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삶이라는 서핑에 올라타는 법에 대해 - 노력의 기쁨과 슬픔
-
가수 아이유의 앨범 'LILAC'의 수록곡 중에는 어푸(Ah puh)라는 노래가 있다. 바다를 뒤덮는 파도 위에서 서핑하는듯이 시원하고 어택감있는 사운드가 매력적인 곡인데, 다이나믹한 멜로디와 리듬은 청자로 하여금 실제로 바닷물을 타고 서핑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I'm such a good surfer
가라앉지 않기
비틀 비 비틀 거리다가 풍덩 uh
(중략)
제일 높은 파도
올라타타 라차차우아
해일과 함께 사라질 타이밍
그건 내가 골라
무슨 소리 겁이 나기는 재밌지 뭐
어어어 푸푸푸 또
허허허 우우우적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삶도 서핑처럼 재밌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일 높은 파도를 "올라타타 라차차우아", "무슨 소리 겁이 나기는 재밌지 뭐"라는 유쾌한 말을 외치며 오르고 내리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 그런 내가 <노력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책을 접하게 된 것은, 삶이라는 서핑에 올라타는 법에 대하여 보다 더 가볍고 산뜻하게, 그러나 명확하게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망설이지 말고, 일단 시작하자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다름아닌 '회상' 때문이었다. 나는 지나간 일에 대하여 남보다 더 뛰어나게 많은 일들, 자세한 일들을 기억하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인지 10년이 훌쩍 넘은 초등학교 동창회에서도 나만 혼자 추억을 뽑아내는 기계처럼 신나게 옛 과거를 떠들어댔고, 그 끝에는 항상 "너 그런 것까지 어떻게 다 기억해?"라는 놀라움의 탄성이 들리곤 했다. 추억을 언제나 곱씹고 떠올리는 나에겐 놀라운 일이 아닌데 분명 같은 추억을 나눈 타인에게는 생각도 못한, 먼 나라 이웃나라 이야기다.
나는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줄곧 내 생각과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택한 수단이 바로 연필과 종이였다. 연필을 잡고 지나간 과거를 붙잡아 다시 현재로 가져오는 순간들이 참 많았다. 그런 행위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에디터로서 회상을 하며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역사들이 나에게는 '글쓰기'라는 취미이자 특기를 남겨주기도 하였지만, 지나치게 생각에 깊이 잠겨있는 고통을 주기도 하였다. 그 고통은 때로는 앞으로 전진할 수 없는 장애물이 되었고, 살아가는 데 있어 이런 '주저함'이 얼마나 큰 독이 되는지 깨달았다. 물론 모든 경험으로부터 배움을 얻겠다는 열망이 있기에, 어떤 순간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다. 허나 분명한 것은 생각에 머무를뿐 행동하지 않는다면 제자리에 머물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노력의 기쁨과 슬픔>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저자는 '우리는 망설이기 때문에 길을 잃는다'는 소제목으로 '시작하기'에 대해서 설명했다.
행동에 나설 때 모든 생각을 포기해버릴 필요는 없지만, 오로지 행동이라는 범위 안에서만, 즉 행동에 의해서, 그리고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만 생각을 해야 한다. 또 생각은 최대한 가벼워야 하며, 우리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행동의 제약 아래 놓일 때 생각은 강력한 도구가 되지만, 그 자체로 남겨지거나 의심으로 피어날 때는 골칫거리가 된다.
-<노력의 기쁨과 슬픔> p.50~51
즉 생각이 행동의 실체도 없이 그 자체로 남겨지거나, 물음표로 둘러쌓일때는 우리에게 골칫거리, 마음의 짐으로만 돌아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시험기간에 공부는 하기 싫은데 그렇다고 완전히 놀 수도 없는 그런 찝찝한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다. 공부를 했다가 다시 폰을 들여다보는 '어중간한' '불확실한' 상태가 그렇다. 이는 대부분 '몰입'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
반면 생각은 행동의 범위 안에서 우리를 방해하지 않는 수준이라면 강력한 도구가 된다. 다시 말해서 얼마간의 생각이 몰입을 위한 징검다리가 된다면 그 상태가 바로 생각이 제대로 쓰여진다는 것이다. 즉 핵심은 지금 당장 무언가를 시작했느냐, 그렇지 않고 생각만으로 머무느냐의 관건이다. 모래사장 앞에서 파도치는 모습만 바라볼 뿐 서핑은 하지 않고 생각만 하는 것과 일단 물이라도 실컷 먹으면서 서핑 보드에 올라타는 것의 차이다. 당연히 전자보다는 후자가 경험과 행동을 통해 더 생생한 발전의 단계를 밟을 수 있을 것이다.
