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시대를 관통하는 상실과 치유, 연극 '새들의 무덤'

삶 가운데 수많은 죽음, 그럼에도 굴러가는 삶의 수레바퀴
글 입력 2021.06.15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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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이 시작하면 무대 위에는 덩그러니 바다 저편에 놓인 ‘새섬’과 바람에 힘없이 굴러다니는 낙엽들이 보인다. 배우들의 몸짓으로 표현되는 이들 사이로 한 남자가 등장한다. ‘오루’라고 불리는 이 남자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얼굴로 정처 없이 무대를 떠돈다.

 

그러다 어린 새 한 마리를 만나게 된다. 역시 배우가 직접 표현하는 이 새는, 오루의 과거 속으로 오루를 이끈다.

 

 

 

교차되는 삶과 죽음의 이미지


 

연극 <새들의 무덤>은 삶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도사리는 죽음, 그리고 죽음 가운데 끈질기게 나아가는 삶을 그려낸다.

 

관객이 엿보게 되는 오루의 삶에는 끊임없이 ‘죽음’이 오고 간다. 고작 다섯 살의 나이에 마주한 부모의 죽음, 고향 마을 사람들의 죽음, 그리고 딸의 죽음까지 오루를 찾는다. 뿐만 아니다. 살 곳을 잃은 사람들과 일할 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오루의 삶을 맴돈다. 오래 지켜온 공동체가 해체되고, 공동체 의식 역시 흩어지는 것 또한 다른 의미의 죽음일 테다. 이렇듯 그의 인생을 돌이키는 매 장면마다, 누군가의 죽음이 있다.


그래서인지 극에는 죽음을 상징하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우선, 바다가 있다. 바다는 오루의 부모와 이웃들, 그리고 딸까지 집어삼킨 존재다. 바다 저편에서 오루와 마을 사람들을 오롯이 바라보고 있는 새섬 역시 산 자들은 발을 디딜 수 없는 땅으로 묘사된다.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몸과 넋이 담겨있는 바다와 죽어야 갈 수 있다는 새섬이 산 자들에게 가져다주는 고통과 절망은 극 내내 파도처럼 넘실댄다. 극의 가장 첫 장면에 등장하는 낙엽들 역시 사그라드는 생명력을 뜻한다.


그러나, ‘새들의 무덤’은 죽음을 보여주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극은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듯, 죽음이 있으면 생명은 다시 피어난다고 이야기한다. 오루의 고향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바다는, 오랜 시간 그들에게 삶의 터전으로 기능해온 공간이다. 새섬 또한 때로는 마을 사람들의 소망과 같은 존재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죽은 자들이 새섬으로 떠난다면, 산 자들의 공간에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고 자라난다. 오루가 딸 쌍둥이를 얻고, 새로 심은 편백나무가 쑥쑥 크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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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을 이끌어가는 존재, ‘새’


 

죽음의 절망과 삶의 희망, 그와 더불어 극 전체를 관통하는 또 다른 존재는 바로 ‘새’다. 새는 오루를 과거의 순간들로 이끄는 신비로운 인도자의 역할을 하지만,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오루의 곁을 맴도는 수호자의 모습 또한 보여준다. 극이 흘러가면서 새는 오루에게 소중한 존재이자, 오루를 소중히 여기는 존재임이 조금씩 드러난다.


오루의 모든 과거 여행이 끝난 후 괴로움에 웅크려 앉은 오루에게, 세상을 떠난 딸 도손은 생전의 모습을 한 채 오루에게 말없이 다가가다 멈춰 서 오루가 선물한 저고리를 입는다. 쌍둥이일 줄 모르고 오루가 배냇저고리를 한 벌만 지었던 탓에 갓난아기 도손에게는 입혀주지 못했기에, 하얀 날개를 달아 새롭게 지어준 옷이다. 도손이 그 옷을 입은 순간, 도손은 새가 된다. 내내 오루의 곁을 맴돌았던 바로 그 새이다.


만지고 싶지만 만질 수 없고, 안고 싶지만 안을 수 없으며, 함께 행복했던 추억도 이제는 오루 혼자서 반추해볼 수만 있을 뿐 다시금 함께할 수는 없다는 듯 새가 된 딸은 오루를 떠나 날아가버리지만, 오루에게 분명한 희망을 남긴다.


극의 시작과 얼핏 똑같아 보이는 극의 마지막은, 새를 따라가는 대신 새가 있어야 할 곳으로 새를 보내주는 오루의 모습을 계기로 변화한다. 새섬과 낙엽들은 생명력 가득한 새들이 되어 훨훨 날아오르고, 그 가운데 오루는 서글프지만 후련하게 서서 딸의 이름을 한 번 크게 부른다. 그 이름이 더 이상 절망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듯이.


이렇듯 이 극에서 ‘새’라는 존재는 다양한 함의를 품고 있다. ‘새’는 소중한 이를 더는 볼 수 없다는 절망, 소중한 이와의 기억이 품고 있는 희망과 행복, 혹은 소중한 이 그 자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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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상실, 그를 안은 삶을 향한 위로


흔히들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의 앞뒷면이라고 한다. 그만큼 죽음이란 삶에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는 존재란 뜻일 테다. 그러나 산 자에게 죽음이란 것은 우선 무섭고, 또 무겁다. 죽음이 삶에 남기고 가는 것은 상실과 부재, 그에 따른 고통과 괴로움이 먼저인 탓이다.


그렇지만 결국 삶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품고 이어진다. 탄생이 있으면 소멸이 있다. 태어남이 있으면 스러짐이 있다. 삶은 죽음을 품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밥을 먹으며 그렇게 이어진다. 살아간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지만, 산 자의 입장에서는 역설적인 순환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순환’이라는 것은, 끝이 없다는 뜻이다. 절망이 있으면 희망이 있고, 희망 뒤엔 다시금 절망이 찾아들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삶이라는 것을, 이 연극은 무대를 통해 말하고 있다. 절망이 자주 찾아들지언정 영원하지 않으며, 절망과 희망은 결국 삶과 죽음처럼 종이 한 장의 앞뒷면일 뿐이라는 위로를 전한다.


더불어 이 극은 한국 근현대사를 꿰뚫는 오루라는 인물의 삶을 통해, 개인의 삶을 넘어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의 상실과 치유를 논한다. 극을 관람하다 보면 새삼 대한민국의 역사도 수많은 상실과 절망으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연극은 그러한 역사에게, 그리고 그 역사를 살아온 수많은 삶들에게 삶과 죽음은 특별한 비극도 희극도 아닌 평범한 일상이므로 신명 나게 한 판 놀듯이 살아보자고 말한다. 그 어떤 비극적인 장면일지라도 마지막은 항상 무대 위의 모든 이들이 신명 나게 춤판을 벌이며 무대 뒤로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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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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