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알 수 없는 여행이라 - 계획대로 될 리 없음!

글 입력 2021.07.17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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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초부터 인터넷으로 ‘MBTI 테스트’를 하는 것이 SNS에서 유행처럼 번졌다. 나는 이 테스트를 하기 전부터 대충 결과를 짐작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결과를 알려주는 모니터 속에는 내가 예상했던 4개의 알파벳과 함께 성격을 분석하는 글이 한가득 적혀있었다.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약간 탐탁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70억 인류를 구성하는 다양한 개인의 성정을 16개의 틀로 나눌 수 있단 말인가! 감히 나를 분석하려 들다니, 따위의 생각이 들어 앞으로 다시는 MBTI 테스트에 관심 두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당연히 거짓말이다. 나는 친구들을 만나면 능청맞게 MBTI 유형을 물어보았고, 서로의 결과를 공유하며 수다를 떨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이미 나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속이 보이는 사람이었나 싶어 4개의 알파벳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알파벳은 ‘P’였다. 자유분방하고, 즉흥적이며 ‘계획성’이 없는 성격을 포괄하는 유형이다.


인정한다. 계획 없이 살던 지난날은 아주 즐거우면서도 벅찼다. 요리사의 길을 걷다가, 이과생이 되어 공대에 가고, 예술을 하겠다면서 연극 연출을 배웠던 과거가 뇌리에 스쳤다.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에는 (여행을 가지도 못하므로) 마침 잘 되었다 싶어서 본가로 이사한 뒤 조용히 자아 성찰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그러던 와중에 7월 초에 한 권의 여행 에세이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여행할 수 없는 시대의 여행 에세이라니! 독특하고 흥미로웠다. 심지어 에세이의 제목은 『계획대로 될 리 없음!』이란다. 무계획으로 대표되는 ‘P’형 인간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리 없다.


 

계획대로 될 리 없음!_표지.jpg

 


『계획대로 될 리 없음!』은 『취야진담』, 『무대에 서지 않지만 배우입니다』 등을 집필하며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켜 온 윤수훈 작가의 신간이다. SNS를 통해 일상의 생각과 감정을 나누며 따뜻한 마음을 글과 그림으로 그려내는 윤수훈 작가는 여행지에서의 낯선 순간 앞에서 영감을 얻는 여행 예찬자다.

 

나 또한 윤수훈 작가가 집필한 『무대에 서지 않지만 배우입니다』를 읽은 적이 있다. 그가 특유의 섬세한 표현으로 깊은 글맛을 우려내는 작가라는 걸 알고 있기에, 이번 에세이에서는 어떤 글로써 자신만의 여행 이야기를 그려낼지 기대되었다.


 

지난 여행 이야기를 굳이 꺼낸 이유는, 지금의 상황이 이때의 기억과 참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속수무책으로 틀어진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오늘을 살아간다. 살아간 오늘로 내일을 그려간다. 어떤 내일이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르기에 걷는다. 망했음에도 걸어야만 했던 나의 지난 여행처럼.


- 13~14쪽

 

 

 

이렇게 망하는 건 계획에 없었는데



책의 서두에는 20대 초반의 윤수훈 작가가 유럽 여행을 계획하며 대형마트에서 6개월간 돈가스와 떡갈비를 팔아 여행 경비를 모으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험난한 세상에 던져져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 젊은이의 이야기는 익숙한 소재지만, 이 평범한 이야기에는 이후의 여행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리라는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


좋은 에세이는 ‘나도’로 시작하는 독자의 피드백을 이끈다. ‘나도 종일 아르바이트를 하며 꽤 고생했지’라든지, ‘나도 감정이 앞서 엉뚱한 일을 벌여 곤욕을 치렀지’와 같은 공감과 성찰은 작가와 독자의 공통분모가 되어 독서의 몰입도를 높인다.


한껏 몰입하며 작가의 여행이 멋들어지게 시작되기를 기다렸건만. 이 여행, 뭔가 이상하다. 열차 티켓을 잘못 예약하여 10만 원 상당의 돈을 잃고, 출국 전에는 지갑을 잃어버려 카드를 다시 발급받기에 이른다.


설마 더한 고난이 있을까 싶었는데, 화룡점정으로 출국 당일에는 눈앞에서 비행기를 놓치고 만다. 의도치 않게 극도의 무계획 상태에 놓여버린 작가의 수난기를 읽으며, 이건 ‘P’형 인간인 나조차도 견디기 힘든 ‘계획 없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상하게 설레었다. 불안했지만 기대되기도 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이 상황이 재밌었다. 드디어 미친 건가. 처음이란 두려움과 설렘의 끝없는 교집합. 유럽도 처음이지만 비행기를 놓친 상황도 처음. 이 ‘처음’으로부터 느껴지는 묘한 설렘에 흥분하고 있는 나였다. 변태 같긴 해도 불행 중 유일하게 다행인 일이었다.


도달한 결론은 하나. 더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이 여행은 가야만 했다. 티끌만 하게나마 존재하는 설렘의 멱살을 잡고라도.


