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끝나자마자 시작되는 이야기 - 피아니스트 전세윤 리사이틀

전세윤 피아노 리사이틀
글 입력 2021.04.14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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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에 앞서



나는 지금 두 달째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 배우는 이유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 평소 음악에 관심이 많고 악기에도 관심이 많았다. 사실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약 2~3년간 피아노를 배운 경험이 있다. 스스로 나서서 배우겠다고 했지만, 피아노는 나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피아노 학원이 그랬다.

 

당시 피아노 선생님은 까다롭고 엄격했다. 떠든 아이들에게 무표정으로 벌을 내리셨고, 당일 외워야 할 것들을 못 외우면 외울 때까지 안 보내준다고 엄포를 놓으셨다. 한 번은 박자를 제대로 모르는 상태로 연습하고 어영부영 넘어가려 했는데 선생님께 딱 걸렸다. 모르면 당당하게 물어보면 되는 일이지만, 레슨이 끝나고 선생님께 가는 것 자체가 무서웠다. 결국 아는 척 연습하고 걸리는 바람에 더 혼났다.

 

피아노에 그리 좋은 기억은 없지만, 피아노를 잘 치고 싶다는 마음은 조금씩 자랐다. 고등학교 강당에 있던 피아노를 체육 시간마다 연주하던 친구를 보면서도, <라라랜드>나 <샤인>에 나오는 피아노 연주자를 보면서도. 어쩌면 피아노를 배우겠다고 한 건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르고, 생각보다 늦어진 것도 있다.

 

피아노를 배우는 목표는 피아노 연주를 들을 때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것, 연주자 별 특징을 구분할 수 있는 것. 하지만 제대로 목표도 이루지 못한 채 전세윤 피아노 리사이틀에 갔다.

 

 

 

공연장에서


 

공연장에 들어서자 은은한 조명이 무대 가운데 그랜드 피아노를 비추며 연주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되자 전세윤 피아니스트가 입장하고 공연이 시작됐다.

 

안타깝게도 내가 앉은 가장자리 좌석에선 손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눈을 감고 상상하며 들었다. 힘 있는 터치가 들렸다. 전세윤 피아니스트는 작은 소리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선명하고 또렷하게 집었다. 얼마 전, 피아노 선생님은 내게 건반을 약하게 치는 부분은 아예 안 들린다고 피드백을 주셨다. 선생님은 약하게 치면서도 선명하게 칠 수 있다고 하셨고 예시를 보여주셨다. 덕분에 바로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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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리에서 손을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볼 수 없었지만, 발을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볼 수 있었다. 피아니스트는 발로 페달을 밟았다 뗐다 하며 음과 음 사이를 연결하고 있었다. 무작정 밟고 있는 것도 아니고 하릴없이 떼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처럼 기계적으로 공식을 외워 밟는 페달을 밟는 게 아니었고, 손가락 터치만큼이나 섬세하게 밟았다. 적재적소에 페달을 밟았다. 그 덕에 선율은 곡선처럼 부드럽게 이어졌다.

 

전세윤 피아니스트는 1부의 막바지에 프랑스 작곡가 앙리 뒤티에의 Choral et Variations Op. 1를 연주했다. 피아노를 ‘가지고 논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곡이었다. 전세윤 피아니스트는 말도 안 되는 음들을 내 머릿속에 펼쳤다. 듣는 것만으로 손가락이 전부 뒤엉켜 버릴 것 같은데 음은 또 명확했다. 시작부터 강렬한 이 곡은 정체성을 혼란스러워하는 주인공이 조력자를 만나 진짜 ‘나’를 만나는 것 같았다. 왼손과 오른손을 동시에 내려치는 것으로 시작해서 슬며시 차분해졌다가 마지막에는 복잡한데 아름다운 선율이 흘렀다.

 

2부가 시작하고 전세윤은 브람스의 Piano Sonata No. 3 in f minor Op. 5를 연주했다.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곡이었다. 자신감 있는 어조로 힘주어 또박또박 이야기를 전했다. 온전히 그의 연주에 빠져든 시간이었다. 사실 피아노 연주회는 처음이라 지루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오히려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문제였다.

 

계획된 모든 연주가 끝나고 멋진 연주를 들려준 전세윤 피아니스트에게 박수가 쏟아졌다. 그는 장난스럽게 퇴장과 입장을 반복했다. 박수를 세 차례쯤 받은 후에야 다시 피아노 의자에 앉아 앙코르 연주를 시작했다. 곡 제목은 ‘왼손을 위한 녹턴’이었다. 그는 오른손을 의자에 붙이고 연주를 시작했는데, 다른 손이 옥타브를 바삐 오가는 게 피아노 너머로 어렴풋이 보였다. 한 손만으로 연주한다고 믿기 힘들었다. 앙코르라는 이벤트에 이보다 적절한 곡이 있나 싶었다.

 

*

 

약 한 시간 반 동안 진행된 공연을 본 소감을 전하자면 아름다운 선율 덕에 귀가 정화됐다. 피아노를 잘 모른다는 걱정은 쓸모없었다. 안 쓰던 근육을 사용하면 기분 좋은 떨림이 있듯 오랜만에 새로운 감각이 깨어나는 듯했다. 음악을 들었지만, 기승전결이 있는 어떤 이야기를 듣고 온 듯했다. 앞으로 전세윤의 이름을 종종 유튜브에 검색해볼 것 같다. 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Program


 
Ludwig van Beethoven
Piano Sonata No. 6 in F Major Op. 10-2
 
Claude Debussy
Preludes Book 1
Ⅳ. Les sons et les parfumes tournent dans l'air du soir
소리와 향기가 저녁 대기 속에 감돈다
Ⅵ. Des pas sur la neige
눈 위의 발자국
Ⅷ. La fille aux cheveux de lin
아마빛 머리의 처녀
 
Henri Dutilleux
Choral et Variations Op. 1
 
Johannes Brahms
Piano Sonata No. 3 in f minor Op. 5


전세윤 피아니스트

2018년 만 22세 나이로 제 11회 더블린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우승하며 전세계의 주목을 받은 피아니스트 전세윤은 스위스 베르비에 페스티벌에서 열린 방돔 프라이즈, YCA 국제 오디션, LA 국제 피아노 콩쿠르, 발렌시아 호세 이투루비 국제 피아노 콩쿠르,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 힐튼헤드 국제 피아노 콩쿠르 등 주요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하였다.

 

 

전단앞 (1).jpg 

 

 

[임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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