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뭉뚝함 속에 날카로움, 그리고 다시 융합 [전시]

아르코미술관 기획초대전 《정재철 : 사랑과 평화》 (2021.07.01.~08.29)
글 입력 2021.08.11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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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이 아닌 현실로


 

미술의 힘이 추상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올 수 있게 하려면, 미술계는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하나의 분명한 방법은 미술계 안에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과 정치, 사회, 경제를 아울러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실체적인 경험을 관객에게 선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지금 여론이 현세대의 요구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면, 전시는 진정한 민주화가 무엇인지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포괄적인 주제는 다소 먼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어서 관객은 ‘아하 그렇구나’하고 그저 전시장을 나올 가능성이 크다.

 

한마디로 전시의 주제가 실체적인 경험으로, 피부로 와닿지 못한다. 그래서 그 미술이 추상적인 느낌으로만 머물게 되며, 붕 떠 있는 느낌이 든다.

 

 

 

<실크로드 프로젝트>


 

그렇다면 어떻게 미술이 다른 분야와 결합하면서도, 관객에게 실체적인 경험을 선사할 수 있을까? 이 고민에 대한 실마리는 지금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리는 기획초대전, 《정재철 : 사랑과 평화》에서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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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는 故 정재철 작가님(1959-2020)의 현장 작업물을 토대로 한다. 아르코미술관 제1, 2전시실에서 열리며, 1전시실에서는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2전시실에서는 <블루오션 프로젝트>를 볼 수 있다. 본 글은 그 중 <실크로드 프로젝트>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실크로드 프로젝트>는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총 3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좌측에서 이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과 시간 순서대로 현장 작업을 살펴볼 수 있다. 2004년 작가는 서울에서 출발하여 중국, 파키스탄, 인도, 네팔 국가의 22개의 지점을 거쳐 현수막을 전달한다. 이때 현수막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현수막이다.


실제 전시장에 있는 현수막에는 “나이트 댄스, 검색, 새벽반, 초보반, 째즈 댄스”라는 글귀가 강렬한 고딕 서체로 적혀있다. 작가는 각 나라의 현지 언어로 번역된 안내문과 이 폐현수막을 전달하고 이후 다시 이곳에 재방문하는 형식을 취한다. 2차로 폐현수막으로 그늘을 만드는 뉴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실시했고 3차에서는 현지에서 자라나는 프로젝트의 과정을 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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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철, 〈설치〉, 2008 추정, 폐현수막, 천 등, 190×200cm

정재철, 〈설치〉, 연도미상, 폐현수막, 천 등, 120×120cm

(출처 : 아르코미술관 공식 홈페이지) 


 

우측 벽에는 세계 각지에서 정재철에게 보낸 편지와 엽서로 가득하다. 특히 ‘후지모토 마리코’라는 성함을 가진 분의 손편지에는 서툴더라도 우리말로 꾹꾹 눌러쓴 정성이 엿보인다. 그들의 편지를 읽다 보면 실크로드 프로젝트 동안 작가의 행보가 예상이 간다. 프로젝트에 있어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도,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느껴지는 구간이다. 이렇게 전시 입구에서는 실크로드 프로젝트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과 사람 냄새나는 편지들이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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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철, 〈광장〉, 2010,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7분 18초

(출처 : 아르코미술관 공식 홈페이지)

 

 

본격적으로 1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앞서 언급했던 ‘나이트클럽’ 폐현수막으로 만들어진 <설치> 작품 아래 <광장>이라는 비디오 작품을 앉아서 볼 수 있다. 이 구도를 통해 관객은 아래 앉아있던 현지인들의 입장이 되어볼 수 있으며 시선의 앞쪽에서는 비디오 안 정재철 작가를 쫓게 된다. 이렇게 작품을 보는 구도를 입체적으로 위치한 점이 인상 깊었다.


