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유머'로 보는 백남준 [미술/전시]

백남준아트센터 «웃어(Humor Has It)»전시
글 입력 2021.10.07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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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아트센터 외관

 

 

지난 주말 갑자기 시간 여유가 생겨 백남준아트센터를 방문했습니다. 당일 예약은 불가하고 현장에서 남는 티켓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데 다행히 자리가 남아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기획전으로는 «웃어(Humor Has It)»와 «오픈 코드. 공유지 연결망»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웃어(Humor Has It)»전은 2022년 2월 2일(2로 통일된 날짜는 지금에서야 발견)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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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어(Humor Has It)» 전시 포스터

 

 

«웃어» 전시는 사회의 전통적 가치와 예술 제도에 도전한 플럭서스와 백남준을 유머의 관점에서 조망한다.

 

- 전시 서문

 

 

기획전에 대해 아무런 정보 없이 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백남준과 플럭서스 그룹의 작업을 ‘유머’의 관점에서 보여준다는 전시 서문을 보고 ‘그래 이거다!’라고 내적으로 소리쳤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 중 한 명이 바로 백남준입니다. 그래서 그의 예술 작업이 얼마나 재치 있는지, 백남준이라는 사람 자체도 얼마나 장난꾸러기 같은 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주제의 백남준 전시가 무엇보다 반가웠습니다.

 

관람 내내 웃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던 «웃어» 전에서 만난 웃음 나는 작업들을 소개합니다. 전시를 다녀온 분들이라면 기억을 다시 한번 꺼내보며, 전시를 관람할 예정인 분들은 사전 정보를 통해 백남준과 플럭서스 아티스트들의 작업을 더 재밌게 즐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백남준과 플럭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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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어(Humor Has It)» 전시 전경

 

 

이 전시는 백남준과 플럭서스(Fluxus) 그룹을 함께 살펴보는 전시입니다. 백남준에 대해 말할 때 빠지지 않는 ‘플럭서스’ 아티스트 그룹을 짧게 소개하겠습니다.

 

플럭서스는 1960년대 초 뉴욕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서 활동했던 예술가 그룹입니다. 루즈하게 형성된 그룹이었기 때문에 구성원이 고정되어 있지 않았지만 화가, 음악가, 무용가, 시인, 작가 등 전 예술 분야에 걸친 인물들이 이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인물들로는 백남준,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조지 마키나우스, 샬롯 무어먼, 벤저민 패터슨 등이 있고, 보다시피 이들의 직업과 국적도 다양합니다.

 

이들은 모두 장르를 막론하고 굉장히 실험적인 작업들을 했습니다. 화가는 우리에게 친숙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고 음악가는 우리에게 친숙한 방식으로 악기를 연주하지 않았습니다.

 

'백남준' 전시라고 해서 TV 모니터들이 전시된 풍경을 기대하고 보러 간다면 사진과 포스터, 일상 사물들과 소품들로 채워진 전시장에 조금은 의아 할 수도 있습니다. 백남준은 TV 작품으로 가장 유명하지만 사실 그도 온갖 영역의 작업을 해왔습니다. 백남준을 포함해 플럭서스 예술가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당시 '예술'이라는 개념에 반기를 들고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무는 일이었습니다. 동일한 목적의식 아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한 데 모일 수 있었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돌발 행위가 예술이 되다


 

백남준은 퍼포먼스 작업을 많이 했으며, 이 전시에는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영상과 사진이 많습니다.

 

가장 인상 깊은 퍼포먼스 사진은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 곡>에서 백남준이 가위를 들고 있는 상태로 찍힌 사진이 아닐까 싶습니다. 쾰른 스튜디오에서 열린 이 공연은 백남준의 쇼팽 음악 연주로 시작됩니다. 그러다 갑자기 관객석으로 달려나가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가위로 잘라버리고 그와 데이비드 튜더의 머리 위로 샴푸를 뿌리는 퍼포먼스를 보여줍니다. 이 피아노 콘서트장에 있었던 관객들은 얼마나 당황스럽고 또 재밌었을까요?

 

이 상징적인 퍼포먼스는 후에 백남준의 장례식에서 재현됩니다. 조문객들은 오노 요코를 시작으로 장례식장에 준비된 가위로 옆 사람의 넥타이를 잘라 관 속에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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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위한 선>(1962)

<머리를 위한 선> 퍼포먼스 중인 백남준 © Tate

 

 

또 하나 인상 깊은 작품은 전시장 한 쪽 벽면에 걸려있는 평범한 수묵화처럼 보이는 그림입니다. 세로로 긴 종이에 검은 잉크로 선이 그어져있는 작품입니다.

