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세상의 모든 '비기너'를 위해: 비기너스 [영화]

당신의 서투른 시작을 응원하는 영화
글 입력 2021.09.15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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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어떤 일이나 행동의 처음을 행하는 것.


시작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모든 선택의 끝을 예측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처음 발표를 하게 된 아이는 발표가 끝난 뒤 야유를 받을지 박수를 받을지 알 수 없고, 처음 직장에 들어가게 된 사회초년생은 퇴근 전까지의 시간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시작을 얼마나 두려워하든지 간에 그것을 피할 방법은 딱히 없다.


삶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동안 처음 겪게 될 새로운 일들은 계속해서 생긴다. 영화 <비기너스>에는 삶과 사랑을 대하는 법이 서툰 초심자들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우리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끊임없이 넘어지고 실수하지만 결국은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마음 언저리를 따뜻하게 위로한다.


이 영화를 본다고 능숙한 시작에 대해 배우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삶이 늘 주머니 속의 초콜릿처럼 녹아 엉망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쯤은 이 영화를 만나보길 권하고 싶다.




인정하고 나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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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커밍아웃을 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올리버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가정에 충실한 듯 보이면서도 올리버와 그의 어머니를 외롭게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결혼은 두 사람이 각자 자신의 무언가를 하나씩 포기함으로써 어쩌면 공평하게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어쨌든 어린 올리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부모님의 영향이 얼마나 닿았는지는 몰라도, 올리버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굉장히 방어적으로 구는 사람으로 자랐다. 어느 날 파티에서 '애나'라는 매력적인 여성을 만나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애나는 하필 잘 '떠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둘의 관계가 시작되는 지점이 독특하다. 애나는 후두염에 걸려 말을 하지 못하고 작은 노트에 글을 쓰면서 올리버와 대화를 이어간다. 파티장을 나와서 올리버는 어렸을 적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애나에게 방향을 지시하게 하고 자신은 운전대를 잡았다. 어떤 시작은 그렇게 낯섦이 주는 설렘과 충동에 기대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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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장면은 여러 개의 시점을 서로 교차하면서 보여준다. 올리버의 아버지가 암을 선고받고 돌아가시기 전까지의 과거와 더 어렸을 적 다소 냉담했던 부모님의 관계를 지켜보는 또 다른 과거, 그리고 올리버가 애나를 만나 사랑을 이어가는 현재가 계속해서 맞물린다.

 

올리버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특히 게이임을 인정하고 암을 선고받은 이후의 아버지는 과거와 대비되게 거침없고 열정적이다. "뭔가 해보고 싶어."라고 말했던 것처럼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적극적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린다.


그런 올리버의 아버지 '할'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나는 나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알고 있는가? 따위의 것들. 나 자신을 정의하지 않고는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수 없다. 그게 진정한 시작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할은 자신을 더 이상 숨기지 않는다. 드러내면서 더욱 빛나는 삶은 그의 죽음까지도 조명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결국 올리버는 아버지의 진짜 사랑을 목격하면서 할과 그의 삶을 이해하기에 이른다.




놓친 척 끝내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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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면서 실수하듯 놓치고 '끝'을 선고한 경험이 종종 있었다. 올리버 역시 그랬다. 그는 지나간 연인들을 대개 그런 회피적인 태도로 떠나보냈다.


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떠나보냈냐는 애나의 질문에 올리버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 사이가 잘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어. 그래서 확실히 잘 안되도록 만들었어."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은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실수다. 자신을 속여서 만들어진 그럴듯한 이별에 체념하는 것은 올리버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애나 마저 같은 방식으로 떠나보낼 뻔했다.


