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술 발전의 요람, 담론의 장으로서의 살롱 [미술]

살롱(Salon) : 미술전람회
글 입력 2021.01.1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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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Salon)은 프랑스어로 ‘거실’을 뜻하며 서양 상층계급 저택의 응접실을 말한다. 문화사적으로 17~18세기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문학·예술·정치·사상 등 여러 면을 논하는 담화의 장소로 기능하여 복수형 salons는 사교계를 가리킨다. 미술사적으로는 현존하는 예술가의 작품을 모아 정기적으로 전시하는 미술전람회를 의미한다. 대문자로 시작되는 Salon은 미술전람회를 뜻하기도 하지만 자동차 전시회 또는 다과점과 미장원 등에 사용되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뜻을 가진 살롱이지만 제목에서 밝혔듯 이번에는 ‘미술 단체의 정기 전람회’인 살롱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Louvre_at_night_centered.jpg

 

 

최초의 살롱은 1667년 루이 14세 치하의 아카데미가 주최한 전람회이다. 이는 1697년 루브르궁의 그랑 갈르리로 옮겨져 10회 정도 열렸으나 이후 부진한 출품으로 명맥만 이어왔다. 그러다 루이 15세 1725년에 이르러 루브르궁의 '살롱 카레(Salon Carré, 정방형의 방)'에서 본격적인 미술 전람회로 부활하게 되었다. 당시 아카데미 회원들만 참가할 수 있었기에 전람회의 이름은 개최되었던 장소인 ‘살롱 카레’에서 이름을 따 ‘살롱(Le Salon)’이라 붙여지게 되었다.


이후 대규모로 발전한 살롱은 1737년부터 미술 발표 기관으로 기능을 확립하며, 운영 기관이나 정책 등에 여러 가지 변화를 꾀했다. 가장 큰 변화는 왕족, 귀족 등 소수의 계층만 관람이 가능했던 것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계기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는 것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살롱은 미술 용어로서 공개적인 전람회를 의미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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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제페 카스틸리오네 Giuseppe Castiglione

<루브르의 살롱 카레 Le Salon Carre du Louvre>, 1861


 

루브르궁의 살롱 카레에서 개최되는 살롱은 19세기 말까지 막대한 인파를 동원했으며, 전시 작품에 대한 열렬한 경탄과 함께 수많은 화제를 낳았던 서양 최대의 전시회였다. 루이 14세 치하 아카데미 공식 미술전으로 시작된 만큼 살롱에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자격은 아카데미 회원에게만 주어졌으며, 심사제도가 존재해 통과해야지만 작품을 전시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작가에게 살롱이란 인생의 목표였으며 실제로 수상을 하는 작가들의 경우 부와 명예를 보장받았다고 한다.


그만큼 보수적이고 권위적이었던 파리의 살롱을 우리는 지우제페 카스틸리오네(Giuseppe Castiglione)의 작품을 통해 살롱의 전경을 볼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오늘날과 달리, 살롱에서는 사람의 눈높이에서부터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꼭대기까지 벽면 가득 빽빽하게 그림을 걸었다는 것이다. 이에 작가들은 살롱전이 다가오면, 자신의 작품이 잘 보이는 곳에 걸릴 수 있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시 위원회에 청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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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푸생 Nicolas Poussin

<일곱 성사 The Seven Sacraments – Ordination>, 1647


 

그러나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전람회였던 살롱은 당대 예술가들에게 이상적인 전람회는 아니었다. 17~19세기 우리가 아는 유명한 화가들, 모네, 마티스, 고흐 등은 '아카데미' 살롱전의 엄격하고 배타적인 정책에 불만을 드러내며 독자적인 길을 가고자 했다. 당대 유명 화가들이 살롱을 거부한 이유는 아카데미즘의 한계와 문제점들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알기 위해, 살롱의 탄생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초의 살롱은 1664년 프랑스의 [왕립 미술 아카데미(Académie Royale des Beaux-Arts)]의 설립과 함께 탄생했다. 아카데미는 설립된 이래, 왕실과 귀족들의 미술품 주문을 관장하고 살롱에서의 전시를 주관하는 절대적인 권위의 미술 기관이었다. 또한, 루이 14세 치하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살롱과 아카데미는 미술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 정치적인 색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절대주의 왕정을 상징했던 질서와 권위, 그리고 고전적인 문화를 군주의 이미지에 맞게 그려내어, 고대의 전쟁 영웅이나 신화 속 인물들, 기독교 성인들이 등장하는 역사화들이 아카데미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에 따라 회화 주제의 장르별 서열이 "역사화(혹은 종교화)→초상화→장르화→정물화→풍경화" 순서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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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옹 마티유 코슈로(Léon Matthieu Cochereau)

