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불완전한 삶의 기쁨 - 연극 '태양'

글 입력 2021.10.26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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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대지를 덮은 광활한 하늘을 빛으로 가득 채워 이 땅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생명을 준다. 빛이 없이는 생명도 없다. 푸르게 생장하는 식물도, 대지를 바삐 달려다니는 동물도, 더 나은 문명을 이룩해가려는 인간도. 그 무엇도 더이상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태양 아래에서 살아간다는 이 당연한 기쁨이란. 행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당연한 행복이다.

 

그러나 여기 더이상 태양과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이 있다. 때는 21년 초. 바이러스로 전세계 인구가 급감하는 도중 바이러스 항체가 생긴 이들이 우월한 신체 능력을 얻게 된다. 막강한 신체를 기반으로 신인류로 부상하게 되는데 이들에게는 한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자외선에 매우 민감히져 마치 뱀파이어처럼 햇빛을 받으면 존재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이들은 밤의 인간인 '녹스'로 스스로를 칭하며 사회의 중요 구성원으로 부상한다.

 

반면 여전히 태양 아래서 살아갈 수 있는 이들도 존재한다. 바이러스 항체도, 신체 능력도 없어 녹스의 아래에서 숨죽이듯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이름은 평범한 인류이자 낮의 인간 '큐리오'다. 큐리오는 그다지 좋은 뜻이 아니다. 이들은 스스로 이름 붙일 권리마저 없다. 밤의 인간인 녹스가 낮의 인간을 얕잡아 부르는 이름인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황폐해진 한 마을에서부터다. 10여년 전 녹스 주재원이 살해당한 후, 외부와의 교류를 철저히 봉쇄당한 마을이 다시 문을 열게 됐다. 녹스와 교류가 재개되면서 마을 경계에 경비 근무를 서게 된 후지타, 큐리오를 치료하고 탐구하는 목적으로 방문한 요지, 담당 구역을 관할하는 고위급 공무원 세이지, 그리고 그의 아내이자 이 마을에 남은 딸을 데려오려 하는 레이코 등 여러 목적을 가진 녹스가 마을과 접점을 만들어내며 자신들의 욕망을 드러낸다.

 

반면 마을 주민들은 대체로 녹스에게 적대적이다. 자신들의 삶을 멋대로 통제할 뿐 아니라 바이러스를 옮겨올 수 있는 공포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녹스 주재원 살인 사건의 범인 가쓰야, 그런 가쓰야의 누나이자 천진난만한 데쓰히코의 엄마 준코, 준코를 짝사랑하는 자이자 유의 아빠 소이치, 자신을 떠난 어머니에게 알수없는 그리움을 느끼는 유까지. 이 험난한 삶 속에서 각자의 아픈 이야기를 가지고 녹스를 대면한다. 그러나 모두가 녹스에 적대적인 것만은 아니다. 준코의 아들 데쓰히코는 어서 녹스가 되어서 학교에 가고만 싶다. 더 자유로운 세상을 꿈꿀 뿐인 천진난만한 데쓰히코는 큐리오를 차별하지 않는 녹스였던 경비원 후지타에게 다가가 친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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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스와 큐리오 사이에 압도적인 신분의 격차가 존재하는 시대이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모두가 동일하다. 각자의 방식으로 이 기울어진 세계를 이해하고 또 맞서려고 하는 모습을 보며 관람객은 극에 깊이 몰입할 수밖에 없다.

 

극 말미에 이르러 의사인 요지는 이 완벽한 녹스로서의 생을 버리고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아래에서 죽음을 맞이하길 선택한다. 그런가하면 유는 녹스인 엄마를 좇아 큐리오로서의 삶을 버리고 녹스로서의 삶을 선택한다. 녹스인 경비원 후지타는 큐리오는 대단한 존재라고 설파하지만, 태생부터 큐리오였던 데쓰히코에게 그 말은 모든 것을 가진 녹스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사치스러운 말일 뿐이다.

 

사실 극중에서의 묘사만 놓고 보면 상대적으로 녹스보다 큐리오를 긍정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많다. 태양 아래 자유한 존재이자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인 자연스러운 존재.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극의 말미에 이르러 결국 이 연극이 말하는 것이 '공존'이라는 점이다. 후지타는 큐리오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저 데쓰히코의 곁에서 그의 삶을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데쓰히코는 녹스란 큐리오의 적이라는 고정관념을 접고 후지타를 지켜주며 그의 친구가 됐다.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지만 서로의 상황은 모두 다르고 각자를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두터이 쌓인 편견을 해소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것은 가능하다.

 

무엇보다 생동감 넘치는 연출이 가슴을 울린다. 무대 위의 아주 사소한 동작이나 음성 하나까지도 소름돋을 정도로 생생하게 살아있음이 느껴진다. 녹스와 큐리오의 정체성을 완전히 다른 극적 알고리즘으로 풀어낸 것이 극의 정점을 끌어올린다. 무대는 하나지만 두 장르물이 충돌하는 느낌. 녹스는 마치 로봇처럼 딱딱하고 각진 모션과 기계에 입력된 것처럼 자동반사적이고 정돈된 음성을 사용하지만 큐리오는 행동이나 대화나 모든 것이 그 어떤 제약도 없으며 자유롭고 충동적이다.

 

외관 연출도 완전히 다르다. 머리카락 한올한올까지 완벽히 고정한 헤어스타일에 화려하고 미래지향적인 감각의 옷을 걸친 녹스는 마치 완벽하게 디자인된 바비 인형을 연상시킨다. 반면 큐리오는 처절할 정도로 남루한 외관이다. 이처럼 작중 캐릭터의 본질을 충실하게 해석한 연출은 배우가 무대 위에 서 있기만 해도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적 미장센을 이루도록 설계하며 수많은 상징을 함유해 매 장면을 밀도 높게 꾸린다.

 



[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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