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 그려라. [만화]

존경하는 선생님은 매번 호통을 치며 고함을 질렀다.
글 입력 2021.08.10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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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언제나 무언가를 떠나보낸다.

 

운이 좋다면 떠나보낸 것을 다시 찾으며 '그동안 잘 지냈어?' 살갑게 말을 걸 수 있겠지만, 대부분 떠나간 것들은 다시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면 후회는 언제나 남겨진 사람의 몫이다. 잊고 지냈던 과오를 곱씹고 후회하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다. 그리고는 이제는 떠나버린 상대에게 뒤늦게 용서를 구한다.


떠나보내기 전까지는 그 존재의 중요성을 잊기가 쉽다.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존재는 언제까지고 자신의 옆을 지킬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그 존재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만화 '그리고, 또 그리고'는 일본의 유명 만화 작가 히가시무라 아키코가 자신의 학생 시절을 회고하며 그린 회고록이다. 미야자키시에서 지내던 고3 시절, 그녀는 순정만화가를 꿈꾸며 한껏 부풀어 올라 있었다. 주변에서는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항상 칭찬받으며 자라왔기에 그녀가 생각했던 '유명 만화가의 길'을 언제나 탄탄대로였다. 졸업하고 유명 미술대학에 가서, 곧바로 신예로 소문나는 그런 꽃밭을 꿈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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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런 그녀의 꿈은 미술대학 입시를 위해 화실에 다니게 되며 산산조각이 났다. 잘 그리는 친구들을 향한 질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곳은 소규모의 학생들과 동네 할아버지, 초등학생 아이들까지 다양하게 존재하는 시골 동네의 화실이었다. 그녀를 항상 압박하고, 구박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 화실의 주인인 히다카 선생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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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다카 선생님은 과할 정도로 스파르타였다. 항상 죽도를 들고 다니며 학생들에게 휘둘렀고, 못 그렸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며 학생들을 구박했다. 비단 입시에 놓인 학생들뿐만이 아니었다. 초등학생 아이들은 선생님의 엄함에 눈물을 훌쩍였고, 할아버지는 화실에 나올 때마다 다른 것은 못 그리고 '휴지곽'만 몇 시간씩 그리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반복한 휴지곽 그림에 히다카 선생님은 몇 번이고 엉터리라고 소리 질렀다.


그런 히다카 선생님의 스파르타가 주인공만 빗겨나갈 리는 없었다. 주인공의 그림을 보고 히다카 선생님은 분노했다. 꽃밭에서 머물던 주인공의 허무맹랑한 행복은 그렇게 산산조각이 났다. 입시 시험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선생님은 주인공에게 시험 전 100장을 그리기를 '명령'했다. 그날부터 주인공은 그 이상한 화실에서 매일 그림을 그리게 된다. 선생님의 고함과 분노 속에서 정신없이 흑심과 종이 냄새만이 가득한 곳이었다. 주인공과 히다카 선생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괴팍하고, 성질 더럽고, 섬세함이라곤 모르는 히다카 선생님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너무하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주인공 또한 마찬가지였고, 이 만화를 처음 읽었던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만화는 주인공의 학창 시절, 히다카 선생님이 얼마나 주인공을 지탱해줬는지에 대한 만화다. 만화를 처음 봤을 때는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이렇게 '비호감'으로 시작하는 선생님이 나중에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노인에게 휴지곽만을 그리게 하고, 엉터리라고 고함지르고, 학생들이 열심히 그린 그림을 죽도로 때리고 다니는 이 괴팍함이 어떻게 해야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까? 당혹감 섞인 의문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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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화를 읽을 때, 나는 선생님의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추측했다. 그러나 오히려 히다카 선생님은 그 반대였다. 히다카 선생님은 변화하지 않으셨다. 처음부터 끝까지 옆으로 세어나가는 일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노력할 것은 노력한다. 그럼 언젠가 된다. 그저 그 사실을 믿는,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누구보다 학생들을 믿는 사람이었다.

