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노트 Sigak] 부록. 그저 평범하고 따스한 것이 좋아서

글 입력 2020.12.03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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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호퍼, Girl at a Sewing Machine, 1921
 
 
(...) 이런 생각을 한다. 예술은 우리 삶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인가. 예술이라 하니 최근 읽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단편 작품 <대화>가 떠오른다.
 
(...) 그 아래에는 작가의 죽음이 저작권에 영향을 미치는 이유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흥미로운 질문이었다. 검색 후 최초의 클릭을 허락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무미건조한 대답이 걸렸다. ‘무미건조함’은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틈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 재미없네. 나는 그것이 분명 명료하고 정확한 정보지만 전혀 예술적이지 못한 대답이란 생각을 했다. 한 예술가는, 예술은 몇 개의 말로 바로 설명될 수 없기에 예술이라 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이 너무도 인상 깊어 기억에 남겼었다.
 
-2020.10.30. 기록 일부
 
 
미술을 향해 질문하고 글을 쓰는 여정 중에 있다. 어리석게도 나는 일일이 모든 질문에 대한 글을 남기기에는 부족함도 괜한 욕심도 많은 사람이었다. 비록 떠올렸던 모든 질문들을 글로 하나하나 남기지는 못했지만, 질문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가령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술이 존재하는가, 왜 우리의 시선이 예술을 향해있는가, 예술은 우리를 무엇을 말할 수 있게 했고, 공감하게 했고, 공존하게 했는가”라는 질문 같은 것이다. 최근 마음 어딘가가 괜스레 아리면서 터져 나온 질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 질문을 대답의 형식을 취하는 글의 주제로서 다뤄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구구절절 이야기해야 하는 주제로 삼을 필요 없이, 이미 모든 예술이 저마다의 몸짓으로 이 질문에 답하며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시선, 혹은 마음은, 그러니까 어떠한 형태의 관심으로든 그것은 어떤 예술을 향해 있는지 궁금하다. 오래전부터 깊이 마음에 두고 있는 것, 질문을 보자니 우연히 기억 속에 떠오른 것, 유명한 것, 유명하지 않은 것, 그 어떤 것이든. 지금 당신 주변을 맴도는 작품이 있다면 앞서 말한 질문이 꽤나 흥미로운 여정으로 당신을 안내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왜 존재하는지, 왜 나의 시선이 그것을 향해있는지,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말할 수 있게 했고, 공감하게 했고, 존재하게 했는지.” 그리고 질문 끝에서 당신의 마음은 어떤 떨림과 통증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그 자체로 스스로를 보듬어줄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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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로루소, Lovers and Lautrec
© Joseph Lorusso

 
몇 달 전 미술을 향해 질문하고 그에 대한 무엇인가를 써보겠다고 호기롭게 다짐했던 과거의 내가 새삼 신기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내 생각을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풀어가는 건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열심히 찾아본 예술가들의 말과 작품을 일일이 정리할 필요도 없이 그저 한껏 끌어안아보고 마는 것으로, 여전히 물음표만을 남긴 채 질문과의 대면을 마무리하고 싶을 때도 많았다. 사실 그런 마무리가 더 의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던 것 같다.
 
어려운 과정 한편으론, 이 마음의 형태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여전히 모르겠지만, 기쁨 같은 것이 함께하기도 했다. 기쁨에 이유가 있다면, 이미 말했듯 이 과정에는 여러 예술가의 고백과 작품들을 찾아가는 시간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미술에 대해 무엇인가 이야기해보려는 과정은 작품보다 그 뒤에 존재하던 예술가들의 말에 유독 더 애정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곤 했다. 그리고 예술은 말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이 온전히 구분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방식으로 바라본 세상을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동시에 곳곳에서 생동하려는 이야기에 얼마든지 귀를 기울이고 있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공존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과정이 되기도 했다.
 
말하거나 보는 행위는 너무도 평범하지만, 예술의 영역에서 이 행위는 또 다른 새로움을 만드는 것으로 일어나곤 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단편 소설 <대화>1) 속 인물 중 한 명인 폴란드 사람 카지미르는 예술가와 감상자를 이렇게 표현했다.
 