<광장> 비디오에서는 특유의 현수막 색인 형광 노란색을 바탕으로 한 폐현수막 정장을 입은 작가를 찾을 수 있다.  캐리어를 끌고 공항을 유유자적하는 그의 모습을 보았을 때, 난 미묘하게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실제 그 주변 사람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비범한 착의에 눈이 갔고 윌리를 찾는 것 마냥, 작가를 찾는 게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의 시도는 한국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다양한 국가에서 시작된다. 주로 많은 이들이 있는 세계 각 광장에서 폐현수막을 걸치고 활보하는데, 영상은 그를 확대하거나 그의 걸음을 쫓지 않는다. 그러나 낯선 이국땅에서 대한민국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는 한 사람을 찾는 일은 쉬운 일이기에, 시력이 나쁘지 않다면 단번에 그를 알아볼 수 있다.

 

 

 

‘폐현수막’이라는 액기스


 

이렇게 현수막은 외적인 특징으로 눈에 잘 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도 꽤 상징적인 속성이 있다. 현수막은 쉽게 전시되고 다시 버려지는데, 어쩌면 이 속성은 현대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내부 모습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스펙터클 사회라는 뭉뚝한 개념 아래 작가는 대한민국의 대내외 속성을 모두 가진 ‘폐현수막’을 이용해 한국인의 느낌을 명확히 전달하고 있다. 그래서 작가가 폐현수막을 가지고 직접 입어보고 전시하고 현지인들과 소통하는 모습은 신선하며 재미있다. 그는 공항에서부터 각 광장으로부터, 자신을 현장화해 그들에게 녹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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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철, 〈1차 실크로드 프로젝트 — 루트맵 드로잉 1〉, 2006(2018년 병풍으로 제작), 장지에 연필, 채색, 248×483cm, (출처 : 아르코미술관 공식 홈페이지)


 

그리고 그의 현장성은 작가가 손수 그린 지도와 빼곡한 글자들로 확인이 가능하다. <1차 실크로드 프로젝트 – 루트맵 드로잉 1>은 병풍으로 그려져 있으며 여정의 경로와 계획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나라별로 정리된 기록 수집 노트도 <실크로드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전시장 중 가운데에 배치되어 있다. 일기부터 감상, 이후의 계획까지 꼼꼼하지만 자유롭게 적힌 이 노트를 손으로 넘겨 읽다 보면 작가와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 들 정도다.


그래서 관객은 이 시간의 흐름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온통 작가의 실천들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야기가 있는 이 기록물에는 현장성과 시간성이 묻어나며 전시장에 있는 관객을 실체적인 경험으로 끌어들인다.

 

 

 

뭉뚝함 속에 날카로움, 그리고 다시 융합


 

다시 처음 물음으로 돌아가 답한다면, 정재철 작가는 어떤 다른 분야와 결합하지 않은 중립의 입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현대사회의 특징 중 하나인 ‘폐현수막’을 입었고, 이는 어쩔 수 없이 그가 속한 사회적 배경이 첨가되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이를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통해 액기스 같이 함축된 우리나라의 한 측면을 낯선 나라와 결부시켜버렸다. 마치 뒤샹의 샘처럼, 달리의 바닷가재 전화기처럼 말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장면이 점차 익숙해 보이는 요소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현대인의 면모를 실체적으로 보여주면서 이질적인 문화와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지를 전달한다.


단 현재 상황으로는 전시장에서 개인당 1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에, 충분히 여유를 두고 하나의 비디오 작품을 끝까지 보기가 어렵다. 이를 고려해 정재철 작가의 유연한 흐름을 유지하되, 프로젝트의 기대효과까지 명시적으로 알 수 있도록 인과 구분이 있었으면 하는 약간의 아쉬움은 남는다.


하지만 뭉뚝한 개념 속 날카로움이 드러나고, 사람 냄새 나는 그의 작품은 관객에게 실체적으로 다가간다. 코로나 시기 여행의 즐거움이 묻어나는 그 흐름을 유유히 전하면서 말이다. 더구나 다소 무모해 보이던 그의 계획이 구체화되는 과정 속 그들이 하나로 융합되는 것을 보면서 예술의 힘도 느낄 수 있다. 추상이 어떻게 현실이 될 수 있는지, 그 과정을 경험하고 싶다면 전시를 권한다.

 

 

* 《정재철 : 사랑과 평화》 도록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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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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