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너와 나 사이의 거리 두기는 가능할까

김혜진 저 『너라는 생활』
글 입력 2021.01.28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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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징악이 명확하고 주인공이 악역을 상대로 통쾌한 승리를 거두는 서사를 흔히 ‘사이다’라고 한다. 반면 주인공이 고난을 쉽게 이겨내지 못하고 일이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을 때의 답답함을 ‘고구마’에 비유하기도 한다. 많은 상업 작품의 소비자들은 사이다를 원한다. 일이 일사천리로 해결되지 않는 현실 세계는 고구마처럼 답답하기에 픽션을 통해서라도 시원한 쾌감을 느끼고 싶다는 것이다. 복잡해지고 다원화되어 도무지 알 수 없는 것투성인 세계에서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는 현상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하다.


‘사이다’ 서사는 많은 경우 주인공이나 화자가 고정되어 타자화된 세상을 바라보는 구도를 전제로 한다. 그래야 주인공을 중심으로 선악이 명료하게 구분되고 징벌과 보상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향유자가 주인공에 쉽게 이입할 수 있을 때 서사의 의도는 성공적으로 실현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향유자는 서사에 이입하지 못하고 낙오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완전한 주인공이 될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은 사이다의 단순한 서사에서 오락적 쾌감을 느낄지는 몰라도, 너와 나의 구분이 명확지 않고 복잡한 관계와 사건이 얽혀 아무도 정답을 알지 못하는 고구마 같은 서사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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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작가의 여덟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 『너라는 생활』은 우연히 만난 동네 주민, 친구, 동기, 연인, 혹은 어떤 수식어로도 명징하게 정의될 수 없는 관계를 사이에 둔 수많은 너와 나의 이야기들이다. 습관처럼 ‘나’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독자들은 마치 전지적 작가 시점처럼 서술되는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며 ‘나’의 시선으로 평평해지는 세계의 편협함을 목격하고, 그 시선이 다시 ‘나’를 관통하는 과정을 체험하며 ‘너’와 ‘나’를 구분하는 이분법의 허구성을 깨닫게 된다.

 

‘너’와 ‘나’의 위치는 복잡다단한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흔들리기에 이야기는 명확하지도, 시원하지도 않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인물들을 바라보는 느슨한 시선 속에서 낙오되는 이 없이 모두가 이야기 속에 배치된다.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소수자’라는 프레임에 가두지 않고 입체적이고도 담담하게 다루는 작가의 서술은 이러한 시선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첫 번째 작품인 「3구역, 1구역」에서의 ‘너’는 3구역의 길고양이들을 밤낮으로 돌보고 고양이들의 쉼터를 마련하기 위해 단독주택 매입까지 감수하면서도, 3구역의 재개발을 원하고 이주를 거부하는 주민들을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중개사무소의 직원이다.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면모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너’는 전자로도 후자로도 정의될 수 없다. 이 책은 첫 번째 작품에서부터 인물을 향한 구분과 정의를 거부하고 선악의 판별을 거부한다. 소설 속 ‘나’가 밝히듯이 ‘어떻게 해도 너라는 사람을 다 알 수는(35p)’ 없다.


인물에 내재한 다양성과 그로 인한 해석의 불가능성을 나타낸 「3구역, 1구역」과 비슷한 맥락으로, 같은 인물에 대한 다양한 인물의 다양한 생각을 다룬 「다른 기억」에서는 하나의 사건에 포개지는 각기 다른 시선과 관계를 드러낸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난 선생님을 두고 ‘나’는 선생님을 둘러싼 소문의 진위를 규명하고 싶어 하고, ‘너’는 유독 선생님에게 냉소적인 학교에 회의를 품으며 대립각을 세운다.

 

각자에게 상처를 주고 스러진 사건과 관계를 돌이키며 ‘나’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너’와의 관계가 달라졌을 가능성을 떠올리지만 상상은 이내 추슬러든다. 모든 경험은 저마다 다른 성질의 토양에 다른 방식으로 스며들며, 그것이 새겨진 기억 역시 각기 다른 형태를 띨 수밖에 없고, 누구도 이 사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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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작가

 

 

이렇듯 작가는 단지 이분법이 무너진 복잡한 세계를 기술하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그것에 이끌릴 수밖에 없게 하는 불가항력에도 주목한다. 「3구역, 1구역」의 ‘나’가 정체를 규정할 수 없는 ‘너’와의 만남을 그만두기로 결심하면서도 그러지 못하듯이, 「다른 기억」의 ‘나’가 ‘너’와의 관계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떠올리면서도 이내 체념하듯이, 불명확하고 모호하여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삶의 전개를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나’는 소설들 속에서 꾸준하게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이끌림이 아닌 자발적인 선택을 통해서 이러한 ‘고구마’ 서사를 완성해나간다.


