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보그(Vogue) 표지 논란 - All Lives Matter [패션]

글 입력 2021.01.22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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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을 지양하는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지난 시간은 역설적이게도 차별을 지향하는 사회로 나아갔다. 걸어온 길의 역으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을 아직 끝마치지 못한 탓에 그 차별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있으며 패션도 그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패션은 차별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사람들은 옷을 입었고 그 시대에도 씨족사회에서 족장과 피 족장의 신분에 따라 옷을 달리 입었고, 봉건 사회로 접어들면서 귀족과 평민의 옷이 달라졌고, 부유층과 서민의 옷마저 달랐던 것이 패션이다.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의 시작을 연 것은 찰스 프레드릭 워스라는 남자였다. 찰스는 1858년 프랑스 파리에서 자신의 아틀리에를 열고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을 위해 화려한 옷들을 만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쿠튀르는 부를 축적한 상류층의 입맛에 따라 고급 원단과 화려한 디자인을 추구했고, 패션 디자이너들에 의해서 고가의 명품 위주로 흘러가는 오트 쿠튀르가 탄생했다.


부자들과의 부의 격차와 그들이 추구하는 형식에 얽매인 패션에 대한 반발로 자유로운 개성을 추구하는 젊은 서민들로부터 태어난 것이 스트리트 패션이었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관념에 대한 반발로 메리 퀀트는 미니스커트를 다시 한 번 세상에 내놓았다. 패션은 차별의 역사를 함께했고 그에 대항하는 패션 또한 속속들이 등장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화이트칼라, 블루칼라, 골드칼라 등 직업에 따른 패션의 구분과 함께 그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이 등장해 이에 맞서 싸우는 와중에 인종 차별이라는 새로운 적을 마주한다.

 

 


Black Wears Matter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사건으로 시작된 B.L.M(Black Lives Matter) 운동이 한동안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에서도 여러 사람이 각자의 소셜 네트워크에 관련 글을 올려 간접적으로나마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인종 차별이라는 뼈 아픈 오류의 가장 널리 알려진 피해자였기에 흑인에게로 향하는 인종 차별은 언제나 논란의 중심으로 자리하고 세간의 이목을 끌어모은다. 이는 패션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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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모델로 세운 보그의 표지 사진이 인종 차별 논란에 휩싸였다. 부통령 사진에 화이트 워싱을 가했다는 것이 논지였다. 화이트 워싱은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에 속하는 인물 또는 캐릭터를 백인처럼 보이게끔 가공하는 것을 일컫는데 부통령의 피부를 본래보다 더 희게 보이게끔 했다는 것이 보그가 비판을 받는 이유였다. 보그에서는 나름의 변명을 내놓았으나 해리스 부통령이 본인과의 협의 없이 사진을 바꿨다는 발언을 하면서 비난은 더욱 거세졌다. 이 사건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고자 쓰는 글이 아니기에 주석을 따로 달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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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구찌 2018 F/W 컬렉션, 중앙: 블랙 페이스, 우: 프라다 키 링. Photo via Gucci, AP, PR NEWS

 

 

패션계에서 흑인 인종 차별에 관한 논란은 이전에도 있었다. 구찌가 2018 F/W 시즌에 선보인 니트웨어는 입술까지 올라오는 검은색 터틀넥에 붉은 입술이 들어간 디자인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흑인을 비하하는 대표적인 표현인 블랙 페이스를 디자인으로 사용한 것이라며 비판의 화살을 쏘아 보냈고 이에 구찌는 황급히 해당 제품을 전량 리콜 조치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프라다에서 출시한 키 링도 비슷한 맥락에서 비판에 휩싸였다. 원숭이 모양의 키 링은 붉은 입술을 강조하고 검은색 또는 진한 갈색 계열의 피부색을 하고 있어 블랙 페이스와 유사하게 흑인을 희화화하는 제품이라는 것이 비판의 근거였다. 덧붙여 H&M도 Coolest Monkey In the Jungle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후드티를 입은 흑인 모델의 사진을 웹 페이지에 게시하여 같은 비판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인종 차별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지금의 사회가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한 이는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인종 차별적인 디자인의 제품을 출시한 브랜드를 비판하고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정의를 실천하는 일임과 동시에 올바른 사회로 나아가는 초석을 더욱 단단히 하는 행위다. 조금 아쉽게 생각하는 바는 인종차별 중에서도 유달리 흑인을 향한 인종차별만이 언론과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는 점이다.

