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새삼스럽게 돌아보는 '엄마됨'이란 - 조영주 개인전 '코튼 시대' [시각예술]

마치 호흡처럼 자연스럽지만 당연하지 않은 것
글 입력 2020.11.16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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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 자연스럽지만 당연하지 않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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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이라는 활동은 생명의 유지와 직결된다. 그럼에도 ‘숨 쉬듯’이라는 표현은 당연함과 자연스러움을 의미하는 관형어로 굳어져 있다. 아무리 호흡이 일상 속 자연스러운 매커니즘의 일부라고 할지라도 호흡은 순식간에 중단될 수 있는 미약한 행위이다. 특히나 환경적 요인의 변화에 의해서라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조영주 작가는 개인전 <코튼 시대>에서 호흡이라는 키워드를 양육 과정과 연결시켜 바라본다. 본 전시는 대안공간 루프에서 지난 10월 7일에 개막해 28일에 막을 내렸다. 여성 예술가에게도 어김없이 부과되는 돌봄노동의 의무 속에서 그들의 작품 활동은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가부장제는 돌봄노동의 고충을 당연시하거나 고통스럽지 않은 것으로 치부했고, 그 속에서 여성들의 육아 현장은 항상 묵인되어 왔다.

 

 

여태껏 남성 예술가에게 하지 않았던 질문, "아이를 키우면서, 작업하실 수 있겠어요?" '엄마됨'의 첫 해, 여성은 고립감에 빠져들기 마련이다. 제 경험이 갖는 의미를 생각할 시간이나, 제 노동을 평가하는 시스템에 대해 반론할 여력 조차 부족하다.

 

(중략)

 

엄마됨을 주제로 한 여성 예술가에게 하는 질문, "남들 다하는 육아 하면서, 왜 너만 호들갑 떠느냐." 엄마됨의 경험은 보편적인 동시에 사적이기에 충격적인 경험이다. 하지만 가부장제 속에서 여성은 이 경험을 충격적이라 생각하지 않도록 길들여진다. 여전히 남성중심적인 주류 현대예술계에서도 엄마됨이라는 주제는 급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엄마됨에 대한 질문은 현실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아닌, 전통적인 모성애에 대한 케케묵은 반감 정도로 분류될 뿐이다.

 

- 대안공간 루프 디렉터 양지윤, 코튼 시대COTTON ERA 서문 中

 

 

조영주 작가는 직접 겪은 육아의 과정을 세세히 기록하고 그것을 자신의 작업 주제로 끌어온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육아를 '어머니의 사랑'으로만 가능한 위대한 과정으로 격상시키지도, 육아를 여성의 책무로 당연시하는 풍토를 향해 울분을 토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이 겪은 '엄마됨'의 과정과 경험을 자연스럽게 돌아볼 뿐이다.

 

본격적으로 각 작품들을 톺아보기 이전에, 이 전시에서 '호흡'은 여성의 육아와 관련해 두 가지 측면에서 읽힐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첫 번째, '육아가 여성에게 전가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현상은 우리가 호흡을 당연시하는 인식과 유사하다.' 두 번째, '엄마의 호흡이 아기의 호흡을 좌우한다.'

 


  

<입술 위의 깃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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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술 위의 깃털 Feathers on Lips,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10:30, 2020

 

 

전시 공간을 들어서자마자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입술 위의 깃털>에서 네 명의 여성 퍼포머들은 릴레이식으로 알 수 없는 몸싸움을 이어간다. 처음에는 천천히 서로의 몸과 몸을 포개거나, 상대의 몸을 팔다리로 두르고 단단히 옭아매는 행위로 시작한다. 점차 그 행위는 주짓수와 같은 몸싸움의 형태로 변화한다. 아무런 맥락도 없는 흰 배경 속에서 영상을 점령하는 것은 거친 숨소리이다. 그러다 한순간 그들은 싸움을 멈추고, 한 명이 무미건조하게 자리를 뜬다. 그리고 다음 퍼포머가 등장해 남아 있는 이와 새로운 경기를 펼친다.

