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트콤은 왜 재밌을까? [드라마/예능]

글 입력 2021.09.01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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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나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영상’이다. 영화, 드라마, 유튜브까지, 선택지는 매우 다양하다. 인스턴트식 도파민에 익숙해져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하루에 얼마나 많은 영상을 보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조금 무섭기까지 하다. 그중 내가 가장 많이 보는 것은 바로 시트콤이다. 어릴 적 지상파 채널에서 해주던 국내 시트콤 드라마들을 지나, ‘오피스’, ‘커뮤니티’, ‘미란다’ 등 외국 드라마 좀 봤다면 한 번쯤 들어봤을 시트콤들은 거의 다 봤다.

 

‘좋아해서’ 라기보다는 ‘만만해서’다. 온종일 해야 할 일과 스트레스에 눌려 있다가 마침내 얻은 자유시간에 3시간짜리 영화를 보며 그 심오한 내용을 분석하기는 사실 쉽지 않다. 그냥 머리를 비워 놓고 말장난에 낄낄대고 싶기 때문이다. 보다가 잠시 졸아도 이해하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고, 길어야 40분 정도라서 부담도 없다. 어쨌든 드라마이기 때문에 (유튜브의 짧은 영상들에 비하면) 인스턴트라는 죄책감도 덜하다.

 

그렇다고 시트콤의 매력이 단순히 ‘만만함’에 그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의 ‘괜찮은 시트콤을 고르는 기준’은 꽤 까다롭다. 사랑스러운 등장인물, 지나치게 가볍지 않은 유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현실과 가상을 신나게 넘나드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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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시트콤 중 하나인 ‘브루클린 나인 나인’은 뉴욕의 한 경찰서를 배경으로 한다. 보통 경찰, 범죄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는 수사의 과정이 극의 중심이 되지만, ‘브루클린 나인 나인’은 다르다. 이 드라마 속의 형사들은 장난스럽고, 유쾌하며, 수사와 검거 과정 모두 비교적 가볍게 그려진다. ‘브루클린 나인 나인’이 집중하는 것은 (경찰서라는 한정된 배경 안에서 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이야기인) 수사와 범죄가 아닌 인물들 개인의 삶과 신념, 그리고 관계이다.

 

주인공인 ‘제이크 페랄타’는 능력 있는 형사이지만, 어린 시절 가정을 떠난 아버지의 영향으로 비슷한 연령의 남성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제이크가 경찰서장인 ‘홀트’에게 실수로 ‘아버지’라고 부르는 장면은 드라마 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 장면들이 지나치게 가볍거나, 무겁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첫 몇 에피소드가 진행되는 동안 제이크의 행동은 ‘책임감 있는 성인’과는 거리가 멀다. 매사 가벼운 태도로 일관하는 그가 경찰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다. 하지만 제이크의 가정사가 조금씩 드러나며 시청자들은 그가 왜 그러한 방식으로 갈등에 대처할 수밖에 없었는지 납득하게 된다. 이 가상 속 등장인물들의 삶이 만화적이고 극적인 요소로 가득함에도, 쉽게 그들과 우리를 동일시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극 중 인물들은 우리와 비슷한 관계를 맺고, 비슷한 고민을 한다.

 

물론 차이점이 있다면, 이들의 문제는 대개 손쉽게 해결되며 그 과정 또한 복잡하지 않다는 것이다. 제이크의 ‘대디 이슈(daddy issues)’는 그의 삶과 성격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그는 주변 인물들을 통해 이를 극복한다. 이 콤플렉스 때문에 생활에 심각한 문제를 겪거나 인간관계에 실패하지도 않는다. 실제로 성장기의 부모·자녀 관계 문제가 성인이 되었을 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해본다면, 꽤 비현실적인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들은 어떤 형태로든 선택과 책임을 강제한다. 그 무게가 가벼울 순 있어도,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삶을 이루는 모든 선택은 피할 수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시트콤 속의 인물들은 이와 같은 고민을 간단하게 해결한다. 주변의 도움을 쉽게 얻으며, 때로는 먼 미래는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결정을 내리고, 감정을 표출한다. 게다가 어떤 것을 고르든 결국에는 다 좋은 방향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어리석은 선택과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상황으로 가득한 시트콤 속의 세상이 더 좋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다른 장르, 다른 형식을 취하는 작품에서도 우리의 일상보다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사는 인물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은 감정에 휩쓸려 충동적인 일을 저지르고, 후회하고,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성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이 매일매일을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 없다.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고,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이런 당연한 부분을 생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시트콤은 인물들이 오히려 이런 일상 속에서 울고 웃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미 몇 해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시트콤이 자취를 감췄다. (그나마 얼마 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공개된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가 한국식 시트콤의 형식을 계승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만, 대대적인 홍보에도 불구하고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야기를 창작해 본 사람이라면 모두 공감하듯, 다른 사람을 웃기는 이야기를 쓰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요즘 사회에서 보편적인 대중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유머를 만들어 내기란 쉽지 않다. 방송국 입장에서는 시트콤과 코미디의 주 소비층인 젊은 세대가 이탈한 뒤, 차라리 깊고 심오한 메시지나 영상미로 승부를 보는 편이 성공할 확률이 높은 것이다.

 

하지만 시트콤은 모순과 거짓으로 가득한 불완전한 삶을 드러내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나만이 아니라는’ 안정을 얻는다. 제삼자의 시선에서 세상을 보면서, 삶을 짓누르는 문제가 실은 그리 대단치 않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기도 한다. 우리의 삶이 히어로 영화의 한 장면 같을 수는 없어도, 그보다 재미있을 수는 있다. 코로나로 인해 이전의 일상이 완전히 사라진 지금,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시트콤의 ‘웃음’이 필요한 것 아닐까?


 

[이고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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