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술은 나의 쉬운 가치판단을 부끄럽게 만든다. [사람]

예술의 의미
글 입력 2021.06.07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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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나는 뭔가를 좋아한다고 남들에게 단언하는 것을 주저한다. 사실 뭔가를 단언하는 것 자체를 주저한다. 남들의 쉬운 가치판단 속에 느껴지는 단언하는 투에 가끔 혐오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의 잣대를 세상에서 가장 공명정대하고 깨끗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한 명 있다.

 

고등학생 때 정규 수업을 마치고 전공수업을 듣기 위해 배정된 실기 반에 갔었다. 나는 서양화반이었다. 그때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선생이 나의 담당이었는데, 그 선생님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수채화를 하고 물통을 치우지 않고 가버려서’라고 친구에게 전해 들었다. 그 선생은 그 이후에도 자신들이 좋아하는 몇몇 아이들에게 나의 험담을 하고 다녔다. 왜 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녀와 교류를 별로 한적도 없고, 그녀가 나의 그림을 봐준 적도 없기 때문에 왜 나를 그렇게까지 미워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정말 물통을 한 번 안 치우고 갔다고?) 실상 억울하다기 보단, 놀라웠다. 나와 나이차가 30살은 더 나는 여자가 십 대 아이들에게 십 대 여고생의 흉을 본다는 것이. 어쨌든 그녀와 나는 서로 정말 맞지 않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던 것도 같다. 나는 선생에게 아첨하지 않았고 미술학원 원장 선생이 말한 것처럼 ‘여고생처럼’ 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우리 반에서 가장 예쁜 여학생인 지금은 유명한 연예인이 된 (그녀의 얼굴을 전광판에서 봤을 땐 조금 놀랐다.) g라는 학생을 애정 했고, 그 학생에게만 그림 시범을 해주곤 했다. 나와 친구는 전공시간에 되면 자유시간을 가진 것 마냥 떠들고 영화얘기를 해서 불만은 없었다.

 

내가 그녀에게 대해 특별히 어떤 악감정을 가지기에 그녀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사람을 어떤 부류로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이를 만날 때. 그녀가 이상하게도 머릿속에서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나는 사람을 분류하는 사람들 자체를 싫어한다고 했는데, 사실 이런 생각 자체도 사람을 분류하고 나의 가치판단으로 특정하는 것이기에, 모순된다고 여길지 모른다. 다만 나는 그녀 안에 있는 두려움이 사람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강박적으로 모든 것을 정의 내리려 하는, 어떤 경향성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나는 내가 본, 경험한 그녀의 일면만을 쓰는 것이다.

 

그녀가 나를 싫어했던 이유는 그녀가 판단하는 인간 부류의 부정적인 쪽에 내가 몇몇 기준들에 부합하기 때문일 것이리라. 나는 학교에서 제공하는 정규시간(수학, 국어, 사회탐구 같은 과목들)외의 전공수업에 굉장히 회의적이었다. 학교 실기 선생 전체의 실력은 일단 너무 시대에 뒤떨어졌거니와 그림에 대해 연구하려는 자세가 전혀 없었다 (모두라고 말하긴 힘들겠으나). 가장 문제적인 것은 수업시간에 아이들에 대한 통제가 전혀 안되었다. 그곳은 거의 아이들이 잡담하고 떠드는 공간이라 봐도 무방했다. 나는 그런 식의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학교 수업시간을 빠지고 엄마가 등록해준 학원에 가서 그림을 그렸다. 그곳에는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들과 선배들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떠들어대지 않았고 다들 매우 진지했고 그림에 대해서 열정적이었으며 (비록 입시 그림이긴 했으나) 그림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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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당연히 학교 정규 교육을 소홀히 하고, 거의 경쟁적으로 앞다투어 뛰어드는 뜨거운 사교육 유행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눈 밖에 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애정 하는 g라는 제자 옆에서 시범을 보이면서 떠들어댔는데 보통 그 내용은 남을 험담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이 세상 자체를 싫어한다고 생각할 만하게 싫어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 그녀에게 세상이 사과해야 할 정도였다. 그녀가 뭔가를 좋아한다고 말한 것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왜 이런 끔찍한 세상에 그녀를 놓아둔 건지 신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어느 날 그녀는 아주 자신하는 투로 자신은 이런 종류의 인간에 대해 아주 잘 안다면서 자신이 맞선을 본 남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의 특징에 대해 세세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녀의 말을 듣다 보면 (그녀의 말투는 아주 점잖고, 지적으로 들렸으므로 그 내용을 빼놓고 듣는다면 아주 사려 깊고 다정한 평범한 선생에 지나지 않았다.) 저절로 설득이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항상 말을 시작할 때 ‘그런 사람들이 있어..’ 하고 그 인간을 자신이 설정한 특정 부류에 담아 놓고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곤 그 사람이 자신에게 얼마나 형편없이 굴었는지, 그의 매너는 얼마나 저열했고 치아는 울퉁불퉁했고 땀은 얼마나 흘려댔는지, 듣고 있는 내가 그녀에게 연민을 느낄 정도로 아주 침착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나도 아마 그녀가 싫어하는 어떤 부류의 인간이었 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에게 나 자신을 항변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와 깊게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다! 실상, 그녀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쉽게 뭔가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왜냐면 사람은 정의 내려지기 전의 유예 상태에 대해 막연한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것을 정의 내리다 보면 과연 세상은 더 나아지는 것일까? 결론 내린다는 것은 그것을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런 점에서 예술이 하는 일을 경외한다. 예술은 이기적인 나를, 생각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나를 남의 인생에 귀 기울이게 만든다. 귀 기울이게 만드는 것은 ‘이야기’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마따나, 우리 모두는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하는 특성을 다들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세계 속으로 빠지는 데는 어느 정도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집중을 해야만 한다. 그렇게 이야기에 귀 기울임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인간에 대해, 어느 정도의 타협과,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비판적 상태에서 벗어나 보류의 상태에 진입하게 된다. 나에게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행위, 그러니까 문학을 읽고, 전시를 보고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쉽게 단정 짓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확실히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든다.


