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삶과 여행, 수집과 기록을 예술로! [미술/전시]

아르코미술관 기획초대전 《정재철: 사랑과 평화》
글 입력 2021.08.24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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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삶을 예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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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필수 요소를 몇 가지 떠올려 보자. 그중 빠질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사진 촬영일 것이다.

 

평범한 일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특별한 풍경과 사건들을 기록하기 위해 우리는 늘 카메라를 꺼내 든다. 그렇게 남겨진 사진은 때로는 추억을 되살리는 장치로, 혹은 현장의 공기를 기록하는 증거물로 제 역할을 다한다. 여행과 삶이 곧 예술이었던 작가 정재철 역시 기록과 수집으로 자신의 발자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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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철, 〈3차 실크로드 프로젝트〉, 2010,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3분 43초
[이미지 출처_아르코미술관]
 
 
‘사랑과 평화’는 정재철이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마지막 여행지였던 런던 팔리아먼트 광장의 반전 시위캠프 천막에 적은 문구다. 이는 그의 작고 1주기를 맞아 열리는 전시의 제목이기도 하다.
 
오는 8월 29일까지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리는 《정재철: 사랑과 평화》展은 크게 <실크로드 프로젝트>(2004-2011)와 <블루오션 프로젝트>(2013-2020), 그리고 개인전 《분수령》(금산갤러리, 2017))에서 선보인 작업들과 아카이브 섹션으로 구성된다.


정재철은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이전까지는 나무 재료를 이용해 조각 작업을 했다. 중앙미술대전 대상이나 김세중 청년조각상 등을 수상하며 주목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에 걸쳐 국제 심포지엄이나 해외 레지던시 등에 참여하며 작업의 방향성을 전환하게 된다.
 
이후로 그는 전지구화와 그에 따른 유목 현상에 관심을 두고 문화 정체성의 경계에 관한 프로젝트를 펼치기 시작한다.
 
 
 
<실크로드 프로젝트>: 가변하는 쓰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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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철, 〈설치〉, 2008 추정, 폐현수막, 천 등, 190×200cm /

정재철, 〈설치〉, 연도미상, 폐현수막, 천 등, 120×120cm [이미지 출처_아르코미술관]

 

 

그 대표적인 작업이 제1전시실의 <실크로드 프로젝트>다. 서울의 폐현수막이 세계 각지에서 어떻게 재생산되는지를 실험한 프로젝트로,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총 3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먼저 1차는 중국, 파스탄, 인도, 네팔에 안내문과 함께 폐현수막을 전달하고 그 사용을 확인하기 위해 재방문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후 폐현수막으로 그늘을 만드는 <꽃그늘 키우기>를 중국, 티벳, 베트남, 캄보디아에서 진행했다. 뒤이어 2차는 파키스탄, 이란, 터키 등지에서, 3차는 터키, 그리스, 유럽에서 진행되었다.

 
제1전시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현수막으로 만들어진 차양이 눈에 띈다. 정방형의 모양에 장식용 수술이 매달려 있어 구색은 갖췄지만 검은 글씨로 선명하게 새겨진 ‘나이트 댄스 새벽반’이라는 문구가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현수막을 우리 문화를 함축하는 기호로 본다면, 그 본래의 의미가 지워지고 새로운 용도로 재탄생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차양 아래로는 폐현수막으로 만든 옷을 입고 공항에서 시작해 유럽의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작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2010년에 촬영된 <광장>이라는 제목의 영상으로, 작가가 수행한 걷기 퍼포먼스를 기록했다. 선명한 색감의 현수막으로 옷을 지어 입은 작가는 사람들의 시선 사이로 걸어가고 있다.
 
전시실 중앙의 긴 좌대에는 실크로드 프로젝트 중에 남긴 노트와 지도, 그리고 도장이 놓여 있다. 이외에도 실크로드 프로젝트 당시 현장을 기록한 사진들과 루트맵, 현지의 언어로 번역해 전달한 안내문이 벽면을 장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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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철: 사랑과 평화》 전시 전경 [이미지 출처_아르코미술관]
 
 
맞은편에는 프로젝트의 현장을 담은 영상기록물이 영사된다. 그 안에는 작가가 길을 걷는 모습, 현지인들과 대화하고 폐현수막을 나누어 주는 모습, 그것들이 앞치마나 커튼, 햇빛 가리개로 만들어지는 모습이 담겨 있다. 작가의 뒤를 바짝 쫓으며 현장을 기록하는 데에 집중한 듯한 촬영 기법이 인상적이다.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흔적은 다양한 매체로 전시실에 흩뿌려진다. 그 다채로움은 일종의 혼돈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모든 사물과 기록물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음에도, 그것만으로는 당시의 현장을 그대로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모호함은 백종관의 〈기적소리가 가깝고 자주 들린다〉(2021)에서 가장 짙게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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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종관, 〈기적소리가 가깝고 자주 들린다〉, 2021,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4분

[이미지 출처_아르코미술관]


 
영상의 제목은 정재철의 작가 노트에서 따온 문장이다. 백종관은 정재철이 생전에 남긴 이미지나 소리, 텍스트를 조각조각 이어붙인다. “거대한 주파수의 울림”이라는 어구는 불꽃놀이 장면과, “3층의 거대한 구조물이 4개의 바퀴 위에 올려져 있다”라는 문장은 강가의 유람선과 나란히 병치되는 등, 영상은 각 요소가 지녔던 본래의 감각과는 또 다른 사유를 이끌어낸다. 이아영 아키비스트가 재구성한 <정재철 작가 노트 발췌 모음, 1996-2020> 역시 그렇다.
 
