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평양에는 평양냉면이 없다 [드라마/예능]

KBS 다큐 인사이트 - 냉면 랩소디
글 입력 2021.09.10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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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때로 중심보다 주변부에서 더욱 교조적인 모습을 보이고는 한다. 중심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주변부의 욕망 때문인지, 외부와의 접촉으로 인한 문화적 오염을 두려워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재미있는 것은 한없이 원형을 추구하는 주변부의 사람들이 중심부의 실상을 보았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남한의 평양냉면은 아주 흥미로운 음식이다. 분단 이후 본래의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없게 된 이 요리는 남한의 독자적인 식문화로 발전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더는 원형을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 소모적인 혈통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그러다 보니 원형인지도 알 수 없는 원형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여기까진 그럴 수 있는데 원형에 닿으려는 열망이 극단에 이르러 순수한 평냉 이외의 모든 것을 멸시하는, 냉면계의 슬리데린 같은 사람들도 나타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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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냉면은 심심한 맛에 먹는 음식이므로 식초와 겨자를 넣는 것은 미개한 일이라는 지론을 가진 그들은 이른바 평양냉면의 백두혈통을 수호하는 순혈주의자다. 나를 평양냉면에 입문시킨 K도 그런 부류였다. 그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간 냉면집은 을지로3가에 있는 오래된 가게였는데, 파란 타일과 비릿한 고기 향을 머금은 습기가 목욕탕을 떠오르게 하는 곳이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물냉면 두 그릇을 시킨 그는 식초와 겨자를 넣을 수도 있지만, 냉면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어야 진짜 먹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지론을 펼쳤다. 나는 그의 생각에 크게 공감했다기보단 식초와 겨자를 싫어해서 아무것도 넣지 않은 냉면을 먹었다. 그는 나를 맛을 좀 아는 사람으로 인정했으며, 걸레 빤 물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수식어를 만든 사람들을 맛알못이라 칭했다. 마침 걸레 빤 물 생각을 했던 나는 조금 뻘쭘해졌다.

 

냉면 순혈주의자들의 입김은 방송에까지 미쳤는지, 평양냉면이 아는 사람만 아는 별미로 알려져 있던 2015~16년 무렵에는 각종 요리 프로그램에서도 평양냉면은 육수의 슴슴하고 깨끗한 맛을 즐기는 음식으로 소개되었다. 한때 미식 프로그램의 선두주자였으나 출연진의 개인적인 의견을 사실인 양 전달하는 바람에 이런저런 논란에 시달렸던 tvN의 <수요미식회>가 대표적이었다.

 

이 시기 수요미식회는 평양냉면을 주제로 두 편의 방송을 제작했는데, 해당 회차의 웃음 코드는 평양냉면이 당최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는 전현무를 다른 패널들이 초딩 입맛이라며 놀리는 모습과 평양냉면을 서너 번 먹어보니까 맛이 조금씩 느껴진다는 그의 말을 듣고 이제 입맛이 중학생 수준으로 올라왔다며 좋아하는 패널들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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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의 교류가 활발했던 2018년은 평양냉면 순혈주의자들에게 꽤 충격적인 해였다. 평양냉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 평양냉면의 본관이자 산실인 옥류관의 직원이 냉면에 직접 식초와 겨자, 붉은 양념을 넣으며 ‘이렇게 먹어야 맛있읍네다’라고 한 영상이 공개된 것은 남한 평양냉면사 70년래 제일대사건이었다. 이는 평양냉면 순혈주의자들을 향한 불의의 일격이었으며, 그들이 말하는 맛알못은 어쩌면 그들 자신일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일이었다.

  

그간 순혈주의자들의 폭압에 시달렸던 사람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순혈주의자를 향한 조롱과 비난이 쏟아지자 그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고, 요리 프로그램도 은근슬쩍 논조를 바꿨다. 앞서 언급한 수요미식회 역시 평양냉면이 다시 인기를 끈 2018년에 평양냉면을 주제로 추가 회차를 편성했는데, 옥류관에서 식초와 겨자, 양념장을 넣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전현무가 그간의 설움을 토해내며 다른 패널들을 공격하는 모습은 해당 회차의 백미였다.