 

 


Other Lives Matter



인종차별이란 보통 백인으로부터 백인이 아닌 인종에게로 향하는 차별적인 시선, 행동, 사회 전반의 태도를 일컫는 경우가 많다. 백인이 아닌 인종에는 당연히 아시아인이나 히스패닉 같은 인종도 포함된다. 패션 산업은 백인의 전유물이 아니기에 이들도 패션 산업에 종사한다. 다만 버질 아블로, 칸예 웨스트, 이세이 미야케같은 특별한 케이스를 제외한다면 보통 이들은 패션 산업 구조 중 1차 산업에 종사한다. 원단 생산이나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 계층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구찌, 프라다, 루이비통, 샤넬 같은 명품 업체의 디자이너는 대부분 백인이며 이들은 제품을 디자인할 뿐 공장에 출근하여 직접적인 생산 활동에 참여하지는 않는다. 생산에 투입되는 것은 아시아인 또는 히스패닉 등의 이민자들이며 하루 대부분을 공장에서 일한다.

 

하지만 브랜드 수익의 대부분은 디자이너를 비롯한 다른 이들에게로 돌아가고 이들은 최소 생계비에 해당하는 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형 기업의 압박에 이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부당한 금액이라도 받고 일을 하는 수밖에 없다.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소중한 하루를 희생하면서도 차별적인 대우를 받고 있다. 이에 대한 울분을 토하지도 못 한 체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간다. 이들에게로 향하는 차별은 이상하게도 그다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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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캡쳐. 좌: Euro News, 우: Forbes

 

 

대형 쇼핑 브랜드 Boohoo,Fashion Nova, Quiz가 입점 브랜드나 생산 공장의 노동자를 착취했다는 것에 관한 기사는 몇 건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다. 일방적인 제품 결제나 계약 취소로 막대한 피해를 당하고 그 피해가 고스란히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국가 기관이 이들의 피해를 위해 수사에 착수하고는 있지만, 대중의 관심은 미약하다. 이에 관한 더 많은 기사가 있을 수도 있지만,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만 열어도 곧잘 보이곤 하던 흑인 인종 차별을 힐난하는 목소리에 비해 턱없이 작은 목소리임은 틀림없다. 인종 차별을 무찌르자는 목소리 내에서도 인종 차별이 생겨나는 것 같은 기이한 기분에 휩싸인다.

 

 


All Lives Matter



평등과 다양성을 존중하며 인종 차별을 뿌리 뽑는 태도를 견지하자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옳은 일이다. 역사적으로 흑인과 백인 사이의 갈등과 인종 차별의 뿌리가 깊게 박혀 있었기에 이들이 더욱 주목을 받는 일도 어떤 면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나 이들 덕분으로 다른 썩어버린 뿌리가 덮이는 일은 옳다고 할 수 없다. 건강한 나무로 자라고자 한다면 모든 썩어버린 뿌리를 잘라내고, 오염된 흙을 파내고, 새로이 건강한 양분을 주어야 한다. 더욱이 나무가 휘어 자라거나 잘못된 곳으로 향하지 않도록 부목을 대어 올곧게 자랄 길을 잡아주는 것이 나무를 심고 키워 온 주인으로 해야 할 역할이자 의무다.


패션은 옷, 액세서리, 머리를 포함하여 행동 양식에 이르기까지 우리 생활 곳곳에 숨어 있으며, 패션이 추구하는 것은 `나`를 시각적으로 표출하고, 내가 원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나에게 씌우며, 나라는 사람이 더욱 빛나게끔 꾸며나가는 것이다. `나`라는 것을 정의함에 정답은 존재하지 않기에 저마다가 내린 정의가 곧 정답이 된다. 결국, 패션은 나의 개성을 추구하면서 더욱 가꿔 나감과 동시에 서로 다른 `나`에 대한 정의를 이해하고, 양보하며, 당신의 나다움과 나의 나다움이 손을 맞잡을 때 더 아름다운 패션이 된다. 패션이 지나온 길에 남아버린 얼룩은 어쩔 수 없는 일이나 그 얼룩을 없는 것인 양 모른 척 하지 않고 지워 나가고 또 다른 얼룩이 남지 않도록 노력하는 태도로 계속 걸어나감이 중요하다. 나를 아름답고 빛나게 하려고 나에게 걸치는 모든 것들이 만들어 낸 스타일이 나와 다른 누군가에게 얼룩을 남기게 된다면 그건 더는 패션이라고 할 수 없다.


패션이라는 나무를 비록 처음에는 잘못 심었으나 다행히도 이를 깨닫고 올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우리는 부목을 대고 이에 나무의 가지를 묶어가는 중이다. 지나치게 많이 자라버려 그 과정에 시간이 좀 걸리기에 아직 끝맺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그 나무가 향하는 곳에서 결실로서 맺힐 열매가 다양성과 개성에 대한 존중이라는 것만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이 나무가 썩어버린다거나, 혹은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곯아버린 열매를 맺을 일은 없다. 지금의 우리가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이라는 해충이 들러붙는 것을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 모조리 때어내는 것이 이를 위한 노력임을 모두가 알고 있다. 더 나아가야 할 방향은 다른 인종에게로 향하는 인종 차별이라는 또 다른 해충들도 들러붙지 못하도록 시야를 조금 더 넓게 가지는 것이다.


나무 한 그루에 한 가지 벌레만 들러붙는다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김상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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