 

즉흥적인 스포츠 경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철저하게 설계된 퍼포머들의 동작과, 그 사이의 육체적 관계나 거친 숨소리는 여성과 육아라는 전시 주제 안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초반부의 동작은 마치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하는 일종의 보살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서로가 서로를 매듭 짓고 단단히 지탱하는 과정은 너무나 정제되어 있어서, 일정한 매뉴얼 혹은 규칙에 따른 행위라는 사실이 분명히 느껴진다. 이 장면에서 필자는 당사자의 생생한 고찰 없이 피상적으로만 묘사되는 육아의 과정을 떠올렸다.

 

그러나 점차 퍼포머들의 동작은 다음을 예상할 수 없는 몸다툼이 되어 간다. 이에 따라 그들의 동작이 사전에 설계된 안무라는 사실은 점점 흐려지고, 초반부에서는 의식하지 않았던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우리의 감각을 사로잡는다. 이 전시에서 호흡은 육아의 진면모를 일깨우는 장치이기에, 이 작품 속 숨소리 역시 간과되었거나 발언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육아의 치열함과 예측 불가능성을 상기시키는 듯하다.

 

 

 

<불완전한 생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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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완전한 생활, 2채널 영상, 각 1~2분,

칼라, 사운드, 자막(한국어), 2019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면 2채널 영상 작품 <불완전한 생활>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왼쪽 화면은 아쿠아리움 따위의 쇼에서 인어공주로 분장한 다이버의 공연을, 오른쪽 화면은 날이 저문 시간대에 불 켜진 아파트의 모습을 배경으로 한다. 각 화면에서는 서로 다른 문장들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간다. 좌측 화면은 ‘귀여움’에 대한 내용을, 우측 화면은 ‘쾌활함’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각 문장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귀여운 사람들은 단 것을 좋아한다. 그들끼리만 모이면 작업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작업을 어느새 계속하고 있다. 그들의 작품은 소녀와 같다. 소녀들은 단 것을 좋아한다.’ ‘나는 언제나 쾌활함을 요구받는다. 쾌활함이란 주변인을 안전히 보호하고 어려운 상황을 감내하는 것이다.’ 이렇듯 ‘쾌활함’과 ‘귀여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의미와는 다른 방향으로 설명되고 있다.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이 문장들은 대체 무슨 뜻일까? 또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아쿠아리움의 물고기와 인어공주, 저녁 시간대의 불 켜진 아파트는 무엇을 의미할까? 전시의 맥락을 고려해 보면, 작품의 내용은 여성에게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특정한 기준에 대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이 체질이든 과업이든, 누군가에게 불합리하게 강요되는 것들을 당연하고 긍정적인 것으로 포장해 그 속의 불편함을 침묵하게 만드는 상황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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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우측 모니터부터 들여다보자. 밤이지만 아파트에 환히 불이 켜진 것으로 보아 화면 속 시간대는 저녁으로 보인다. 육아와 작업을 병행해야 하는 작가뿐만 아니라 가사노동과 경제활동을 겸해야 하는 모든 여성들에게 저녁 시간대란 퇴근 이후의 편안한 휴식 시간으로만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업무의 시작인 저녁 시간대의 풍경을 배경으로, 흘러가는 문장들은 자신에게 요구되는 쾌활함이란 어떤 어려움도 감내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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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좌측의 모니터에서 산소통이나 호흡기를 달지 않은 채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다이버들은 전시의 전반적인 주제인 ‘호흡’을 상기시킨다. 다이버는 겉보기에는 동화 속 인어공주처럼 보이지만 숨을 참은 채 가짜 인어 꼬리를 달고 유영할 뿐이다. 이 모습에 화면 속 문장을 대입해 보면 괜찮지 않지만 괜찮은 척하는 모습, 혹은 괜찮지 않지만 그런 줄도 모르는 모습처럼 다가온다.

 

'귀여운' 사람들끼리 모여서 우리만 있는 세상이라면 예술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다가도 예술을 하게 된다? 이때 예술이란 어떤 의미일까. 대부분의 예술은 모순된 현실의 구조에서 동기를 얻는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작품 활동을 막고 스스로를 가두는 '귀여움'이라는 프레임, 그러한 부조리한 상황이 도리어 예술 활동을 자극하는 현실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혼란 상황을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다.

