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무언극, 제목은 '꿈' - 향수 '슬리핑 듀'

글 입력 2021.09.02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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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가 집에 도착했다. 아트인사이트에서 온 것이었다. 물론 문화초대를 통해 받은 것이다. 처음 이 향수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건 한 줄의 문장 때문이었다. 향기로 진행되는 무언극이라.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없는 근사한 카피다.

 

하지만 내가 이 향수에 대해 욕심이 생겼던 건 다른 이유가 크다. 요즘 나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침대에만 누우면 온갖 생각들이 몰려온다. 나의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도 나를 괴롭힌다. 나를 우울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동정하게 만든다.

 

이전에 잠이 안 올 땐 넷플릭스로 지루한 영화라도 보면서 잠이 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이젠 그 별별 생각들이 잠드는 걸 갈수록 어렵게 만든다. 일부러 낮잠도 피하고, 운동까지 하며 몸을 피곤하게 만들어도 잠이 오질 않는다. 어떤 때에는 동틀 녘까지 잠들지 못한 적도 있다. 오죽하면 이 생각 많은 뇌를 잘 때만이라도 꺼내놓고 싶을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향수 ‘슬리핑 듀’는 약간의 기대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이걸 쓰면 조금이나마 쉬이 잠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때문에 내가 바라는 ‘향기로 진행되는 무언극’은 바로 ‘꿈’이었다. 이는 지난 5일간의, 나의 꿈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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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째.

침대와 이불에 향수를 한 번씩 뿌리고 자리에 누웠다. 처음엔 쌉싸래한 풀냄새가 났다. 그다음엔 박하를 씹은 듯 시원한 향이 코를 간질였다. 나는 덮지도 않는 이불을 인형처럼 껴안고 눈을 감았다.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불행히도 그날 꾸었던 꿈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꿈에 대한 기억이 대부분 그렇듯 퍼즐 조각처럼 파편화되어 있었다. 꿈을 기억한다기보단 꿈에 대한 감각만 남았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뭐, 꿈을 기억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 조금 아쉽긴 해도 놀랍진 않다. 다만 앞으로의 글을 위해 당분간은 머리맡에 수첩을 놔두고 자야겠다.

 

 

2일째.

이번엔 기억했다. 꿈속에서 나는 영화를 찍고 있었다. 한창 영화제작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스무 살 때쯤인가 보다. 친구들과 영화를 찍던 나는 어느 순간 지하철을 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번엔 어느 카페에 와있었다. 이상한 여정이긴 했지만 꿈인데 뭐 어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새하얀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카페 내부는 원형의 형태로 되어 있었다. 원의 가장자리엔 조그만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중앙엔 등대에서나 볼법한 회전형 계단이 자리했다. 계단을 오르며 무심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당연히 그 너머의 지붕이 보일 리가 없었지만 이상하게 내눈엔 지붕이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리스 산토리니에서 볼법한 파란 지풍이었을 것이다.

 

2층에 다다르자 누군가 나를 맞이했다. 내가 처음 좋아했던 아이다. 언젠가 보았던, 카페의 지붕을 닮은 파란색 머리를 한 그녀는 내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홀린 듯이 그녀가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우리는 서로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었다.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찍던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 같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아주 오랜만에 그녀를 생각했다. 얼마 전 친구에게 들었던 그녀의 근황도 잠깐 떠올렸다. 스물여섯이 된 그녀는 학교를 졸업한 후 어떤 극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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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째.

악몽이라고 해야 할까. 뭐, 어떤 면에서는 악몽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고등학교 교실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노트북 앞에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광고주들을 상대하는 메일을 쓰고 피피티를 만들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요즘 내가 회사에서 하고 있는 일들이었다.

 

잠에서 깼을 땐 벌써 아침 8시 30분이었다. 재택근무긴 하지만 그래도 준비는 해야 한다.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기분이 언짢았다. 꿈속에서까지 일을 하다니. 회사가 주는 스트레스가 그렇게 대단했나? 하긴 요즘 회사를 옮기고 나서 불면증이 더 심해졌다. 걱정과 불안을 달고 사는 몸이라 익숙한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입사 일주일 만에 회사 꿈을 꾸게 될지는 몰랐다.

 

 

4일째.

헤어진 그녀를 만났다. 마치 예전처럼 우리는 함께 거리를 걸었고, 다음 주에 갈 여행에 대해 이야기했다. 기차표를 예약하고 숙소를 잡았다. 맛집도 찾아놨다. 부모님께 적당히 둘러댈 핑계도 생각해 두었다. 그러다 문득 우리가 이미 헤어졌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순간 내가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 싶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나는 무슨 기대를 하고 있는 건가.

 

잠에서 깼을 때 나는 우리가 헤어진 날을 떠올렸다. 4년을 만났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밋밋했던 이별. 싱거운 이별 뒤에 일주일 만에 재회한 우리는 예전에 함께 가기로 약속했던 전시를 보러 갔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보려 했던 전시는 이미 끝이 나버렸다. 대신 다른 전시를 보았다. 예전에 사귀었을 땐 나는 자주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고, 그녀는 그런 나의 시선을 피했었다. 반대로 이번엔 내가 그녀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녀를 도무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그녀는 나의 손가락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함께 있으면 늘 보여주었던 버릇이었다. 그러다 그녀는 나를 자신의 옆자리에 오게 하더니 내 어깨에 기대어 잠을 잤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냉정하게 착각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녀에게 어깨를 내주며 나는 도대체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 싶었다. 이미 헤어졌으면서 사귀었을 때의 행동을 반복하는 우리가 이상해 보였다.