아버지와 그의 연인인 '앤디'의 사랑은 실패했다고도 말할 수 있는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관계 이후로 올리버에게 새로운 영향을 미쳤다. 각자의 삶에 서로 다른 이유로 찍힌 불안의 방점은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다. 올리버는 계속해서 아버지 삶의 후반부를 상기하며 완벽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랑이 쉽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렇게 한참을 곱씹고 나서야 습관처럼 붙잡지도 못하고 떠나보냈던 연인 애나를 다시 만나기 위해 달려간다. 우리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어떤 관계를 완성할 수 없을 거라는 불안은 허울 같은 꽃다발을 버리면서 함께 떨쳐낸다. 세상의 많은 초심자가 하는 실수. 완벽함을 바라는 것. 그러나 우리는 절대 그런 식으로 완성될 수 없다. 불완전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올리버는 그렇게 다시 사랑을 되찾았다.




마음을 닮은 눈을 가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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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항상 사자를 갖는 꿈을 꿨지. 사자는 오지 않았어. 그런데 기린이 왔지. 넌 혼자 지낼 수도 있고 기린과 지낼 수도 있어."


"사자를 기다릴래요."


"그래서 걱정이라는 거야."


올리버는 오지 않는 사자를 기다린다는 명목으로 혼자 남길 택한다. 사자가 정말로 어느 날 뒤늦게 나타날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올리버는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쉽게 왔다가 쉽게 떠나는 것에 마음 줄 바에야 외로운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


하지만 결국 그는 바람 같은 사람에게 빠져버렸다. 애나는 울면서 올리버에게 말했다. 항상 빈 방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그 빈 방에서 자유를 느낀다고. '차라리'를 선택하는 삶은 원래 그렇게 외롭고, 슬픈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다른 빼어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나라면 과연 혼자서 계속 사자를 기다릴지 기린과 함께 남을지 고민해보게 된다.


'아서'는 원래 할의 반려견이었다. 할의 죽음 이후에는 올리버와 함께 지내게 된다. 할과 앤디, 올리버와 애나. 한없이 다정하면서도, 목구멍을 버겁게 지나는 알약 같이 욱신거리는 묘한 관계 사이를 진정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은 아서였다.


영화에서 아서는 굉장히 특별하고 사랑스럽게 연출된다. 아서는 사람의 말을 할 순 없지만, 올리버는 아서의 눈을 보며 그와 대화할 수 있다. 이때쯤 올리버와 애나의 첫 만남이 다시 떠오른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대화, 눈을 보면 알 수 있는 슬픔과 같은 것들 말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애초에 그렇게 태어나 그렇게 만난 것이다. 누구도 완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마주 보고 위로를 나눈다.


감추지 않고 내 안에 담겨 있는 것을 드러낼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모두가 서툴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한다는 사실을 오직 두 눈동자 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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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데이지 꽃. '단순하고 행복하게 살아. 네게 주려던 게 바로 이거였어.' 하고 말하는 것만 같은 어머니의 목소리.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올리버는 마침내 시작의 시작에 선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시작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 그것은 애나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자유의 빈 방'과 같은 것이다. 자유를 느낀다고 해서 정말 자유로운 것일까? 때로 나의 감각과 감정은 나를 능숙하게 속이고 안정을 취하기도 한다. 그 방 안에 갇혀 안도의 숨을 쉬는 것만으로는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서야만 한다.


시작을 했으면 그것이 어떤 과정으로 흐르든지 간에 끝을 내야 한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 시작, 다시 끝, 그리고 다시 시작. 일과 사랑, 그 외의 어떤 것도 마찬가지다. 내 눈을 가리고, 실수로 위장한 중도하차에 익숙해지는 일은 우리를 가로막는 어떤 것 앞에서 위축되게 만들 뿐이다.


어차피 모두가 다 처음인 삶. 만약 당신이 오래도록 사자를 기다리는 중이었다면, 그리고 우연히 이 영화를 기린처럼 마주쳤다면 꼭 스쳐 보내지 않고 당신의 옆에 두길 바란다. 답이 될 수는 없어도 어떤 위태로운 날의 방향이 되어줄 수는 있을 테니까. 태양 아래의 데이지 꽃처럼 아주 단순하고, 행복하게 말이다.

 

 

[고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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