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의 코로나 블루를 당신과 공유합니다 [사람]

인류애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글 입력 2020.12.18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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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국내에 알려진 1월 말 즈음, 나는 충수염 수술을 받고, 병상에 누워 있었다. 중국에서 괴이한 역병이 돈다고, 사람들이 픽픽 쓰러지고, 대거 죽어 간다는 뉴스들이 흘러나왔다. 그 말이 크게 대수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받은 수술은 울렁거릴 정도로 아팠고, 중국의 전염병보다는 나의 땅까지 파고들 기세인 컨디션이 더 문제였다.

 

3월쯤, 대학 개강이 미뤄졌다. 방학이 조금 늘어났구나 하는 느낌만 있었다. 수술 후 아직도 건강이 좋지 않아 딱히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개강이 미뤄졌고 비대면 수업이 진행되었다. 본격적인 외로움이 시작되었다. 축제도 가 보고 싶고, 친구도 사귀고 싶고, 술자리도 가 보고 싶었는데. 대학 활동은 그저 풍문으로만 전해지는 소문이 되었다.

 

코로나는 확산세를 보이다가, 감소세를 보이다가, 안정기를 거치는 등 다양한 양상을 띄었다. 매시기마다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지독한 외로움, 불안감과 싸워야 했다.

 

현재, 우리는 역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산발적인 감염원, 출처를 알 수 없는 감염자, 부족한 병상 등 방역체계, 의료체계가 점점 확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수도권은 2.5단계, 그 외 대부분의 지역은 2단계로 지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일일 확진자 수가 1000명을 넘어가고 있다. 3단계로 조정해야 하는 지 논의 중인 상황에서 우리는 정말 먼 미래가 아닌 바로 앞날을 걱정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런 불안정함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지거나, 주요 계획들을 수정해야 할 필요는 없다. 평소에 꿈꾸어 왔던 여러 가지 희망들과 소망들을 포기하는 것으로 그쳤다. 가고 싶었던 예술행사에 갈 수 없게 되었고, 친구를 만날 수 없게 되었으며, 국내 여행은 물론이고 고등학교 때부터 꿈꾸어 왔던 해외 여행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의 소망들을 실현할 수 있는 적절한 시기를 보내야 한다는 것이 정말 아쉽다. 큰 소망들이 좌절되는 모습을 보면 머리가 무거워진다. 코로나 초기에는 곧 지나갈 거야, 조금만 참자 하며 버텨 왔던 순간순간들이 이제는 부질없어 보인다. 끈기, 인내심보다는 지겹고, 피곤하다는 감정이 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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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작 일상생활에서 화를 돋우는 것은 평범한 일상의 부재이다. 첫 번째로, 밖에서항상 마스크를 써야 한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안경에 훨씬 김이 많이 서린다. 안경을 벗자니, 내 눈은 신호등이 빨간 불인지, 초록 불인지 구분조차 못한다. 계속 김을 닦지만, 앞이 잘 안 보인다는 것, 반복적인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 그 자체가 스트레스이다. 두 번째로, 사람이 조심스러워졌다. 실수로 옷깃을 스치면, 타인과 접촉했다는 사실에 신경이 곤두선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 아니라, 옷깃만 스쳐도 불쾌하다.

 

역설적으로 가장 그리운 것도 사람이다. 20학번 새내기로 입학했지만 과 사람을 하나도 모른다. 교수님도 시험일에 몇 번 본 것이 전부이다. 시험장을 찾아가며, 대학교의 위치와 지리를 몰라 네비게이션을 켜야 했다. 자연스럽게 내가 대학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커뮤니티 어플 뿐이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도 사이버 세상이다. 학교의 분위기와 제도에 대해 무지한 나를 보면 고등학생이 대학생 커뮤니티를 염탐하는 듯한 소외감과 이질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커뮤니티라도 참여하지 않으면 정말 고립될 것 같은 불안감이 든다.

