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햇빛을 따라간 플라뇌르, 요시고 사진전 [미술/전시]

글 입력 2021.07.02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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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여행을 갈 수 있던 때의 일이다. 여름을 피해 도착했지만, 10월의 바르셀로나는 퍽퍽한 더위로 가득했다. 이상고온이라고 했다. 내리쬐는 뜨거운 햇볕에 손차양을 만들었다. 식을 줄 모르는 태양을 머리에 이고, 정처 없이 터벅터벅 걸었다. 건너편에 위치한 골목길이 그늘 사이에 파묻혀 있는 것이 보였다.


가본 길이었기에 그 사이로 인적이 드문 분수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옆의 모퉁이를 돌면 작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가 있다. 평범한 골목길인데 자꾸 시선이 가는 모양새에 결국 목에 건 카메라를 들었다. 카메라의 눈이 깜빡였다. 그늘 사이 묻은 햇빛의 부스러기가 사진으로 남았다.


무표정한 도시로 느껴졌던 바르셀로나에 정을 붙이게 한 것은 햇빛과, 햇빛을 닮은 사람들의 온기였다. 언제고 다시 돌아오겠단 다짐으로 울렁이는 마지막 밤을 보냈던 것이 기억난다. 서촌에서 열린 이 전시에서 그때를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는데, 빛과 그림자를 사랑하는 스페인의 사진작가 요시고가 전시의 초입부터 소탈한 모습으로 반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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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고는 산 세바스티안의 바다에서 자라, 지금은 바르셀로나의 햇빛을 만끽하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사진작가다. 본명은 호세 하비에르 세라노(Jose Jaiver Serrano).


인스타그램에서 인기를 끌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요시고의 사진들은 대칭적인 구도 안에 정제된 특유의 감성으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평범한 건물에 햇빛이 남기고 간 색감을 포착하고, 익숙하거나 낯선 곳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을 기억한다.

 

그라운드시소의 원형 건물을 따라 걷다 보면 그의 호흡에 맞춰 잠시 플라뇌르(한가롭게 배회하는 산책자)가 되는 것 같다. 하얀 커튼이 살랑이는 사이로 보이는 중정이 분위기를 돋운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이번 개인전 《요시고 사진전 ; 따뜻한 휴일의 기록》(2021.06.23-2021.12.05, @그라운드시소 서촌)은 빛의 일렁임을 쫓는 요시고의 발걸음을 따라 건축, 다큐멘터리, 풍경이라는 세 섹션으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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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llorca, Spain (2020) | Miami, Florida, USA (2019)

Barcelona, Spain (2020) | Benidorm, Alicate, Spain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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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 Manga, Murcia, Spain (2018)

 

 
"모르는 곳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는 것은 매우 자극적인 일이에요. (···) 그래서 촬영지를 방문하면 길 잃은 상태에서 낯선 지역과 공간 찾기를 좋아합니다. 그곳의 `플라뇌르`가 되려고 하는 것이죠."
 


확실히 전시장에 걸쳐진 여러 공간의 사진들은 플라뇌르의 결과물 같다. 익숙하게 지나칠 장면들을 의도적으로 연출한 순간처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속해 있되 속해 있지 않은 자의 세심한 시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처음 간 여행지에서 평범한 모든 순간에 감명받는 여행자처럼. 그의 사진에서는 삶에 치여 무심코 스치는 건물들마저 아름답다.


완벽히 찍어낸 대칭의 건축물에서 인간이 저도 모르게 만들어 놓은 변주를 구경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열고 닫힌 창문, 빨래가 널린, 의자가 놓인, 아무것도 없는 베란다가 오밀조밀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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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ami, Florida, USA (2019) 

 

 