“가령 노래 한 곡이나 잘 알고 있는 그림 한 폭, 그리고 시 한 수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것들은 모두가 독자적인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을 처음 만들어낸 사람과 그것을 다시 만들어낸 사람, 즉 예술가와 참다운 감상자에게는 말입니다”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예술가의 몸짓은 그 결과물로 작품만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 그 작품이 다른 존재와 나란히 공존할 공간을 세계 속에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폴란드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을 설명한다. 이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들 노래와 시와 그림은 다른 것과는 다른 데가 있습니다. (...) 그것들을 존재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때그때마다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한없는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힘을, 또 다른 무엇에서도 얻을 수 없는 저 한없이 풍족한 의식을 주는 것입니다”라고. 예술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이 문장들을 보다 보면 그저 한 번 읽고 마는 것으로 쉽게 넘길 수가 없게 되는 것 같다.
 
무엇보다 지금의 내가 이런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지러운 현재에서 잠시 물러나 누군가의 작품을 통해 기쁨 같은 것을 얻어보려는 것이 말이다. 명확한 설명이나 설득 따위 필요 없이 그저 내가 좋았던, 지금 내가 경험하는 감정이 사랑스러운 것임을 알려주는 작품에 둘러싸여 그 순간 떠오르는 상념들을 콸콸 쏟아보고 싶은 마음이 울컥거릴 때가 있다. 많은 문자들의 시끄러운 설득보다, 어떤 연유인지 뭉개지고 겹쳐지고 맞닿아진 말 없는 색채들의 침묵이 나에게 더 맞을 때가 있다. 이런 상념들을 구태여 다시 글로 풀어내는 것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꼬리 잡기가 되어버릴 수도 있지만, 이는 동시에 내가 좋아하는 여정이기도 했다. 아까 말한 그 여정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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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호퍼, Eleven A.M., 1926
© Edward Hopper

 
최근 나는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햇빛은 초겨울의 햇빛일 거라고(물론 나의 주관적인 결론이다). 굳게 닫은 창문 틈 사이로 찬바람이 잘도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한 요즘, 마침 집 밖을 잘 나갈 수도 없게 된 상황이 되다 보니 벽 어딘가에 비스듬히 걸리는 햇빛에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아침이 되면 오른쪽 벽에 나타나 시간이 흐를수록 슬슬 내려와 바닥을 쓰다듬더니, 책상에 앉은 나를 훑고는 왼쪽 벽 옷장으로 제 모양을 가느다랗게 굽히며 지나간다. 지난 계절보다 더 선명해지고 길어진 사다리꼴 형태의 온기는 내 방 구석구석을 헤집는 시계로 자리 잡았다. 한참을 책상 앞에 앉아있다 오른쪽 어깨에 햇빛이 내려앉은 것이 느껴지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오후 2시 반쯤 되었겠구나.”

직사각형 창문이 내 방에 직조해내는 빛은 선명한 마름모, 사다리꼴이었다. 나는 이따금 책상에서 눈을 떼 잠시 그 모양을 볼 때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파묻히고 싶은 형태라고 생각했다. 미적지근한 물이 일렁이는 수면이라면 얼굴을 파묻고 싶고, 이불이라면 돌돌 말려 파묻히고 싶고, 불이라면 데이고 싶은 것. 방 안에서 그런 따스한 것과 그 주변을 둘러싼 각진 그림자 위를 배회하는 찬 공기는 아주 미미한 차이만을 두고 맞닿아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순간, 무릎 아래 종아리에는 그림자가 걸치고 허벅지에는 햇빛이 걸쳐진 그 작은 차이가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고요한 순간에 느낄 수 있는 온도의 차이였다. 딱 그런 순간, 그러한 온도를 인지하며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속 창가에 쏟아지는 햇빛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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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 조금 넘었으려나"