이해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이끄는 삶의 최초 관객으로서 마치 제3자가 된 듯 외부인의 시선으로 삶을 바라본다. 그들에게 행동의 즐거움은 예상치 못한 것을 발견하는 데 있다. 행동해야만 알 수 있는 무언가와 행동하면서 알게 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노력의 기쁨과 슬픔> p.53
나는 요즘 새로운 일을 배우면서 이전에는 접해보지 못한 경험을 갱신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하는 일은 '다작(多作)'을 요하는 것이라, 특히 내게는 망설이지 않고 일단 시작하는 덕목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느끼고 있다. 나의 목표는 '행동가'가 되는 것인데, "삶은 준비할 수 없고, 몸풀기 따위는 건너뛰어야 한다"라는 저자의 주장이 내겐 큰 용기를 심어주었다. 나는 이해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 행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나의 행동을 다른 사람이 보는 것처럼, 나는 내가 행하는 일련의 행동들을 그냥 지켜보는 마음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일단 '하고 본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떠한 고민이나 걱정도 붙잡지 않고 그냥 자리에 앉는다. 깊이 쉼호흡을 내쉬고, 지긋이 목과 어깨 스트레칭을 한다. 그리고 '시작하다 보면 길이 나올거야'라는 마음으로 망설임없이 무언가를 시작한다. 과정의 여정들이 쌓이고, 중간 점검을 통해 그것이 의도하지 않은 괜찮은 '결과'로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다.
모래사장에서 파도만을 바라보며 생각만 하는 것은 그만두려고 한다.
우리를 말하고 춤추게 하는 건 의무감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이다
나에게는 삶의 낙들이 있다. 춤을 추는 것이고, 글을 쓰는 것이다. 이를 의무감에서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언제나 행위 안에서 아득한 안정감을 느꼈고, 몰입을 통해 강렬한 쾌감이 피어올랐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자연스럽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마욜이 프리다이빙을 바다에 대항하여 분투하는 과정이 아니라 바다 안의 흐름에 끼어드는 과정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바다를 대립의 대상이 아닌 애정의 대상으로 바라본 것이다. (중략) 마음속 깊은 곳에는 평안이 머무는 자리가 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다른 감정, 바로 사랑이 숨어 있다.
-<노력의 기쁨과 슬픔> p. 155~156
위에서 말한 바처럼 분투하는 과정이 아니라 흐름에 끼어드는 과정으로 무언가를 한다면 '자연스러운' 상태가 된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배웠던 '도가' 사상이 생각났다.
도가 사상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에 의해 형성 및 발전했는데, 노자는 지식을 쌓아 올리는 방법으로는 참다운 도를 파악할 수 없다고 보았다. 대신 마음을 비우고 고요는 하는 공부를 제안하고, 억지로 하는 것이 없는 무위의 공부를 일컬었다. 노자는 "억지로 하지 않으니까 안 되는 것이 없다"라는 역설을 제시하며 자연 본성과 어긋나는 인위적인 작위를 강제하지 않고, 자연의 법칙과 본성에 순응하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향했다.
또한 장자는 타고난 본성을 충분히 자유롭게 발휘했을 때 행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책의 저자 또한 "버터야 한다는 생각은 깊은 곳에 평안이 있고, 사랑이 있다는 생각을 절대 이길 수 없다"라며 자신에 대한 인식과 잡념을 떨치는 중요성을 주장했다. 즉 개별 존재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경험은 때로 숨을 쉬고 있다는 생각마저 잊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유이며, 자연스러움이며, 몰입이다.
우리를 말하고 춤추게 하는 건 의무감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이라는 측면에서, 내면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들을 줄 아는 섬세함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것은 나를 잃지 않는 일인 동시에 나를 흘러가는 물의 방향으로 그냥 툭 하고 던지는 일이다. 나의 소망은 늙어서까지도 노래를 흥얼거리며 춤을 추고 글을 끄적이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나를 위해 자유롭고 싶고, 자연스러운 나를 독려하고 싶다.