 

 

 

<세 개의 숨>,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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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개의 숨 In Three Breaths,

영상/사운드 설치, 함석 배기관, 12:37, 2020

 

 

그리고 이 전시의 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세 개의 숨>은 덕트 배기관 설치와 함께 상영되는 영상 작품이다. 네 명의 남성 연주자들이 튜바나 퍼큐션, 베이스 클라리넷과 알토 색소폰 등으로 낮은 소리를 내고 있는데, 이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1악장과 2악장, 3악장으로 구성된다. 협업 작곡가 이은지는 육아일지에서 3시기를 기반으로 곡을 썼다고 한다. 또한 설명에 따르면 1악장은 아이의 호흡이 엄마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을, 2-3악장은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음고를 가진 소리의 형태로 변이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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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악장에서는 연주자들이 악기를 통해 내뿜는 숨소리만 들릴 뿐 악기의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이 숨소리는 덕트 배기관 안에 자리잡은 별도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데, 이것은 배기관 설치물이 탯줄을 모티브 삼았기 때문이다.

 

탯줄은 아기에게는 엄마의 신체를 빌려 호흡할 수 있는, 자신의 생명유지와 직결된 기관이다. 그리고 금속의 배기관과 마찬가지로 번쩍거리는 금관악기들은 아기의 호흡을 가능케 하는 엄마의 존재를 다시 한 번 대변한다. ‘엄마의 육체로부터 아이의 호흡이 분리된다'라는 설명에서도 연상할 수 있듯이 악기는 엄마,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는 아기의 호흡을 은유하는 듯하다.

 

그리고 2-3악장에서는 점점 악기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아기가 성장함에 따라 스스로의 목소리를 확립하고 자율적인 호흡이 가능해지는 상황을 의미한다. 그러나 각 악기들의 소리는 조화를 이루지 않는 불협화음에 가깝다. "엄마의 심리는 아랑곳없이 자신의 요구만을 반복하는 아기, 일방적 소통이 주는 절망감, 관악기 연주 소리와 덕트를 통과해 만들어진 공기 소리의 조합은 끝없는 불협화음으로 이어진다.“ (양지윤, <코튼 시대COTTON ERA> 전시 서문)

 

또 하나 주목할 점이 있다. 악기와 그 소리를 각각 엄마의 몸과 아기의 호흡에 빗대어 보았을 때 아무리 그 소리가 무성의 숨소리에서 유성의 음성으로 성장해 모체로부터 독립되었다고 한들, 소리는 연주자의 호흡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아기는 끝없이 엄마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엄마이자 예술가로서 작가는 이 상황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

 

조영주 작가는 이 어려운 질문에 어렵게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엄마가 되기까지의 경험을 솔직하게 전시실로 가져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전시가 사회적으로 조직된 억압에 순응한다고 보았다면 그렇지 않다. 여성의 육아를 흔하고 당연한 것으로 보는 사회적인 시각 아래에는 그 어떤 통찰도 없기에 여성 예술가의 시각에서 묘사되는 육아의 과정은 그 자체로 새삼스럽기 때문이다.

 

서문에 따르면 전시의 제목 '코튼 시대'에서 코튼은 기저귀나 수건, 침구처럼 아기를 돌보는 소재를 뜻하는 한편, 빨래와 같은 무급 가사 노동과 방직 노동과 같은 전형적인 여성 유급 노동을 은유하기도 한다. 땀을 빠르게 흡수하고 언제나 아기를 외부로부터 보호해주는 코튼의 특성은 참을성 있고 따뜻한 어머니의 품으로 치환되고, 이러한 관념은 노련하면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 여성의 육아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동시에 코튼이 연상시키는 여성의 무·유급 노동은 그러한 당위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엄마가 되어 한 생명의 삶을 책임진다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평범한 일이 아니다. 여성만의 과업으로 여겨질 일도, 그 고충을 침묵시킬 것도 아니다. 결국 오랜 시간 동안 당연시되어 왔던 문제에 '새삼스럽게 주목'하는 것이야말로 지금의 상황을 바꾸는 시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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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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