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폴더명 울새, 단편집

어딘가 크리피한데, 문장이 좋아서
글 입력 2021.10.20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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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읽고 싶었다. 한국인이 쓴 누군가의 이야기를. 외국 작가의 번역된 글도 아니고 인사이트를 찾는 글이 아니라 정말 순수한 '글'이 읽고 싶은 욕구가 요즘 들어 생겼다. 내 취향의 필력을 찾고 싶다고 해야 하나? 그동안도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읽었는데, 뇌가 습기에 잔뜩 절인 것처럼 무겁고 눅눅한 것이 마치 살이 찐 것처럼 답답했다. 갑자기 찐 살 때문에, 걷는 게 숨이 차는 그런 기분? 그래서 물기를 잔뜩 머금은 수건을 짜내듯 시원함이 필요했다. 순수한 '글'이라는 표현과 맞지 않지만, 뭔가 발칙하고 독특한 것이 당겼고, 그것은 글쓴이의 무의식이 잔뜩 담긴 일련의 글자 모둠을 종이책으로 접하고 싶다는 나의 욕구라 말할 수 있겠다.

 

순수한 감상을 적고 싶었다. 정의를 찾고 구조를 짜며 쓰는 글이 아니라 감상을 자연스럽게 써 내려가는 글을 오랜만에 적고 싶었다. 한 플랫폼에 기고하는 에디터로 실력을 가꾸기 위해 노력이 필요한 때지만 가끔은 순전히 나만을 위한 글을 쓰고 싶을 때도 있다. '기술'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풋내기의 그런 멋들어진 허세를 걷어내고 쓰고 싶은 대로 어떻게든 이어나가는 순수한 글이 그리웠다. 그렇게 '순수한 글'에 대한 소비 욕구와 순수한 감상의 기록 욕구가 맞물려 나는 이 무심히 신간 도서를 클릭하다 발견하게 된 <폴더명 울새>를 발견했다. 내가 찾는 완벽한 타깃이었다.

 

글을 읽으면서 내가 소원한 '순수한 글'에 대한 정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글에서 어떤 매력을 찾고 싶었는지 선명해졌다. 아, 나는 작가의 문장이 담긴 소설을 찾고 싶었구나. 작가의 의도와 개성이 묻은 감각적인 문장의 콜라보가 보고 싶었던 거다. 그리고 콜라보가 내 취향에 맞게 예뻤으면 한 것이다. 대책 없이 예쁜 것만 보고 쫓는 나의 탐미주의가 여기서 또 발동했다. 그것이 어떤 미학적 관점을 가졌는지 모르겠다만, 휘발되지 않고 내 안에 남은 날것의 문장을 <폴더명 울새>에서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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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더명 울새>는 문학 앤솔로지(anthology)로 장르 구분 없이 다양한 소설가들을 독자에게 소개하고자 작가 노트, 엽편 소설 - '눈을 떴을 때'라는 공통의 주제- , 단편 소설 대표작, 서로의 단편 소설 이어 쓰기 총 네 가지 형식의 글을 시리즈로 엮어 작가의 아이디어와 문장들을 통해 그들의 숨은 면모를 보여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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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도가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계절 내내 마찬가지였다. 한 치의 예외가 없었다. 유진은 풀장으로 걸어갔다. 반전은 없었다. 모든 게 예정된 대로였다. 재미는 반감되었다. 모른 척할 뿐이었다. 맥주는 미지근해지고 과자는 눅눅해졌다. 스포일러. 언젠가 모두 혼자가 된다. 그러니 땀 내지 않으려면 숨 쉬지 않는 것처럼 조용히 지내야 한다. 그녀는 언제나 앉는 자리로 돌아갔다, 수영장의 의자들은 다시 하나둘 채워지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한 날씨로군. 까무룩 잠이 들었다.

 

도수영(2020년 실천문학 신인문학상), 한국에서 온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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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쉬는 천천히 몸을 숙여 자기 앞에 떨어져 있던 나머지 지폐를 주웠다. 그런 다음 모든 지폐를 가지런하게 펴서 사방의 각을 맞춰 정리한 다음 한쪽 바지 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냈다. 그는 성큼성큼 희수 앞으로 다가가 자신의 돈을 더한 지폐 뭉치를 내밀었다.

"당신에게 주는 팁이에요. 부디 해피하길 바래요."

그는 희수의 손을 낚아채듯 잡아 돈을 쥐여 주고는 뒤돌아 가버렸다. 순식간이었다. 끝까지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박이강(전 한경닷컴 · 서울신문 칼럼니스트, 저서 『나는 세계다』),

파라다이스 리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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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배다흰 만난다고?"

"그러려고 합니다."

"행운을 빈다. 그런데 병진아."

"네."

"나도 옛날에 배다흰 팬이었다."

 

오선호(201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배다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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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입술에서 바람이 새는 소리, 허망한 감탄사가 들렸다.

왜 저러는 건데? 날고 싶다는 말인가? 제정신이 아닌가봐.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착각은 개인의 고유 권한이니까, 내 뒤에서 선 누군가가 꿍얼댔다.

 

(중략)

 

무슨 도움? 의아했으나 나는 그 자리에서 꿈적도 하지 못했다. 뛰어 올라가 언니를 말리자니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웠다. 무엇보다 언니의 행동을 제지할 용기와 명분이 없었다. 못 본 척하고 그냥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려야 할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프지만 괜찮다고. 언니가 몸으로 하는 말을 알아들었으니까. 우물쭈물하면서 구경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나를 언니는 보고 있었다.

 

김수영(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2021 심훈문학상), 위로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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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찐따였을지도 몰라.