절대로 삶의 복잡성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중학교 3학년 때 과학 선생님은 역설적인 말씀을 툭 던지셨다. "생각이 많으면 공부에 집중하지 못해. 공부는 좀 둔한 애들이 잘해" 나는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이 찔렸다. 왜냐하면 그 당시 나는 '공부는 왜 해야하지' '내가 왜 이런 지식을 암기하고 있지'라는 별 잡다한 생각을 혹처럼 달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성적이 내가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았다. 반면,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전년도에 발목 부상이라는 쓰라린 경험을 통해 건강한 상태에서 몰입하는 '공부' 그 자체에 대한 열망을 키워온지라 아무생각 없이 공부에 몰입할 수 있었다. 즉 순수하게 공부라는 행위에 애정을 갖기 시작한 때였다. 그때부터는 예전과 달리 진심으로 좋아하는 과목이 생겼다.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삶의 특성으로, 절대로 그 복잡성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참된 생각이란 뒤돌아보지 않고 삶 속으로 뛰어들 준비가 되었을 때만 찾아온다. 어리석어 보일 수 있는 것이 사실은 행동을 이끄는 지성이 된다. 일단 행위라는 침묵에 빠져들어 생각이 고요해질 때 비로소 그 생각이 달성되는 것이다.
-<노력의 기쁨과 슬픔> p.187
그 당시에는 위의 인용문처럼 뒤돌아보지 않고 삶 속으로 뛰어들었다. 방탄소년단의 노래 제목 <고민보다 Go>와 어울리는 나날들이었다. 돌이켜보면 뚜렷하고 분명한 목표없이 그저 '대학'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불확실함을 딛고 그저 달렸다. 하지만 그저 달리다보니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능력을 발견했고, 기회가 주어졌고, 또 다음 단계로 전진하는 흐름을 타게 되었다.
나는 그 당시 절대로 삶의 복잡성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으며,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는 나는 현재 편안하다는 것이다. 이 순간 에디터로서 글을 쓰고 있는 내 자신이 1년 후, 3년 후, 10년 후에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는 없지만, 다만 흘러간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두렵지 않고 "차분하게 있으면 많은 일이 그냥 벌어진다"라는 사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도 갖게 되었다. 어차피 미래로 시간여행을 떠나지 않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순간 순간에 몸을 맡기고 오르고 있는 계단 하나 하나에만 초점을 두는 것이다.
한편 저자의 주장과는 비슷하면서도 사뭇 반대되는 삶의 방식으로 살아온 이가 떠오르기도 했다. 바로 방탄소년단을 키워낸 방시혁 pd다. 그는 서울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자신이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분노'였다고 밝힌 바가 있었다. "나를 불행하게 하는 상황에 분노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면서 자연스레 성공이 뒤따라온 것 같다"고 말하며 그는 비록 꿈은 없어도 불만은 엄청 많았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끝내려는 관습과 관행에 화를 내곤 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음악산업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외면하고 타협하는 것이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음악 산업이 처한 수많은 문제를 개선하는 데 매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책 <노력의 기쁨과 슬픔>에서는 전적으로 편안한 상태로 몰입할 것을 권유하고, 부정적인 감정에 얽매이는 것은 지양하기를 권한다. 그저 삶의 흐름에 저항하지 말고 흐름에 맡기라는 것이 주된 메세지다. 그러나 방시혁 pd의 성장 과정에는 '편안'과 '평온'이라는 형용사는 없었다. 다만 분노하고 감정이 들끓는 상태로 걸어왔을 뿐이며, 그 과정에서 지금의 세계적인 아이돌 '방탄소년단'을 만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내가 느끼기에, 이 책의 저자 또한 '절대로 삶의 복잡성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를 그 스스로 증명하는 듯 보였다. 삶 전체를 마냥 편안함이라는 상태로 일관할 수도, 분노라는 상태로 일관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식에 대하여 공식을 내릴 수도, 규칙을 정할 수도 없다. 그저 분노하는 사람은 분노하는대로, 편안한 사람은 편안한대로 살아가며 흐름에 저항하기도 흐름에 맡기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자연과 자유가 아닐까. 나 또한 그렇게 삶이라는 서핑에 올라타는 법에 대하여 익숙해지려고 한다.
[신지예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