 

코로나가 창궐했던 2020년은 혐오와 광기의 시기였다. 어느 한 집단에서 코로나에 감염되면 그 집단은 무조건적으로 비난 받았다. 코로나에 감염된 것은 그 사람의 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갖가지 이유들과 변명들을 붙여서 죄를 창조해 냈다. 사람들은 혐오하는 사람들을 부도덕하다며 경멸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앞에 그 상황이 닥치면 본능적으로 혐오했다. 자연스러운 감정과 고고한 도덕 앞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갈등했다.

 

코로나는 사회적 약자에게, 더 가난한 자에게 더 많은 재앙과 파괴를 가져왔다. 파산한 소매업자들, 회사에서 해고된 사원들, 경제가 침체되면서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 와중에도 부자들은 자신들의 견고한 성 위에서 잘 살아 갔다. 사회가 격변하고, 많은 사람들이 불우한 환경으로 추락하면서, 새로운 사회 문제들이 생겨 났다. 그리고 많은 사회문제들 중 다수는 사회 수면 아래 침전해 있다가 떠오른 것이었다. 그래서 초반에, 나는 이 급부상하는 사회문제들을,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지, 기대했다. 2020년은 급변했지만, 사회 문제는 지지부진하게 그 자리에 남았다. 뉴스 피드와 사람들의 관심사는 휙휙 지나갔고, 우리는 결국 자신의 문제로 회귀했다.

 

코로나의 시대는 각자에게 서로 많은 의미와 고통, 상흔을 남겼다. 우리는 내 자신의 상처를 보듬고, 자아를 살피는 것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상처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 방법으로, 뉴스도, 자원봉사도 아닌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읽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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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인간상을 접할 수 있다. 전염병을 기회로 삼아 신도를 더 모으는 목사, 묵묵히 페스트와의 싸움을 지속해 나가는 의사 리유, 혼란 속에서 더욱 활기를 되찾는 범죄자 코타르, 인류애 속에서 병자들을 돕는 자원봉사자들. 사람들은 페스트와의 긴 싸움에서 지독한 이별을 경험하고, 기약없는 절망과 어두운 미래를 보아야만 했다. 하지만 끝끝내 어둠의 시간이 지나고, 그들은 페스트에서 해방된다.

 

 

어둠침침한 항구로부터 공식적인 축하의 첫 불꽃이 솟아올랐다. 온 도시는 길고 은은한 함성으로 그 불꽃들을 반기고 있었다. 코타르도 타루도, 그리고 리유가 사랑했으나 잃고 만 남자들과 여자들도, 사자들도, 범죄자들도 모두 잊혀졌다. 노인의 말이 옳았다. 인간들은 늘 똑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힘이고 순진함 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리유는 모든 슬픔을 넘어서 자신이 그들과 통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의사 리유는, 입 다물고 침묵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기 위하여, 페스트에 희생된 그 사람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기 위하여, 아니 적어도 그들에게 가해진 불의와 폭력에 대해 추억만이라도 남겨 놓기 위하여, 그리고 재앙의 소용돌이 속에서 배운 것만이라도, 즉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는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말해두기 위하여, 지금 여기서 끝맺으려고 하는 이야기를 글로 쓸 결심을 했다.

 

- 페스트, P.409

 

 

 

깨달음을 얻은 자의 차분함과 슬픔이 느껴지는 리유의 증언으로, 페스트는 막을 내린다. 닫쳐가는 막을 보며 나 또한 연민과 인류애, 슬픔, 소망이 뒤섞인 다면적인 감정을 경험했다.

 

지옥 같았던 2020년에도 연말이 다가왔다. 2020년은 결코 미화될 수 없는 해이다. 화를 내고, 시원하게 욕을 하면서, 나는 2020년을 발길로 뻥 차 버리고 싶다. Fuck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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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enue beat F2020 lyric video 중-

 

 

[박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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