자기 마음 편하려고 기억을 바꿨다는 거지?

누구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뭐 어때. 진구를 안 만난 걸로 해.

그 이상한 애는 진구였던 걸로. 피구공도 걔가 들고 간 걸로 생각해 버리자. 마음만 편하면 되는거지.

나 좀 못난 것 같지 않아?

다 그렇게 살아. 싫은 걸 왜 자꾸 마주하려 해. 뭐 좋다고.

 

최원섭(2021년 영남일보 문학상), 진구에게 듣고 싶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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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크리피한데?



짧은 글에 갖춰진 개연성 속, 크리피(creep)한 소재와 풍자로 가득 찼다. 한국과 싱가포르의 장거리 '연애'인 줄 알았으나, 절절한 미련이 담인 사랑이 아니라 그저 불륜 커플이었다는 사실과 누구보다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이 휴가로 놀러 간 외국에서 악에 받친 초라한 사람이 됐다거나, 추억 속 연예인의 흔적을 쫓아 방방곡곡을 찾아가는 팬 등, 읽다 보면 흥미진진하면서도 어딘가 살짝 소름 끼치는 부분에 머리통이 어딘가 밀도 높은 공기층에 부딪친 느낌이다. 수위가 높거나 그런 건 아니다. 한때 유행하던 넷플릭스 <블랙미러>의 청소년 판이라도 해야 하나, 글을 보면서 그들의 장편소설이 기대되더라.

 

내 이야기가 아닌 것 같지만 어디선가 마주한 경험 같다. 결국엔 나의 이야기나 마찬가지겠지.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를 취한 마담 모로를 경멸하던 희수가 자신의 바틀러 아니쉬에게 그보다 더한 짓을 했다는 것, - 사실 마담 모로도 아니쉬에게 어떤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 희수는 저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하면서 모로와 같은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는 자신이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당당하다. 끝없는 자기애로 자기합리화를 마친 희수는 회사로 돌아와 황홀한 휴가를 보냈다고 무용담을 펼친다. 마침 홀로 보낸 휴가에서 생긴 일이니 본인만 모른척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그대로 덮는 그런 치사한 행동을 텍스트로 마주 보자니 졸렬하기 짝이 없었다.

 

어린 시절 나보다 못났던 진구가 성공해 번지르르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온갖 좋은 말로 포장하며 '내 친구가 아닌 것 같아'라는 말로 퉁치고 친구의 약점을 찌르는 치기 어린 행동을 반성도 아니고 자아 성찰도 아닌 애매한 결말로 끝내는 것이 숱하게 보아온 우리들의 이면을 들추는 것 같다. 하다못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내가 생각하고픈 대로 말하는 대로 굳어져가는 것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않나? 우리 모두의 과거는 제각각 다른 형태로 기억되고 있다. 굳이 들추기 싫은 불편한 진실을 쉽게 외면하는 현실을 꼬집는 '진구에게 듣고 싶은 말'을 마지막으로 <폴더명 울새>는 마무리 짓는다.

 

 

 

그래도 문장이 좋아서


 

문장이 좋고 흥미진진한 소재와 가벼운 분량 덕분에 자꾸 손길이 간다. 곱씹어 읽어보기도 좋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나 잠들기 직전에 읽어보기 좋다. 요즘 에세이나 도움 되는 서적이 아니면 애초에 읽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잠시 쉬어가기 좋게 짧은 호흡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가볍게 읽을 수 있다. 흥미로운 스토리와 흡입력과 단편으로 엮인 글 덕분에 순식간에 읽었던 것 같다. 등단 여부 정도의 간단한 소개 외 다른 말없이 오로지 단편보다 짧은 작품에 자신을 담아내는데, 출판사의 기획을 통해 이런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담백하고 감각적인 문장 덕분에 리프레쉬한 경험을 가졌다.

 

 

나는 배다흰을 살면서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던 지라 종내에는 실패가 내 삶이 되었다. 배다흰이 내 실패였다. 그런데도 나는 배다흰에게만 희망을 걸었다.

 

오선호, 배다흰


 

눈은 하얀 천처럼 펄럭이며 내려왔다. 슬로프에 떨어지는 조명이 긴 바늘이 되어 흰 천을 성기게 꿰었다. 흰천이 겹겹이 달라붙으면서 흘러내렸다. 흐르는 천이 겹쳐지면서 거대한 흰 벽이 되었다.

 

김수영, 북극과 양파

 

 

등단 이력 외에 소개가 없는 탓인지 깔끔한 문장과 눈길을 끄는 문장력이 느껴진다. 문장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계속 읽었다. 오랜만에 읽는 소설이라 그런지 순전히 작품을 즐길 수 있었던 포인트 중 가장이었다. 아무래도 앤솔로지다 보니 여러 작가의 개성을 한 권에서 적절하게 느낄 수 있었던 기획이 좋았던 것 같다. 출판사의 기획으로 탄생한 만큼 앞으로 이런 취지를 담은 기획을 계속 이어나가면 좋을 것 같다.

 

<폴더명_울새>는 텀블벅 펀딩을 통해 총 431%를 달성하고 출간됐다. 그리고 올해 10월 18일, 온라인 서점 정식 출간일을 맞이했다. 신생 출판사인 만큼 아직 헤쳐 나가야 할 것이 많아 보인다. 알고 보니 '울새'는 수많은 작품에 등장하여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한 새라고 한다. 또한 새로 생성된 무작위 폴더 이름 중 하나로 '비어있는 가능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런 상징적인 요소를 차용해 탄생한 <폴더명_울새>는 신인 작가들을 위한 시리즈로 제작되어도 괜찮을 것 같다.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해 보며 이만 글을 줄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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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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