키의 말처럼 최규석 작가는 언제나 높고 단단한 벽에 맞서는 달걀의 편이었다. 약자의 편에서 냉혹하고 거대한 시스템에 반항의 눈길을 던지는 작품을 계속해서 써내온 최규석의 다음 걸음은 어디로 향할까. 최규석과 우리의 달걀은 분명 몇 번이나 깨지고 벽엔 미세한 흔적만이 남겠지만, 우리가 만들어낸 그 작은 흠집을 보고 누군가는 다시 희망을 가지고 달걀을 던질 거다. 그러면 언젠간 그 거대한 벽에도 금이 가지 않을까?

 

 

[정주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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