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_나태주

글 입력 2020.11.28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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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를 다닐 때, 매일 써야 하는 일기가 지루해서 일기 대신 시를 쓰곤 했다. 시가 뭔지도 몰랐던 나이지만 그날의 날씨, 그날 있었던 일 등을 짧은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시 안에서는 빗방울도 말을 할 수 있고 손을 들어 인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름 나는 내가 시를 잘 쓴다고 생각했다. 선생님들께서 늘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셨으니까.

 

대학생이 되었다.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시로 표현하는 과제가 있었다. 나는 자신 있었다. '참 잘했어요' 도장의 주인공이 바로 나였으니까! 하지만 학우들의 평가는 냉정했다. 내 시는 학우들의 관심 밖의 결과물이었고 나는 꽤 심한 좌절감을 느꼈다. 다시는 시를 쓰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눈물을 삼켰다.

 

그런데 요즘, 다시 시가 좋아졌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를 '읽는 것'이 좋아졌다. 뼈아픈 평가 이후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시였는데, 어느 날 우연히 다시 만난 시는 겸연쩍게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마음이 닫혀있었던 나는 제대로 눈길조차 주지 않으려 애썼지만, 끈질긴 구애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내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


책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는 엮은이 나태주 시인, 그가 좋아하는 시들을 엮어 만든 시집이다. 따라서 일반 시집과 달리 그의 시평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데, 그 감상조차 한 편의 시처럼 느껴져 읽는 맛이 있다.

 

시집에는 다양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인상적이었던 한 편의 시를 소개해보려 한다.

 

 


이 맑은 가을 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 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 밖에는ㅡ.


허영자

 


개인적으로 위의 「감」이라는 시를 보고 괜스레 마음이 울컥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에게는 붉게 익어가는 감처럼 세월을 따라 자연스럽게 성숙해져가는 인생을 떠올리는 초연한 시일 수 있으나, 나에게는 내 지금의 모습을 거울처럼 온전히 투영하는 자기 성찰적 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느덧 성인의 반열에 오른지 꽤 시간이 흐른 나는 요새 종종 20살 초반의 내가 어땠던가, 떠올리곤 한다. 당시의 내 피는 떫었지만 푸르렀다. 두려운 것보다 즐거운 것이 많았고 걱정보단 패기가 앞서던 시절, 하루가 너무 즐거웠던 내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본다. 지금의 내 피는 무르익었지만 생기를 찾아볼 수 없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성숙해진 반면, 즐거움이 사라졌고 삶을 대하는 여유가 생긴 반면, 걱정과 근심이 한가득이다.

 

이런 변화를 겪고 있는 내게 시는 봄과 여름을 지나 '맑은 가을 햇살' 아래 놓인 감이 익어갈 수밖에 없듯, 나의 변화 역시 '누구도 어쩔 수 없다'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라서,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왜 마음은 이리도 일렁이는 걸까? 다시는 그때의 나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아서, 아니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나도 모르게 서운한 마음이 터져 나왔나 보다. 나는 아무래도 그때의 나를 많이, 참 많이도 그리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는 숨겨두었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을 표면 위로 끄집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이 강력한 시일 수록 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자연히 전해지며 오래도록 사랑을 받는다. 이제는 안다. 과거, 내가 썼던 시에는 그 힘이 상당히 부족했었다. 그 시의 제목조차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만큼 강렬함이 없는 시였다는 증거일 테다.

 

이제야 시가 무엇인지, 더듬더듬 알아가고 있는 시점에서 시집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시인이 '직접' 선정한 시라는 점에서 깊이 있는 시들을 한 번에 감상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내 마음을 일렁이는 시들과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가 주는 여운, 단어 하나만으로 기꺼운 마음을 자아내는 시의 깊이를 물씬, 그리고 힘껏 경험할 수 있었다.

 

시집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를 읽으며, 어쩌면 내가 읽고 있는 이 시가 나보다 더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은 내가 먼저 '시'와 친해지기 위한 애정공세를 펼치게 될 것 같다.

 

 

시가_나에게_살라고_한다_평면.jpg


 

[김규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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