 

그날 이후 나는 그녀를 완전히 떠났다. 나눴던 모든 메시지창을 삭제하고, 번호도 지웠다. 선물은 물론, 편지도 버렸다. 더 이상 남아 있으면 미련을 갖게 될까, 매달리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관계는 싫다. 애매할 바엔 차라리 끊어내는 게 낫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올여름엔 가족들과 함께 펜션으로 여행을 갔다. 숲속에 위치한 펜션은 굉장히 이뻤다. 꼭 <마녀 배달부 키키>에 나오는 우르슬라의 오두막을 보는 것 같았다. 내부 인테리어 역시 근사했다. 주변엔 길냥이들이 돌아다니며 펜션을 찾아온 사람들을 살갑게 맞이했다.

 

더할 나위 없는 풍경을 즐기며, 나는 문득 그녀와 함께 이곳에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 그리워하는 걸까. 글쎄, 그건 아닐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다음엔 서글펐을 테니. 이번엔 그냥 조금 놀랐다.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싶어서. 하긴 4년이면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길들여지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러니 이건 그냥 습관일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손톱을 물어뜯듯이 별생각 없이 튀어나오는 습관. 마음에 어린 기억은 지워도 몸에 어린 기억은 지우기 어려우니까. 아마 앞으로도 나는 종종 그 습관에 시달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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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째.

아버지가 꿈에 나왔다. 아버지랑 함께 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행을 가는 모양이었다. 운전대는 내가 잡았다. 장롱면허인 내가 운전대를 능숙하게 잡고 있다는 게 의아하긴 했지만 꿈속에서는 그런 건 큰 문제가 되질 않는다.

 

물론 낭만적인 여행은 아니었다. 말다툼도 중간중간 있었다. 차를 모는 동안 아버지는 집이 바다 쪽인데 뭘 또 바닷가로 여행을 가냐고 내게 타박을 해오셨다. 꿈속의 나는 그런 아버지를 달래며 차를 몰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거나 짜증이 났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스스로가 대견했다. 아버지와 했던 약속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창 면접을 보러 다닐 때 골칫거리 중 하나는 꿈에 대한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나는 꿈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면접에서는 좋은 마케터가 되고 싶다는 둥, 농담 식으로 월에 500을 벌고 싶다는 둥 그런 말들을 하긴 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세상 모든 부모님이 그렇듯 우리 아버지 역시 내가 공기업이나 공무원처럼 안정적인 직장을 갖길 원하는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께 나는 조직생활이 잘 안 맞는다며, 하루빨리 경력 쌓아서 프리랜서로 나가는 게 꿈이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럴수록 공기업에 가는 게 좋지 않겠냐며, 좋은 경력 쌓고 돈 많이 벌어서 본가에 내려와 함께 놀러 다니며 살면 좋지 않겠냐고 되물으셨다.

 

통화를 마치고 나서 나는 아버지가 하신 말씀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어렸을 적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많이 다녔다. 물론 당시엔 집에서 게임을 하거나 TV를 보는 게 더 즐거웠기에 귀찮았지만, 어른이 된 후에 돌아보면 하나같이 소중한 기억들이고 추억들이다.

 

몇 년 전 아버지가 암에 걸려 돌아가실 뻔한 이후로, 소방서에서 군 생활을 하며 수많은 환자들과 사연을 맞닥뜨린 이후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당장 좋은 기억만 쌓아도 모자라다. 덕분에 그 후로 꿈이 없던 내게 꿈이 하나 생겼다. 프리랜서가 되지 못하더라도, 생각보다 돈을 많이 모으지 못하더라도 휴일엔 부모님을 모시고 놀러 다니는 것. 그렇기에 그 약속을 지킨 꿈속의 스스로가 대견했다.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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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ater nymph, Ludwig von Hofmann

 

 

이상으로 닷새간의 무언극을 마친다. 이 무언극의 제목은 ‘꿈’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현실은 이데아를 모방하고, 예술은 이데아를 모방한 현실을 모방한다고 했다. 그렇게 따지면 나의 꿈은 나의 현실을 모방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예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듯, 나 역시 꿈을 통해 나를 바라보았다.

 

후각은 다른 어떤 감각기관보다 기억과 강력하게 매개한다고 한다. 모든 밤이 평안했던 건 아니지만, 쉬이 잠들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5번의 무언극을 관람하며 적어도 잠을 자는 행복을, 꿈을 꾸는 즐거움을 곱씹었다. 이제 그 향기를 맡으면 나는 내가 보았던 무언극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바탕으로 다음날은 조금이나마 더 평온한 밤이 되리라 믿어보려 한다.

 

슬리핑 듀. 은방울꽃의 신화에서 비롯되었다는 향수. 그 향기가 전달하는 무언극. 이 향수와 함께 당신 역시 당신이 꾼 꿈의 이야기들을 기록하길 바란다. 그 꿈을 현실의 당신을 들여다볼 수 있길 바란다. 그리하여 당신의 밤이 보다 평온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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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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