가령, 「너라는 생활」과 「자정 무렵」, 「우리는」의 ‘나’는 모두 ‘너’와의 관계를 끊어낼 것을 매일 다짐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융통성이 없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하고야 마는 ‘너’에게 질려서 매일 헤어짐을 다짐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싫은 사람, 싫은 관계, 싫은 사건이 축적되어 지금을 만들어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 소설들은 그런 일들을 수없이 마주치면서도 그것 때문에 지속되는 생활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추진력으로든 반동으로든 몸에 힘을 주게 하고, 몸을 일으켜 세우고 쓰러지기를 스스로 반복하게 한다. 결코 평화롭기만 할 수 없는 이 생활은 그래서 나를 움직이게 하고 어딘가로 향하게 함으로써 ‘살게’ 한다.


 

네가 없거나 내가 없으면 가능하지 않을 일들. 어쨌든 생활을 지속하기 위해 우리가 반복해왔던 일들. 좀처럼 바뀌거나 달라지지 않는 견고한 일상 속의 일들. 그러니까 그 순간엔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가진, 특별할 것도, 특별하지도 않은 이런 것들이 우리를 지금껏 여기까지 끌고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너와 나, 우리의 밤이다.

 

- 「자정 무렵」, 116p

 

 

독자는 ‘나’의 관점으로 ‘너’를 바라보다가, 편협하고 납작하게 해석된 ‘너’의 세상에서 ‘나’ 역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시선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너와 나 사이 경계가 허물어지고, 그것이 곧 우리가 되는 경험이 때로는 공포로 다가올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자정 무렵」과 더불어 ‘퀴어 3부작’ 중 하나인 「동네 사람」의 ‘나’는 마냥 정다운 존재로 생각했던 동네 사람들이 ‘모든 걸 다 안다’는 것을 깨닫자 불현듯 오싹함을 느낀다. 내 집이 어디 있는지, ‘너’와 ‘나’가 어떤 사이인지 알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겠지만 더 정확히는 모든 걸 다 안다고 말한 노숙인 할머니처럼 ‘나’의 정다운 세계를 위해 떼어내고 분리했던 존재가, 사실은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가까운 자리에서 관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너’와 ‘나’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하듯 ‘우리’의 범주도 이렇듯 모양을 달리한다. 이 사실을 전제할 때 ‘우리’라는 주어는 비로소 효력을 가지고 온기를 지닌다. 작가가 제시하는 ‘우리’의 이상향 또한 고착됨 없이 흔들리고 변화한다. 마지막 소설인 「팔복광장」에서의 광장은 그러한 이상향의 현현이다. 사실 ‘너’와 ‘나’가 상상했던 팔복광장은 조감도로만 남고 실제로 조성되지 않았지만, ‘나’는 광장이라는 신기루를 함께 기대하고 소망했던 시간을 ‘우리에게 일어난 가장 좋은 일’이라고 기억한다. 광장은 없지만 ‘너’와 ‘나’가 광장을 향하여 꿈꾸던 순간들은 그때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모든 기억과 경험은 없어지지 않은 채 또 다른 ‘너’를 만날 것이며, 또 다른 ‘우리’를 만들 것이다. 우리와 우리의 이상향은 결코 완전해질 수 없고, 그리하여 무한한 가능성으로 계속 꿈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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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처럼 답답하고 뭉툭한 현실의 이야기를 풀어낸 여덟 작품의 화자들은 모두 망설이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 관계를 끊어내기로, 예전처럼 돌아가기로 다짐하고 소망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단념한다.

 

그렇다면 그 시간들은 무의미한 것일까? 작가는 원점으로 돌아온 화자의 그대로인 자리가 아닌, 원점으로 돌아오기까지 화자가 디딘 걸음에 주목한다. ‘나’의 걸음은 명확하지 않고 한없이 위태로우나 ‘너’를 향해 있기에 나아가지 못하고 빙빙 돌면서도 ‘우리’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다.

 

소영현 문학평론가가 주디스 버틀러의 『위태로운 삶』을 인용하여 밝혔듯 이 책은 ‘‘너’에게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리는 ‘나’의 취약성을 들여다보면서, 서로에게 취약한 존재들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중략) 공동체를 구상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250p)‘ 한다. 수많은 ’너‘와 ’나‘로 묶인 이야기들은 이렇듯 취약한 ’너‘와 ’나‘의 생활, 그리고 이들의 뗄 수 없는 관계가 공동체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지난 일 년 동안, 피할 수 없는 상황 아래 너와 나를 우리로 만들었던 지반이 무너지고 그럴수록 도리어 너와 나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권선징악을 실현하려는 움직임을 수없이 목격했다. 그러나 ‘사이다’는 이뤄지지 않았다. 선악을 나누고자 경계선을 둘러싸고 ‘우리’를 정의해도 완전히 범주에 속하거나 속하지 않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너’와 ‘나’는 취약할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절감했을 뿐이다. 무너진 지반 위에서 공동체의 의미를 처음부터 다시 확립해야 하는 지금, 망설임과 주저함의 연속이더라도 ‘너’를 향한 걸음을 지속하며 취약한 존재로서 서로의 생활을 지탱해야 한다. 느슨하지만 끊어지지 않고, 흐릿하므로 함께할 수 있는 연결로써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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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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