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들이 세상에 던졌던 수많은 질문들의 답은 [음악]

글 입력 2021.01.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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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하이가 지난 18일, 정규 10집으로 돌아왔다. 에픽하이의 노래로 초중고, 그리고 현재를 지내고 있는 오랜 팬인 나에게 10집 발매는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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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새 앨범 발매 전 선공개 되었던 수록곡 Lesson Zero가 가슴 깊숙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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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하이는 2003년 데뷔 앨범에 Lesson One이라는 곡을 수록하여 이른바 "레슨 시리즈"의 시작을 알렸다.

 

 

Can this rap game ever bring changes?

이 랩이 진정 이 사회에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Will I last in this game, be blasted with shame?

나는 이 게임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수치심에 쫓겨날 것인가?

 

Will I stand for my name and never blaspheme for fame?

나는 유명세를 위해 모독을 뱉지 않고 내 이름을 지킬 수 있을까?

 

- Lesson One (2003), 에픽하이

 

 

사회의 부조리함, 세상과 인간의 모순, 권력과 신에 대한 회의감과 반기 등을 3분 내외의 곡에 꾹꾹 눌러 담은 레슨 시리즈의 곡들은 힙합의 진정한 "패기"를 보여준다.

 

 

blind 교과서 사상의 학대, 보수주의가 강요하는 상상의 낙태 - Lesson 2 (2004), 에픽하이

 

규칙없는 거리위에 법을 내리쳐, 세상이란 얼굴위에 침을 내뱉어 - Lesson 3 (2005), 에픽하이

 

 

'나는 멋있다', '나는 잘났다'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크고 작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중음악인으로서, 그리고 그 어떤 장르보다 '솔직할' 수 있는 힙합 아티스트로서 세상에 던지는 숱한 질문들을 담은 곡을 꾸준히 발매하는 에픽하이의 모습은 내가 그들의 오랜 팬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수많은 질문이 모이고 모이다 보면, 그리고 그걸 듣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다 보면 세상도 어쩌면 조금은 정의롭게 바뀌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에픽하이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No yeah라고 말할 선택, 노예들에게는 없대

 

- Lesson 4 (2009), 에픽하이

 

 

그리고 레슨 시리즈는 지난 8집의 수록곡 LESSON 5에서 마무리된 듯 했다. 사회의 부조리를 직설적으로 꼬집던 기존의 레슨 시리즈와 달리, 조금은 부드러워지고(?) 묘한 허탈함까지 느껴지던 LESSON 5는 "무수한 질문만 있을 뿐 결국 답이 없다"로 끝나며, 그간 레슨 시리즈의 결론을 지은 것 같았다.

 

 

옳고 그름을 갈망하는 마음의 이간질이

회색이 흑과 백 숯과 재가 될 때까지 부추기지

 

We got no answers,

just a lot of questions

 

- LESSON 5 (2014), 에픽하이

 


실제로 이후 발매된 앨범들엔 레슨 시리즈 곡은 없었고, 에픽하이의 멤버 타블로는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lesson 곡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할 말이 없어 내지 않는 것'이라고 과거에 밝힌 바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소식이 없던 레슨 시리즈가 Lesson Zero로 돌아왔다. 세상을 다 찢어버릴 것 같은 에너지를 뿜어내던 lesson 2,3의 모습이 4와 5를 거치며 그 에너지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 같더니 이번엔 아예 '비판과 풍자'의 불씨가 '0'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이전의 레슨 곡들과 달리 Lesson Zero는 "할 말이 그게 다였기 때문에" 2분 남짓에 불과했다. 세상의 잘못된 것들에 의문을 품고, 때론 반항하기도 하고, 그리고 혁명을 선도하는 것 같았던 메시지를 뒤로한 채 "0"으로 되돌려 달라고 말을 하는 타블로의 가사를 보니, 결국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바뀌는 것은 없었으며, 거대한 장벽을 끝끝내 무너뜨리지 못한 쓸쓸함까지 느껴지기도 했다.

 

 

No more lessons please, take me back to zero

더 이상의 가르침은 그만, 날 0으로 되돌려줘

 

No more teachers, no more prophets, no more heros

더 이상의 스승, 선지자, 영웅은 그만

 

No more lessons please, now I see the questions to all answes

더 이상의 가르침은 그만, 이제 보여, 모든 답을 향한 내 질문은

 

will ony bring me to my knees and back to zero.

나를 무릎 꿇게만 할 것이고 나를 0으로 되돌리기만 할 것을.

 

 

타블로는 0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곡을 썼다고 그 의도를 밝혔다.

 

즉, 그동안의 질문들이 무의미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세상에 던졌던 무수한 질문들을 발판 삼고,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겠다는 희망적인 다짐이 담긴 곡이라고 볼 수 있다.

 

팬으로서 에픽하이 '전성기'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에게 그들은 항상 전성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잠시 언급을 하자면, 에픽하이의 전성기 시절 명반이라고 인정받는 3~5집에 비해 최근 그들의 음악이 '에픽하이만의 사회 비판'이 줄어들어 아쉽다고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큰 꿈과 희망을 꾸던 20대에서 적당한 꿈을 꾸라고 다음 세대에 일러두는 곡을 쓰기까지 그들은 행복도 좌절도 느끼고, 다 부질없다고 느끼는 등 여러 감정들을 경험했을 것이기에 그들이 이전에 비해 다소 뭉툭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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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처음으로 되돌아가겠다고 했다. 더 이상의 가르침, 혁명을 이끄는 노래는 없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들은 다시 0의 상태에서 차곡차곡 세상을 향한 목소리를 채워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패기 넘치던 20대의 에픽하이는 이제 각자의 가정을 꾸리는 나이대가 되었고, 또 다른 패기 넘치는 20대들에게 좋은 길라잡이가 되어줄 어른으로서 어떠한 메시지를 줄지, 레슨 시리즈를 한창 발매하던 그들의 나이대가 된 나는, 팬으로서 기대가 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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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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