 

얼핏 철학적으로 보이는 이 그림은 백남준이 «플럭서스 국제 신음악 페스티벌»(1962)에서 선보인 <머리를 위한 선>이라는 퍼포먼스의 결과물입니다. 머리카락을 붓으로 삼아 잉크와 토마토 주스를 섞은 액체에 담갔다가 머리를 종이에 대고 그은 작업으로 반전의 재미를 선사합니다. 이런 행위에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우아한 클래식 콘서트 장을 획기적인 퍼포먼스의 장으로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아시나요? 존 케이지가 작곡한 곡(?)으로, 4분 33초의 연주 시간 동안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 음악입니다. ‘이게 무슨 음악이냐’ 싶은 분들도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연주 시간 동안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그 시간 동안 관객들의 숨소리, 기침소리,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사람들이 움직일 때 나는 의자 소리 등 일상의 소리들이 들릴 것이고, 그게 바로 하나의 연주곡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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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체 피아노>(1963)

 

 

존 케이지의 영향을 크게 받은 백남준의 작품에는 케이지의 피가 흐르는 것 같습니다. 케이지의 <4분 33초>와 비슷한 작업으로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1963)에서 연주했던 <총체 피아노>가 있습니다. 피아노에 시계, 속옷, 드릴 등의 사물들을 설치해 연주자가 그 피아노를 연주할 때마다 물건들이 부딪혀서 소리가 나는데 그게 연주곡이 됩니다. 일상의 소음과 피아노 연주가 함께 펼쳐지며 예측할 수 없는 음악이 탄생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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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기 조곡>(1962)

 

 

백남준과 플럭서스 구성원들은 스코어 즉, 악보 혹은 지시문도 작성했습니다. <끌기 조곡>(1962)은 백남준이 만든 스코어 중 하나로 전시된 사진에서는 바이올린을 끌고 가는 퍼포먼스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행위와 소리가 결합된 작업, 행위예술이자 음악입니다. 이 사진은 엽서로도 제작되어 뮤지엄 숍에서 기념으로 구매도 가능합니다.

 

 

 

놀듯이, 가볍게


 

‘플럭스 키트’는 이번 전시에서 꽤 비중 있게 다뤄집니다. 저 또한 이 전시에서 처음 알게 된 작업인데 대부분의 플럭서스 예술가들 각자가 ‘플럭스 키트’를 제작했습니다. 작은 사물들이 들어있는 상자, 게임 규칙이나 지시문이 적힌 종이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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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을 위한 극장>(1961)

 

 

백남준이 만든 <가난한 사람을 위한 극장>(1961)은 지시문입니다. “택시를 부르고 먼 거리를 운전해달라고 부탁한 후 미터기를 바라보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플럭서스와 백남준의 예술 철학은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결과는 정해져있지 않으며 사람마다 다른 결과를 얻게 됩니다. 마치 우연의 집합체인 일상 같은 예술을 보여줍니다. 전시장에는 넘겨볼 수 있는 샘플 키트가 있어 하나하나 읽어보면 재미있는 지시문들이 많아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일상 속 예술, 예술 속 일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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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비(한국 조리법)>(1985)

 

 

백남준과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일상 사물들에 의미를 더하거나 본래 기능이 있는 사물을 기능이 없는 오브제로 활용해 일상 사물에 예술이라는 새로운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냄비(한국 조리법)>(1985)는 조리법이 적힌 냄비인데 냄비라고 하기에는 그 위에 물감이 덕지덕지 얹혀있어 제 기능을 할 수 없고 별 볼 일 없는 냄비가 아니라 어떤 새로운 조각 작품처럼 보입니다.

 

<지시문 2번>(1965)은 벤저민 패터슨의 작품으로 키트 안에 세수할 수 있는 수건과 비누가 들어있습니다. 전시 설명에 따르면 ‘공공장소에서의 세수가 예술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이 작품은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예술이 아닌가에 대해 재고해 볼 수 있도록 합니다.

 

 

 

'TV+정원', 미래를 상상하는 백남준만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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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아트센터 1층에 전시된 'TV 정원' 전경

 


'TV 정원'은 «웃어»전의 일부는 아니고 상설로 전시 중인 작품이지만 제가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이기에 꼭 언급하고 싶었습니다. 이 작품은 1층의 기획 전시를 보고 나오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데 열린 공간 속 사각형의 단 위, 꽤 넓은 구역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살아있는 식물들이 심어져있고 그 사이사이로 텔레비전 모니터들이 놓여 있습니다. 살아있는 식물과 텔레비전 모니터. 자연과 기술. 이질적인 두 가지 요소가 함께 얽혀 있는 이 풍경은 어색하면서도 매력적입니다. 정글처럼 얽힌 식물들 사이로 번쩍거리는 모니터 화면들이 스펙터클을 만들어냅니다.

 

백남준은 이 작품을 통해 자연과 기술이라는 대조되는 두 요소가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세상을 상상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미 우리 삶에서 ‘기술’이 삶의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기술의 영향력과 가능성을 일찌감치 예견한 백남준은 그 세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치 있게 표현해냈습니다.

 

*

 

전시를 다 보고 나오는 길, 제가 백남준을 좋아하는 이유는 역시 그의 유머러스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을 무겁지 않게 전달하는 데에는 유머가 효과적입니다. 백남준과 플럭서스 예술가들의 작업을 보며 한편으로는 통쾌하기도 했습니다. 고상한 예술에 돌을 던진 격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백남준이 장난스럽게 던지는 말과 행동 속에는 핵심이 들어있습니다. 결과야 어찌 됐든 모두가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예술의 순간을 발견하도록 했습니다.

 

유머가 넘치는 «웃어»전시에 방문할 예정이라면 다른 미술관에 갈 때와는 다르게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전시장을 들어서길 바랍니다. 어느 순간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함과 동시에 농담 같은 진담으로 가득 찬 백남준과 그의 동료들의 작품을 보며 예상치 못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도 자신의 작품을 너무 진지하게 바라보기보다 즐겁고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걸 더 반기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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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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