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친애하는 찰스 부코스키 아저씨께 -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

글 입력 2020.11.24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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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사람을 괴롭히는지 단정 지을 수 없다. 아주 사소한 것도 어떤 마음가짐이냐에 따라 끔찍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끔찍한 근심/두려움/고통이 주는 피로는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생각에서 지워 버릴 수도 없다. 판금 조각처럼 몸에 박혀서 떨어지지 않는다. 시간당 25달러를 받아도 말이다. 나도 안다.

 

-142p

 

 

 

친애하는 찰스 부코스키 아저씨께


 

안녕하세요, 아저씨. 저는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을 막 읽은, 아저씨의 도움이 필요한 독자예요. 아저씨가 쓴 글을 읽고 깜짝 놀라 편지를 쓰기로 다짐했어요. 지금부터 제 병증을 고백하려 해요.

 

저는 조용하고 슬기롭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어요. 눈앞의 기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책은 책장에 꽂힌 채로만 두고, 작은 모바일 화면에 온 마음을 빼앗겨요. 깨어 있는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할 정도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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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는 음란하고 만취해 있는 사람을 내세워 글을 썼잖아요. 그 사람이 정말 아저씨일 리는 없을 거예요.

 

제 생각에 아저씨는 분별력 있고 따뜻한 사람일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냐는 거예요. 자신의 못난 부분을 현미경으로 확대해 보여주다니.

 

저는 한심하고 부끄러운 일상을 숨기기에 급해요. 삼킨 걸 소화하지도 못하고 잔뜩 토해내 버려요. 그러고는 또 새로운 걸 집어넣죠. 자주 극장을 찾아요. 하지만 제가 본 것들을 정말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매일 새로운 무기력에 빠져요. 적응될 일이 없죠.

 

얼마 전에는 제가 존경하는 분께 조언을 구했어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모든 것을 오해한 채로 글을 써 내려 갈까 두렵다고. 그분은 참 따뜻하게도 제가 듣고 싶어 한 말을 해 주셨어요.

 

정독은 없고, 오독도 없는 것이라고. 일단 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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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 어린 조언에 조금 단단해지는 듯하다가 다시 흔들리고 있어요. 방탕하게 살아갈지 반듯하게 살아갈지 아직도 정하지 못했어요. 물론 제가 정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말이죠. 세상에는 뜻대로 되는 일이 없지만,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건 자유니까요.

 

상상 속 저는 좀 더 대범해요. 멀쩡한 차들을 사고 내기도 하고, 애꿎은 건물을 폭파하기도 하고, 가게에서 물건을 슬쩍하기도 하고, 공간을 접어 순식간에 아주 멀리 이동하기도 해요. 상상 속에서는 온전히 세상의 중심은 저예요. 그래서 아주 달콤해요.

 

그런데 아저씨는 실패를 인정하고 사는 것처럼 보여요. 모든 일에 능통한 듯, 모든 평가에 달관한 듯 거침이 없어요. 제가 머릿속에서 부끄럽게 지워낸 것들을 아저씨는 당당하게 활자로 소환시켰어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죠? 자신을 위해서였나요, 독자를 위해서였나요, 아니면 둘 다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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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힘들다는 거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에서 근무하는 게?"

 

"그는 밤에 자동차 극장을 운영해요. 그래서 못 쉬어요."

 

"하, 그럼 난 게으른 돼지 새끼네!"

 

"맞아요." 그녀가 다정하게 동의했다. 그날 저녁 화분은 두 번 더 떨어졌다.

 

-188p

 

 

독자 입장에서 책 속의 ‘부코스키’를 보면 참 막 돼먹었다 싶어요. 욕을 하고, 섹스하고, 도박하는데 그 무엇도 숨기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행동하는 것도요. 입이 거칠고 성욕이 넘치고 냉소적인 부코스키씨. 저는 어떡하면 좋을까요.

 

아저씨가 <오픈시티> 잡지에 매주 부지런히 글을 연재한 것처럼 저도 부지런해질 수 있을까요. 겉으로는 단단하고 딱딱하지만, 속은 부드럽고 따뜻해질 수 있을까요. 갑자기 과일이 먹고 싶어지네요. 키위나 바나나, 멜론 같은 것 말이에요. 연하게 노랗고, 쨍하게 초록인 것들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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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 있는 아저씨께 조금 긴 푸념의 편지를 보내요. 과분한 답신은 바라지 않을게요.

 

대신 아저씨의 시집 <창작 수업>을 펼쳐 읽어보려 해요. 그러다 보면 예술가의 삶과 고통을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요? 어느 순간 기타를 손에 쥐고 책장 위 먼지를 털어내게 되지 않을까요? 진심으로 그러기만을 바라봅니다.

 

저는 제가 잘 되었으면 하거든요. 아저씨가 그랬던 것처럼요.

 

2020년 마침표를 찍기 전, 어느 독자 올림.

 

*


찰스 부코스키
 
1920년 8월 16일 독일 안더나흐에서 태어나 세 살 때 미국 캘리포니아주로 건너갔고 로스앤젤레스에서 평생을 살았다. 로스앤젤레스시티컬리지를 2년 만에 중퇴하고 독학으로 작가 훈련을 했다. 로스앤젤레스시립중앙도서관에서 청춘을 보내며 도스토옙스키, 투르게네프, 니체, DH 로렌스, 셀린, EE 커밍스, 파운드, 판테, 사로얀 등의 영향을 받았다. 스물네 살 때 잡지에 첫 단편을 발표한 이후 창고와 공장을 전전하다 우연히 취직한 우체국에서 우편 분류와 배달 직원으로 12년간 일하며 시를 쓴다. 잦은 지각과 결근으로 해고 직전에 있을 때, 전업으로 글을 쓰면 매달 100달러를 지급하겠다는 출판사의 제안을 받아들인 일화는 유명하다.
 
미국 주류 문단의 이단아에서 전 세계 독자들이 열광적으로 추종하는 최고의 작가가 된 찰스 부코스키. 그의 작품은 그의 분신인 주인공 헨리 치나스키가 이끌어 간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도난당한 책이라는 명성만큼 수많은 예술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평생 60여 권의 소설과 시집, 산문집을 출간했으며 시나리오 작가로도 활동했다. 미키 루크 주연의 《술고래(Barfly)》(1987)를 비롯하여 그의 작품과 인생을 다룬 10여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마지막 장편소설 《펄프》를 완성하고 1994년 3월 9일 캘리포니아주 산페드로에서 백혈병으로 삶을 마감했다. 묘비명은 "애쓰지 마라(Don't Try)."
 
《우체국(Post Office)》(1971), 《팩토텀(Factotum)》(1975), 《여자들(Women)》(1978), 《호밀빵 햄 샌드위치(Ham on Rye)》(1982), 《평범한 광기 이야기(Tales of Ordinary Madness)》(1983), 《할리우드(Hollywood)》(1989), 《펄프(Pulp)》(1994) 등의 작품이 있다.
 
 
[임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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