요시고의 영감은 빛에서 출발한다. 건물을 신비롭게 감싸는 빛을 발견하기를 기다리며 이곳저곳 헤맨다. 한 번 지나간 아름다움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어떤 각도로 햇빛이 비칠지까지 계산하고 마법의 순간을 기다린다고 한다. 인간이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낸 인공적인 빛들은 태초의 빛을 절대 이길 수 없나 보다. 햇빛은 하루를 쭉 지나며 지구라는 거대한 세트장을 비추는 조명이 된다. 그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인상을 담는 것이 바로 요시고의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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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양지나 여행지에서 만나는 빛의 색감은 더 발랄하다. 요시고가 플로리다, 부다페스트, 일본, 두바이를 여행하며 찍은 사진은 그의 기억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마음까지 청량해지는 낮의 잔상 사이 눈에 띄는 것은 일본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유일하게 어스름한 분위기의 작업인데, 야간을 잘 찍지 않는 요시고에게도 예상치 못한 경험이었다고 한다. 지친 하루의 끝을 함께 하는 밤. 소란스러우면서도 차분하게 각자의 사연이 맴도는 길거리 식당들. 불투명한 유리에 가린 감정이 잠시의 인상으로 떠올랐다 사라진다.


다소 인스타그래머블한 전시로만 느껴질 수 있는 아쉬움은 작가의 이야기로 채웠다. 작품과 관련한 일화나 그의 생각들이 곳곳에 남아있어 누군가의 여행기를 따라가는 느낌이었다. 두바이 사진에서는 모래를 실제로 채워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무언가 심각하게 전하려는 메시지 없이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전시도 필요한 법이다. 탁 트인 숨으로 언제 떠났는지 기억나지 않는 여행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공간이 좁고 사람이 많아 여유 있는 관람이 어렵다는 점이 아쉬웠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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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n Sebastian, Spain (2020)

 

 

바다의 곁에서 자라며 오래 지켜보았기 때문인지, 유독 바다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요시고만의 감성이 물씬 풍긴다. 그리고 그의 바다 풍경엔 사람이 있다. 바다에 비집고 들어간 사람들의 모습은 입체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요시고의 `Animal Turista(동물적 관광객)`은 자연경관을 해치는 관광객에 대한 고민을 담은 프로젝트다. 그는 관광객들이 `자연환경의 질감과 색상을 침략`한다고 생각해 풍경과의 균형을 맞추려 했다고 한다. 그래서 먼 곳에서 `에메랄드빛 바다와 관광객의 피부색이 모래에 가까워`지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렇게 탄생한 사진 속에서 사람은 더 이상 침략자 같지 않다.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했던 것처럼 적당하게 흐려진 존재감을 뽐낸다. 파도의 흔적이 한 겹씩 덧씌워지는 궤적을 따라 걷고 있는 사람들. 물결의 엉킨 그림자 사이를 고고히 헤엄치는 사람. 고르게 평평해진 자연과 사람의 이미지는 어느새 찬란한 여백을 갖고 있다. 호아킨 소로야가 그렸던 여느 여름날의 회화가 떠오를 정도로 재현 이상의 인상을 주는 듯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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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가만 묻어나오는 햇빛의 흔적을 따라 걷다 보면 파도가 치는 영상과 함께 요시고가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에 도착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진은 예술 중에서도 아주 드물게 타고난 재능이 필요 없는 분야입니다. 요즘은 카메라를 가진 모두가 작가죠."


어쩌면 전시를 보는 내내 감명받은 사람과,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사람 모두를 당황하게 하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전시회를 열 정도로 유명한 이 사진작가는 털털하게 웃으며 자신도 그저 쭉 해왔을 뿐이라고 한다. 사진을 사랑하고 멈추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미래의 사진작가들을 격려한다.


요시고라는 이름은 계속 나아간다는 뜻의 스페인어 Yo sigo에서 따왔다고 한다. 사진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 아버지가 선물한 시에 쓰인 문장이었다.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 응원을 입고 빛을 따라 계속 나아가고 있다. 가끔은 알지 못하는 곳에서 헤매고 생각지 못한 이유로 발이 묶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가, 혹은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부를 때 다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당장 어딘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씩 매일 같이 물결을 일으키다 보면 큰 파도가 되어 되돌아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지칠 때는 오늘처럼 한가하게 햇살을 즐기는 플라뇌르가 되기도 하면서.


YO SIGO,

   YO SIGO.

 

 

[최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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