 
흔히 고독을 그렸다고 이야기되는 호퍼의 그림 속에서 나는 종종 따스함을 목격하곤 했다. “고독의 온도가 이렇게 포근한 것이었나” 싶은 질문이 떠오를 정도로, 잠시 머물렀다 간 햇빛에 데워진 보드라운 카펫처럼 그 온도를 목격했다. 차가운 콘크리트와 맞물린 벽지 위, 잠시 지나간 햇빛으로 겨우 데워진 그곳에 뺨을 대었을 때 느껴지는 미묘한 온도같이 그것을 목격했다. 홀로 남은 고독한 순간에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그 누구로부터 쉬이 얻을 수 없는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온도. 나조차 얻고자 하지 않았을 때 불현듯 다가온 온도가 이런 것일까 생각했다.

이 온도는 ‘따듯하다’, 굳이 수식어를 덧붙이자면 ‘모호하게 따듯하다’라는 표현만으로는 결코 표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단지 온도뿐만이 아닌 시간의 흐름을 지닌 순간이고, 내가 있기에 일어난 새로운 경험이고, 일상 속에 있으나 분명 일상과는 다른 무엇인가였다. 실제로 에드워드 호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릴 이유가 없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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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넷 피쉬, Herb Tea, 1995
© Janet Fish

 
이 상념은 어떤 온도에 집착하고 있다. 요즘답지 않게 따듯한 그림을 찾아 나서는 나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매년 12월이 다가올 즈음이 되면 꼭 우울감이 나를 덮치곤 하는데, 올해는 이상하리 만큼 스스로도 우울증에 허우적거리지 않겠노라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 다짐의 반사작용인지, 방어작용인지, 의지인지, 두려움인지, 지금의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따스한 그림들을 찾아 나서고 있는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잠시 머물러보고 싶은 그림들을 말이다.

이런 작품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어디에 의지할 수 있었을까. 어디도 쉬이 갈 수 없고, 사람도 없이 홀로 남은 순간에, 누가 한 말인지조차 알 수 없는 말들로 어지럽기만 한 이 가운데서, 아무런 자극이나 요구 없이 그저 내가 읊는 대로 잠시 의지할 수 있는 것을 어디서 기대할 수 있었을까. 문득 이런 질문들이 떠오른다.
 
글의 끝자락을 향해 갈수록 발터 베냐민의 “가장 일상적인 것은 지구의 무게를 지닌다”라는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돈다. 더 잦은 것과 가까운 것에서 아무런 무게를 느끼지 못한다면, 대부분 일상으로 반복되는 삶의 무게는 얼마나 제 무게를 지닐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러기에, 거창한 주제나 스케일을 지닌 작품이 아닌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장면을 고스란히 그리고 선명하게 담아낸 작품들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더욱이나 헛헛한 마음에 바람 하나 없는 허공에도 날아가 버리는 깃털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일상을 생각하자면, 그 작은 깃털 하나도 소중히 붙들고 쉽게 놓아주지 않았던 예술가의 시선과 움직임을 가만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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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로루소, Reading the Sonnet
© Joseph Lorusso

 
마음이 버거울수록, 좋아하던 것이 부담이 되려 할수록, 잠시라도 내가 비로소 머물고 싶었던 것들을 붙들고 싶다. 주머니에 담고 다니는 흔하디흔한 손난로처럼, 거창한 것이 아닌데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지금 이 순간을 조금 더 견딜 수 있게 하는 작품을 붙들고 싶다. 내가 본래 그런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런 마음이 유독 커지는 시기인 것 같다.
 
사실 언젠가 이런 글을 한 번쯤은 써보고 싶기도 했다. "특별한 것 없이 내가 품을 수 있을 만큼의 소박한 보물 상자 같은 글을 써보는 게 어떨까"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기준 없이 지금의 마음과 시선을 포근하게 감싸는 것들을 한 데 모아놓은 글을 써보고 싶었다. 지금껏 내가 예술을 두고 해보았던 크고 작은 ‘여정’들 중에서 가장 별다른 이유 없이, 가장 말없이 따뜻했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한 기록을 말이다.
 
 
1) 『릴케 단편선』(문예출판사), 역자 송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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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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