단지 프로젝트의 내용이 잘 전달되는지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제1전시실의 방식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방식은 재해석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작가의 작품 세계와 맥을 함께한다. 감상자는 원하는 정보를 선별적으로 조회하고 과거의 파편에서 색다름을 느낀다. 이로써 기존의 정보는 절대적인 진실로 남겨지기보다는 주관적인 감상이 더해져 다양한 형태로 변주된다. 마치 햇빛 가리개로 거듭난 현수막처럼 말이다.
 
 
 
<블루오션 프로젝트>: 공동의 책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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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철, 〈블루오션 프로젝트-크라켄 부분〉, 2021년 재설치, 혼합재료, 가변크기 [이미지 출처_아르코미술관]


 

제2전시실의 <블루오션 프로젝트>에서는 <실크로드 프로젝트>보다 수집의 성격이 더 짙게 나타난다. 제2전시실 중앙부에는 물병이나 구명조끼, 그물이나 부표 등 셀 수 없는 해양쓰레기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이는 작가가 2013년부터 작년까지 신안군, 제주도, 영흥도, 독도, 새만금, 백령도 등 동서남북 해안가를 답사하며 수집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서천이나 제주, 남해 등지의 초등학교나 마을회관, 노인회관 등에서 환경오염에 관한 미술적 활동으로 구성된 교육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작가는 해양쓰레기를 ‘해양부유사물’로 명명했다. 그것들이 원래는 쓰레기가 아니라 쓰임새를 지닌 사물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어색하지 않은 명칭이다. 본래의 용도를 잃고 해양을 부유하게 되었을 뿐, 그것들의 형체는 온전히 남아 있다. 작가는 사물들의 출처를 밝히는 과정에서 해류의 흐름과 쓰레기들의 노선을 기록한 루트맵 드로잉 〈북해남도 해류전도〉, 〈제주일화도〉를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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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재철, 〈제주일화도〉, 2019, 장지에 채색, 150×210cm [이미지 출처_아르코미술관]

 

 

해양은 물리적 경계가 불분명한 자원이다. 국가별로 관할구역이 지정되어 있기는 하나 그 경계선은 더없이 미약하고 형식적이다. 한순간의 실수가 해류의 흐름을 타고 겉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 환경에 악영향을 가한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누군가는 도리어 그 특성을 이용해 무책임한 행동을 저지르기도 한다.


해양부유사물은 편치 않은 과거를 증거하는 오브제다. 쓰레기들이 드넓은 바다를 떠돌 때는 체감할 수 없었던 양적 규모가 우리 눈앞에 객관적인 숫자로 나타나자 자연스럽게 그 심각성이 주지된다. <블루오션 프로젝트>는 극심한 환경오염의 시대에서 미술의 역할을 고민한 과정이자 그 결과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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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철: 사랑과 평화》 아카이브 섹션, 2021 [이미지 출처_아르코미술관]


 
제2전시장의 나머지 구역에는 개인전 《분수령》에서 선보였던 작업과 아카이브 섹션이 마련된다. 과천 갈현동 가루개마을 주민들이 이주하면서 버려진 식물을 다시 심은 화분들이 전시되며, 아카이브 섹션에는 도록이나 작가 노트, 사진, 드로잉 등이 작품 세계의 변천사에 따라 시기별로 분류되어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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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전반에서 편 가르기와 구분 짓기는 경계의 대상이다. 정재철은 전지구화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점점 관념적으로 변해 가는 국경선을 의식하고 조각에서 비물질 예술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 결과로 어떤 개념이나 정체성, 혹은 피아를 구분하는 경계선이 영원불멸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실크로드 프로젝트>에서는 한 문화권의 기호가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 새로운 의미를 찾게 되는 모습을, <블루오션 프로젝트>에서는 해양 구분선의 경계를 넘어서서 모두가 지녀야 할 공동의 책임감을 짚어낸 것이다.

 
틀 짓기를 의심하는 자세와 수집과 기록이라는 기본적 매커니즘은 두 프로젝트를 관통한다. 이는 전시의 구성 방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기록은 이 전시에서 다시 한 번 수집과 재구성을 거쳐 일련의 결과물로 재탄생되고, 그것은 이 전시에서 결코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한다.
 
수집은 원래의 것을 왜곡하지는 않지만 그중 무엇을 가려낼 것인지를 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은 수집가, 곧 전시의 몫이지만 유사한 선택권이 감상자에게도 주어진다. 각자의 발걸음과 시선에 따라 한정된 공간 안에서도 무수한 방식의 감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경계와 편견을 뛰어넘고 절대성에 의존하지 않았던 정재철의 작업 정신은 전시의 방식에도 깊숙히 아로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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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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