<다비드 아틀리에의 실내 Intérieur de l'atelier de David>, 19세기


 

앞서 언급했듯 살롱은 아카데미 회원들 혹은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 아카데미 산하의 미술학교)]의 졸업생 정도만 참가할 수 있었고, 심사위원 역시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진이나 왕족, 귀족들로 구성되었다. 그렇기에 살롱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역사화를 잘 그려야 했으며, 출품되는 작품 역시 대부분 역사화이거나 종교화였다.


그러나 이러한 살롱의 관료적인 아카데미즘은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회화가 혁명적으로 발전하는 동안 더욱더 보수적이고 연공 서열을 중심으로 하여 미술발전을 방해한다는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살롱은 비난을 일부 수용하여, 1881년에 정부의 관할에서 벗어난 [프랑스 미술가협회(Société des Artistes Français)]가 만들어졌으며 1883년에는 출품자 중 90명의 심사위원회를 구성하도록 개편했다. 또한, 1863년 그 유명한 <낙선자전(Salon des Refusés, 살롱 데 르퓌제)>을 개최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못한 진보파들은 1884년 무감사제를 내세운 <살롱 데 장데팡당>(⇒앙데팡당전)을 창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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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 Edouard Manet

<풀밭 위의 점심 Le Déjeuner sur L'herbe>, 1863


 

또 다른 살롱인 <살롱 데 장데팡당(Salon des Indépendants)>은 고상하고 우아한 작품을 선호하던 국가와 아카데미즘적 살롱에 대한 반발로 만들어졌다. 그 전에 '살롱 데 장데팡당'이 탄생하게 된 배경으로, 이름부터 유명한 1863년 살롱 심사에서 낙선한 작품을 모아 전시한 <낙선자전>(이하 낙선전)에 대해 살펴보자.

 

이 전시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작품은 마네가 그린 <풀밭 위의 점심(Le Déjeuner sur L'herbe)>이다. 이 작품은 앞에서 격식 있는 척을 하지만 뒤에서는 매춘을 즐기던 당대 귀족들의 현실을 고발한 것으로, 등장과 동시에 수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동시에 수많은 비난을 받아 이 작품을 전시한 낙선전은 1회를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마네의 주변에는 젊은 화가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그들 중에는 우리나라에서 특히 많은 사랑을 받는 인상주의 화가들, 모네, 르누아르, 드가 등이 있었다. 그들은 지속해서 모임을 가지며 예술적인 영감들을 주고받았고 자신들의 생각을 발전시켰다. 이후 그들은 [독립예술가협회(Socit des Artistes Independants)]를 창설, 1884년 무심사를 간판으로 내걸고 <앙데팡당전(독립화가전)>을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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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on des artistes indépendants : vue générale : Don Quichotte : [photographie de presse]

Agence Meurisse 살롱 데 앙데팡당 실제 기사 보도 자료 ⓒgallica


 

파리의 한 가건물에서 처음 열린 이 전시회에는 앙리 루소(Henri Rousseau)·폴 세잔(Paul Czanne)·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등의 화가들이 참여했고, 제7회부터는 모네(Claude Monet)·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드가(Edgar Degas)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참여했다.


이렇듯 <낙선전> 이후 생겨난 <앙데팡당전>, <인상파 미술전> 등은 기존의 살롱전에서 볼 수 없었던 진보적인 화가들의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경향의 예술을 확산시켰다.


이후 20세기에 들어서는 <살롱 도톤느(Salond’automne)>, <살롱 데 튈르리(Salon de Tuileries)>, <살롱 드 메(Salon de mai)> 등 많은 살롱이 출현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유럽을 넘어 미국까지 이어져 다양한 형태의 살롱을 탄생시켰다.


살롱은 예술가와 미술애호가들을 이어주는 가장 중요한 기관이자, 특히 18~19세기 전반에 있어서 예술가들의 중요한 활동무대였다. 더불어 살롱은 미술 저널리즘의 산실로, 디드로의 『Les Salons』이나 보들레르의 『살롱 평』 등의 훌륭하고 근대적인 미술비평을 탄생시켰다. 살롱의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우리는 17세기 전시회의 이름이었던 살롱이 ‘미술전람회’라는 뜻을 가지게 되면서 전 세계 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미술대사전(용어편)

서양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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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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