나의 좋아하지 않는 특성 중 하나는 대면하기 전에 고통을 미리 예견하고 그것을 회피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처음 경험하는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그러니까 내가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그런 상태에 대한 공포, 미지에 대한 공포다. 발생할 모든 잠재적인 최악의 시나리오를 머릿속에서 계속 떠올린다. 나는 현실에서 한 발짝 물러나지 않고는 너무나 고통스러워진다. 현실세계를 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현실을 투영하는 가상의 세계에서도 그렇다. 날것을 그대로를 보는 것보단, 그 앞에 나를 보호해주는 이야기라는 막을 입히는 것이 편안하다. 일종의 완충지대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나와는 상관없는 연예인들에 관한 기사에 달린 악플을 보면 나의 정신건강이 안 좋아짐을 느끼고, 너무 폭력적이고 현실적인 영화를 보면 밤에 잠을 이루기 힘들다. 이를테면 ‘한국형 누아르’ ‘한국형 신파’에서 구역질을 느낀다. 그들은 서사가 아닌, 너무 현실적이고 폭력적인 묘사로 현실을 그려낸다. 마치 소리를 질러야만 상대가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다는 듯이. 조용하게 설득하는 것은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물론 그들의 통속성과 신파 앞에서 나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데 그런 억지스러운 눈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당장에 아무 다큐멘터리와 뉴스만 봐도 눈물 나오게 하는 일들이 널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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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이야기들은 허구이기도 하거니와 그 알레고리에서 직접적으로 상처를 받지 않으면서도 현실의 폭력을 더 날카롭게 자각하고, 그 안에서 일말의 희망, 상상할 여지를 내게 주기에 나는 그들을 안심하고 볼 수 있다. 예컨대 독자의 상상의 여지를 전혀 남겨두지 않는, 모든 것을 작가가 설명하는 소설에서, 특정 감상으로 끌고 가려는 느낌을 받으면 나는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작가 남겨놓은 상상의 공간에, 무한한 평행우주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 좋다.

 

이런 경향 때문에 나는 서간문도 좋아하지 않고 일기체의 글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현실과 너무 밀접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실제 사건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인터뷰집이나 르포를 찾아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소설을 읽는다면 그것은 특정 소설적 경험을 위한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나는 한국 소설보다도 외국 소설을 더 좋아하는데, 소설적 사건이 한국이 아닌 국가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거리감을 주기 때문인 것 같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현대문학보다는 고전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작가들은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이 많다. 뭔가 모순적이지만, 나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세상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에게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한다는 것은,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기 위한 준비 운동이다.

 

이런 우유부단하고 회피적인 성격에서 가장 답답한 건 나 자신이다. 하지만 내가 나의 스타일을 어떤 것이라고 정의 내리는 순간, 나를 한정시키는 무언가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는 두려움이 있다. 나는 언제나 나의 상태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무언가로 변하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가 최종형의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면 나는 그때 나의 인생은 끝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유예 상태에 있는 인간이다. 하지만 이런 상태가 당연히 영원히 지속될 순 없을 것임을 안다. 곧 인생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고 그때가 되면 나를 확답 지을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유예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나를 유예시키고 싶다. 언젠가 지금의 상태가 나에게 의미 있던 때라고 회상할 날이 올 것이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더 탐구하는 것이, 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러하는지를 고찰하는 것이,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안정감을 위해 어딘가에 속하는 것보다는 덜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정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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