 

화실에 매일 오는 노인분꼐 매번 휴지곽만 그리게 한 것이 너무하지 않냐는 주인공의 물음에 '괜찮아. 언젠가는 완벽하게 그려낼 수 있으니까. 그때 다른 걸 그리면 돼.' 대답하며, 할 수 있을 때까지 믿고 호통치는 선생님이었으며, 입시에 실패한 주인공에게 한 잔을 주고 '다시 그리자'라고 망설임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주인공은 선생님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게 되며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을 키워나갔고, 그 와중 미대에 합격하여 선생님과 얼싸 안고 기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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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인공이 처음 희망하던 것은 미술이 아닌 만화다. 둘이 멀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가깝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 원치 않는 그림들을 캔버스 위에 그리게 되며 주인공은 대학에 들어가 방황하게 된다. 히다카 선생님의 화실에서 그토록 자주 그렸던 그림도 '고통스럽다'라고 느끼며 괴로워지게 될 만큼 힘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애제자 주인공의 그런 고민을 알 리가 없었다. 히다카 선생님은 주인공에게 자신과 이인전을 열 것을 제안하게 된다. 제안이라고 하기에는 히다카 선생님답게 이미 여는 것을 확정 짓고 한 말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선생님의 말씀에 주인공은 기쁘기보다도 당혹스러웠다. 주인공은 '만화를 그리고 싶다'라는 말에 선생님이 노하실까 두려워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지 않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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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작된 '미술과 선생님'에 대한 주인공의 갈등은 계속되게 된다.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 미술과 멀어지고 싶어 하는 주인공과 그런 주인공에게 '그저 그려라' 이야기하는 올곧은 선생님. 주인공은 점차 선생님을 피하게 되었다.

 

너무할 정도로 선생님의 마음을 살피지 못했다. 주인공의 대학 생활을 듣기 위해 먼 지역에서 술병을 들고 찾아온 선생님이 혼자 지내게 한 뒤 남자친구를 찾아가기도 하고, 슬럼프에 빠진 주인공을 되살리기 위해 단숨에 기차를 타고 올라온 선생님을 보면서도 계속 피하게 되었다.


주인공은 선생님을 바라볼 수 없었다. 선생님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게 되니까.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은 자신과 같이 슬럼프라는 이름 하에 놀기를 좋아하는 친구들이었고, 주변 사람들은 '힘들면 그만해도 괜찮아'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선생님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과거처럼 올곧고, 옆으로 세어나가는 법을 모르고, 언제나 '괜찮으니까 그려!' 호통쳤다. 그런 선생님을 주인공은 도저히 제대로 마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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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다카 선생님은 갑작스러운 암으로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변하지 않으셨다. 언제나 우직하게, 스파르타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셨다. 애정어린 호통을 치셨다. 대학을 나오지 못한 당신 대신 주인공이 대학 생활을 하며 미술을 공부하기를 바라셨다. 자신이 차마 얻지 못한 것을 제자들이 얻어내기를 바랐다. 밥 한 끼를 줄 때도 대충하는 법이 없으셨다. 고등어 하나도 예쁜 접시에, 차 하나도 정성껏 우려 자신의 주변인들에게 대접하셨다. 그리고 고함치셨다. '그려라!'


하지만 이제는 모두 떠나간 과거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앞으로 영영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과거.

 

너무한다고만 생각했던 과거의 선생님을 회상하며 작가는 작품 속에서 계속 그러한 과거를 그리워하고, 후회하고,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선생님을 일부러 피했던 사실에 대해. 자신의 게으르고 엄살 심했던 과거도, 애정이 어린 선생님에게 모질게 굴었던 과거도, 선생님의 감정을 차마 헤아리지 못하고 상처를 주었던 과거도 이제는 떠났다.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요.' 이토록 허무한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본다.

 

그리고 선생님을 향한 존경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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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솔직하게 자신의 과거를 그려냈고, 그렇게 그려지는 주인공에게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깊이 이입하게 된다. 작품을 읽으며 독자들은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 히다카 선생님에게서 함께 힘을 얻게 된다.

 

바르고, 정갈하고, 올곧고, 우직했던 선생님.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지만, 근처에서 히다카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같은 착각이 든다. 괜찮아. 그냥 앞으로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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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히다카 선생님(본명 히오카 켄조)의

전시회와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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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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