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철학은 어려운데 이 책은 읽히네? - 이언의 철학 여행 [도서]

글 입력 2021.01.04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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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두 음절뿐인 짧은 단어 주제에 그가 주는 무게감은 묵직하다.

 

철학이란 단어를 보면 항상 학창 시절이 먼저 떠오른다. 고등학교에 다닐 적, 야자 시간에 베고 자기에 딱 좋은 두께의 책을 읽으며 여러 철학자와 그들의 사상을 읊는 친구들이 있었다. 괜한 호기심에 그들을 따라 두꺼운 책을 들추어 본 적도 있으나 항상 이상한 문장 구조와 대단한 두께에 압도되었고 결국 그런 책들은 배게나 책장 진열 등 본 목적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용되곤 했다.

 

나는 이해도 안 되는 책을 옆에 끼곤 열심히 이야기하는 친구들이 대단해 보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상당히 젠체한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대학에 온 이후로도 철학과 나 사이엔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느낌이었다.

 

대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며 몇몇 철학자나 그들의 이론, 사상을 다룰 기회는 많았지만 전공 특성상 철학은 항상 조미료일 뿐 주재료는 아니었다. 졸업에 거의 임박해서야 철학스럽다고 할 만한 수업 하나를 듣게 되었는데 전공과 관련된 사상가들을 배우고 그에 맞추어 현 상황을 돌아보는 그런 수업이었다. 철학은 결국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그렇고 그런 정의를 시작으로 한 학기 내내 미국과 프랑스를 넘나드는 여러 사상가들에 대해 배웠다.

 

놀랍게도 그렇고 그랬던 첫 시작과 달리 수업이 끝났을 땐 '내가 왜 이 강의를 이제야 들었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옛 철학자가 어떤 물음을 하고 답을 남겼는지 보다 '그래서 우린 어떤 질문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오래도록 곱씹게 되는 수업 덕분에 철학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철학과는 조금 더 친해지고 싶지만 아직은 어색해 주변만 맴도는 풋풋한(?) 사이를 유지하며 지내왔다. 그러던 와중 <이언의 철학 여행> 소개에 적혀 있는 '소설로 읽는 철학'이라는 문구에 꽂혔다. 기승전결이 분명해 드라마틱 하고 몰입할 수밖에 없을 소설의 형식으로 철학을 볼 수 있다면 나 같은 사람도 괜찮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처음 마주한 <이언의 철학 여행>은 고등학교 동창생의 옆구리에 있던 철학 책과 비슷한 두께를 자랑했다. 왠지 모르게 속은 것 같은 기분에 한동안 책을 컵 받침으로 쓰다가 며칠이 지나서야 제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언의 철학 여행>은 주인공 이언과 이언의 꿈속에 나타나는 이상한 노인 간의 논쟁을 통해 총 13개의 철학적 화두를 다루는 책이다. '기승전결, 몰입감, 멈출 수 없는 책장'을 기대한 나에겐 조금 당황스러운 구조였다. 그런데 기피했던 철학 수업을 어찌어찌 다 들은 것처럼 이 책도 어찌어찌 책장이 넘어갔다.

 

*

 

이언과 노인의 대화는 지식에서 시작해 신, 악, 이기심, 종교 등 13개의 큰 주제에서 이루어졌다. 매 챕터마다 이언의 꿈엔 노인이 등장해 혼란스러운 질문들을 던진다. 꿈에서 깨어난 이언은 부모님 그리고 친구 제프와 함께 대화하며 자신의 생각을 정립해나간다.

 

그렇다고 이언이 매 챕터의 끝에 물음에 대한 답을 주는가? 그것도 아니다. 철학적 물음엔 답이 없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이야기는 항상 여백을 남겨둔 채 끝났다.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고약한 노인의 질문에 이언과 함께 혼란을 느꼈고 다독이는 부모님의 말씀에 한시름 놓다가 명쾌하지 않게 결말에 멍을 때리곤 하였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철학자 박이문은 "<소피의 세계>가 서술적 이야기의 형식을 택한 데 반해, 이 책은 논쟁적 주장의 구조를 갖고 있다"라며 "철학의 본질이 사유에 있고 사유의 본질이 어떤 특정한 대답의 발견에 앞서 어떤 문제를 끝없이 추구하는 열린 과정에 있다는 전제하에 이 책은 아주 성숙하고 철학적인 책"이라고 이야기했다.

 

이 추천사를 읽고 보니 추천사처럼 어쩌면 이 책을 읽어내는 과정이 철학 그 자체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쾌한 답을 찾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책을 읽는 동안 평소 같으면 쉬이 하지 않을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노인과 이언의 티키타카를 오롯이 따라갔다고 할 순 없을 테지만.

  

책의 구조도 독특하지만 이 책의 진짜 매력은 각주라고 생각한다. 이언이 끊임없이 노인과 물음을 주고받는 소설 귀퉁이에는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의 근간인 여러 철학적 문제들이 각주로 달려 있다. 이 각주가 책장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빽빽하여 뒤로 갈수록 각주를 게을리 읽게 된다는 게 흠이지만 지금까지 계속해서 거론되는 여러 문제들은 나중에 따로 읽어보고 싶을 만큼 흥미롭다. 이 각주 덕에 분명 책은 한 권인데 마치 두 권의 책을 지닌 듯한 든든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철학 수업을 듣고 오래도록 고민과 여운이 남았듯, 이 책도 조금의 여운과 몇몇의 고민을 남겨 주었다. 여느 때보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시기이다. 이를 돌아보고 고민하게 만든 책 속의 문장들을 소개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며 글을 맺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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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문장들


 

학교 성적을 잘 받고, 좋은 직업을 갖는 것. 그게 네가 배우려는 유일한 이유니? 존재에 대해 알려고 하는 유일한 목적이냔 말이야...하지만 자아에 대해 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과학 시간에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것들이 얼마나 비객관적인 추론에 근거한 것인지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는 것. 그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어. (128p.)

 

아마 우리의 목적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일 거야.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을 돕고, 다른 사람과 교감도 해야 해. 그러면 결국 세계와도 교감할 수 있겠지. 그렇게 함으로써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 수 있을 거야. (241p.)

 

모든 악에는 선이 있어요. 좀 더 재미있게 말하면 선은 악해요. 우리는 악을 통해서 훨씬 더 많은 선을 얻을 수 있어요. 전 오늘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노력의 가치를 인정하게 된 것 같아요. (267p.)

 

나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인디언 인형보다 많지 않다고 확신한다. 나무 인형은 자신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안다는 점에서 우리보다 우월하다. -클래런스 대로 (340p.)

 

사람들이 판단의 도구를 습득하지 않고 단지 희망만을 좇으려고 할 때 정치 조작이 시작된다. -스티븐 J.굴드- (440p.)

 

사회는 평등하지도, 공정하지도 않아. 하지만 우리는 어떤 점에서 모두를 배려하고 또 배려받고 있어. (506p.)

 

 

[이영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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