 

순혈주의자들이 자신의 업보를 마주한 후 평양냉면을 둘러싼 소모적인 논쟁은 자연스럽게 ‘냉면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정도로 마무리되었고, 남북 관계가 다시 나빠지면서 냉면을 향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시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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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냉면을 둘러싼 논쟁이 일단락된 지 어언 3년, 지난달 넷플릭스에 공개된 KBS의 2부작 다큐멘터리 <냉면 랩소디>는 상기한 담론을 바탕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 주제 의식을 보여준다. 평양냉면을 포함한 남한의 이런저런 냉면을 폭넓게 다루는 다큐멘터리는 특이하게도 절에서 스님들이 즐겨 먹는, 우리에겐 조금 생소한 승소냉면을 뽑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메밀 순면을 동치미 국물에 말아 먹는 사찰 음식인 승소냉면은 고기 육수를 쓰는 냉면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발전한 음식이다. 그러나 입맛이 없는 여름, 스님들이 힘든 수행을 마치고 둘러앉아 냉면을 먹는 모습은 공간의 이질성을 뛰어넘어 우리의 일상을 떠오르게 한다.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그 모습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문화적 맥락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냉면은 다르고 또 같은 음식임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오프닝이었다.

 

다큐멘터리는 이후 남한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냉면들을 보여주는 한편, 냉면이라는 식문화가 ‘평양냉면’이라는 큰 맥락 안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실향민들이 남한으로 넘어오면서 각 지역의 사정에 맞게 변형한 냉면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평양냉면의 ‘원형’을 따지는 것이 그렇게나 큰 의미가 있는지 물음을 던진다.

 

나아가 메인 진행자인 백종원 대표가 서울 시내의 유명한 평양냉면집에서 냉면의 맛을 과감하게 비틀고 변형시키는 모습도 보여준다. 꼭 본연의 맛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소심한 저항의 단계를 넘어 자신만의 평양냉면을 만들어보라는 듯 원래 들어간 재료를 빼고, 뭔가를 추가하고, 심지어는 밥을 말면서 평양냉면의 권위를 적극적으로 해체한다.

 

이후에는 수박 냉면, 꼬치 냉면, 라임 냉면 등 남한에서 새롭게 개발한, 이게 정말 냉면이 맞나 싶은 냉면도 보여주며 작품의 주제 의식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냉면의 미래상을 제시하는 후반부를 지나, 다큐멘터리는 백종원 본인이 제주 금악마을의 주민들과 함께 지역 특산물(월동 무와 돼지고기)로 개발한 냉면을 보여주면서 마무리된다.

 

결국 홍보를 위한 빌드업이었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요식업 전문가로서의 역량과 <백종원의 골목식당>, <맛남의 광장>을 통해 쌓은 기획력을 가지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취지는 박수받아 마땅하다. 그럼에도 최근 젊은 셰프들이나 전혀 다른 분야의 셰프들을 중심으로 생겨난 냉면의 새로운 흐름을 너무 단편적으로 다룬 것은 조금 아쉬웠다. 양식 주점을 운영하는 박찬일 셰프의 냉면집이나 기존의 평양냉면을 독특하게 해석한 두 종류의 육수와 수비드한 고기 고명으로 인기를 끄는 연남동의 냉면 바처럼 독특한 매력을 지닌 곳이 많으니, 다큐를 보고 냉면에 관심이 생긴 분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다.

 

*

   

시간이 지날수록 평양냉면 순혈주의자들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새로운 시도를 사도로 취급하는 그들을 보며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남북의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져 북한의 식문화가 남한으로 대거 유입되면 평양냉면 순혈주의자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어쩌면 평양에서 온 가짜 평양냉면으로부터 진짜 평양냉면을 지키려는 그들의 눈물겨운 사투를 보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박호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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