- 69쪽

 

 

아직 여행을 떠나지도 않았는데 재미있다. 여행 에세이 속의 작가가 고난을 겪으면 읽는 이는 은근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마련이다. 그리고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 치 앞도 모르는 재밌는 상황을 지켜보는 독자 또한 묘한 설렘의 멱살을 잡을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된다.

 

 


알 수 없는 여행이라 더욱 아름답죠



내가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가 이문세의 ‘알 수 없는 인생’이다. 가끔 도무지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세상에 지쳐서 이 노래를 들으면, 알 수 없는 인생이라서 더욱 아름답다는 노랫말에 괜스레 위로를 받게 된다.


이 책에서 ‘망했다’라는 단상과 함께 시작된 작가의 유럽 여행도 어찌 보면 우리의 인생과 비슷하다. 하긴 많은 이들이 여행을 인생에 비유하지만, 나는 예전에는 그 비유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았다. 나에게 여행이란 주어진 인생을 떠나 도피할 수 있는 휴식처였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을 떠날 때면 완벽한 ‘J’형 인간이 되어 평소보다 까다롭게 계획과 일정을 잡아두었다. 하지만 그토록 완벽을 추구했던 나의 여행 또한 허점투성이였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또 다른 사람에게 치유를 받고, 예상치 못한 일을 겪으며 괜한 고생을 하게 되는 일정은 나의 계획표에 없었다. 여행길에는 완벽한 예측불허만이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출발 비행기를 놓침으로써 첫 단추부터 제대로 끼우지 못한 윤수훈 작가의 여행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인간의 추한 모습을 마주하며, 낯선 이의 상냥함으로부터 지구촌 식구의 애정 어린 마음씨를 느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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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작가는 자신이 거쳐온 크고 작은 사건을 그림과 함께 흥미롭게 풀어내며 독자의 읽는 재미를 놓치지 않는다. 풍부한 표현과 훌륭한 인물 묘사가 적절히 버무려진 글을 가만히 읽다 보면 작가가 겪은 일들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내가 가보지 않았던 유럽 거리의 풍경과 음식 내음,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울리는 것처럼 생생하다. 이것이 여행 에세이의 묘미다.


정성껏 쓰인 글을 읽으면 글쓴이와 깊이 있게 소통한다는 기분이 든다. 얼핏 보면 조용하고 느긋하지만, 야심을 갖고 목표를 향해 분투할 줄 아는 사람. 낭만과 여유를 잃지 않고 복잡다단한 여행의 즐거움을 진솔하게 전달하는 사람. 내가 글로 마주한 윤수훈 작가는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니 자신의 경험을 글로써 녹여내야 하는 에세이에서 빛을 발한다.


누군가의 소중한 경험을 글로써 함께 나누는 것은 그 이상으로 소중하고 값진 일이다. 시청각적으로 뛰어난 현장성을 가지는 자료를 본다고 해도, 인간의 경험을 온전히 누리는 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유튜브의 여행 브이로그를 보아도 모니터 너머의 여행자가 느끼는 찰나의 감정과 생경한 느낌을 백 퍼센트 공유할 수는 없다.


윤수훈 작가는 글에만 담을 수 있는 경험을 듬뿍 담아냈다. 독자는 다음 장을 넘기기까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작가 또한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 상태로 여행길에 몸을 던진다.


작가가 노란 일기장에 공들여 기록했던 여행 이야기들은 팬데믹을 맞아 잠에서 깨어났고, 이제는 활자 위에 넘실댄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단순히 여행의 현장을 체험하는 것을 넘어, 여행을 바라보는 작가의 오롯한 마음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처음을 바라보며, ‘다 된다’라는 마음 하나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생과 여행이 같은 종류의 개념이라면 굳이 여행을 택할 이유가 없는데, 여행길이 언제나 안온한 휴식처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을 텐데 말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처음’에 있다. 여행지에 간다는 것은 출발선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는 것이다. 마치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가 된 것처럼, 새로운 시작을 맞이할 수 있다. 예상치 못한 일로 일정이 틀어져도 괜찮다. 망한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괜찮다. 낯선 곳에서 나의 힘으로 처음을 개척했음에 충분하다.


『계획대로 될 리 없음!』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여행 계획이 무산되자 8년 전의 여행을 떠올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 여행은 처음이 주는 설렘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행 자금을 모으는 것도 처음, 비행기를 놓치는 것도 처음, 여행지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경험을 하는 것도, 기대 이상의 짜릿함을 느끼는 것도 모두 처음이다. (이쯤 되면 처음이라는 단어가 무척 어색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나는 책을 읽으며 작가의 다사다난한 여행 이야기로부터 나만이 가지고 있는 처음을 떠올렸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나에게도 움직일 힘이 있다는 것을 되새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에 아주 감사한다.


 

준비를 해도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 하는데, 하물며 여행이라고 다르겠는가. 이곳에 와서 가장 후회하는 것을 하나 꼽으라면, ‘너무 많이 준비하고 왔다’는 것이다. 내가 준비했어야 하는 것은 딱 한 가지였다. ‘다 된다’는 마음 하나.

 

- 200~201쪽

 

 

자, 그럼 이제 우리도 ‘다 된다’라는 마음 하나만 준비하자. 다 된다. 다 될 수 있다. 다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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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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