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입덕을 조심하세요 - 문학으로 덕질하다 [도서]

글 입력 2020.11.13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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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순, 나혜석, 보들레르부터 이병헌, 알렉산더 멕퀸, 데이비드 보위까지. 직업부터 시대, 성별, 어느 하나 공통점이 없는 것 같은 이들이 책 한 권 안에 담겨 있다. 전기나 에세이도 아닌 단편소설로.


‘문학으로 덕질하다’는 저자 신중선이 오랜 시간 걸쳐 좋아하던 예술가들을 주제로 쓴 단편을 모은 책이다. 예술가가 작품의 주인공인 단편도 있고, 언급으로만 등장하는 단편도 있다. 시점도, 주인공도, 스토리도 다양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모두가 저자의 사랑과 애정으로 똘똘 뭉쳐 있다는 것이다.


단편들 중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작품은 나혜석과 이상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어서 그런지 더 흥미롭게 다가왔다. 변화가 폭풍처럼 몰아치던 20세기 초 근대의 중심. 나혜석과 이상은 모두 글쓰기를 숨구멍으로 삼았던 작가들이었다. 저자는 각각 ‘후회하지 않아’와 ‘술집 광’에서 나혜석과 이상을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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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하지 않아’는 나혜석의 독백 형식으로 꾸려진 소설이다. 예순도 되지 않은 나이에 길거리에서 객사한 나혜석이 생을 돌아보며 담담하게 자신을 회고하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울림이 컸다.

 

 

듣자니 근자들어 나, 나혜석이 새롭게 평가되고 있다고요? 한국 최초의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것 같던데 맞나요? 그러고 보니 최초라는 단어가 내게는 유독 많이 붙어 있습디다. 조선여성 최초의 서양화가, 조선여성 최초로 세계유람, 서울에서 최초로 개인 유화전을 연 여성, 이런 식으로요. 모두 ‘여성’이란 단어가 혹처럼 붙어있군요.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네요. (70쪽)

 

 

나혜석이라면 ‘조선 최초의’와 ‘여성’이 함께 붙은 수식어를 과연 자랑스러워할까? 이 단편에서 그리듯이, 나혜석이라면 자랑스러워하기보다 마뜩찮아 할 것 같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일평생 성별로 차별 받아 온, 그리고 그 차별에 누구보다 영리하고 열성적으로 맞섰던 나혜석이라면 여성보다도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을까. 경희가 나는 여성이기 전에 사람이다, 라는 고백을 했던 것처럼. (소설 ‘경희’)


이상을 주제로 한 단편 ‘술집 광’은 환상성을 잔뜩 품은 소설이다. 어느 날, 이자카야 술집 ‘광’에 의문의 남자가 등장한다.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던 남자의 입에서 ‘금홍’이라는 여인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술집 주인은 문득 제 앞에 앉아있는 남자의 정체가 이상임을 깨닫는다.


어느 날 갑자기 술집에 들이닥친 이상한 사람. 이상의 생애와도 겹쳐 보이는 내용이다.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작품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작가 이상은 작품 속 술집 ‘광’에 뜬금없이 들이닥친 것처럼 당대 문학계를 발칵 뒤집어버렸다. 그 울림은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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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이 책은 저자의 독특한 시선과 감각을 통해 덕질을 문학으로 풀어낸다. 책을 읽고 난 첫 번째 감상은 ‘이렇게 생산적으로 덕질을 할 수 있다니.’였다.

 

책을 읽고 나니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예술가가 궁금해지고, 책을 읽어보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고전 작가의 책이 궁금해졌다. 진정한 ‘성덕(성공한 덕후)’이 되는 순간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나 작가를 누군가가 같이 좋아할 때가 아닐까 한다. 글이, 특히 문학이 주는 힘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함께 하게 된 순간이었다.


타고나길 덕후 기질로 타고난 나는 어릴 때부터 버릇처럼 무언가에 몰입하고는 했었다. 집중력이 좋다는 이야기라면 자기소개서 속 나의 장점 칸을 빽빽하게 채우고도 남았겠지만 아쉽게도 집중력은 썩 좋지 않다. 그냥 한 우물 파기를 잘할 뿐이다. 만약 내 앞에 열 권의 책이 있으면 열 권을 아주 빠르게 스캔한 후, 내 취향에 맞는 책 한 권만 골라 서른 번 읽는 편이었다. 연극과 뮤지컬을 좋아하게 된 후에는 공연 하나를 스무 번 보는 것이 예삿일이 되었다.


좋아하는 것에 마음을 쏟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는 덕질을 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누군가는 일방적인 애정이 무슨 의미냐고, 그 사람은 너의 존재조차 모른다고 갸우뚱하지만 한 번이라도 덕질을 해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비록 돈과 시간, 체력, 그리고 감정을 진하게 소비해야 하는 일이기에 피로함이 절로 따라오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덕질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인생의 동력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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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사는가? 와 같은 철학적인 질문은 생각보다 삶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답이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위해 산다는 추상적인 대답은 오히려 의지를 꺾기 충분하다. 완전한 행복은 그저 허상 같고, 지금의 나는 완전한 행복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만 되새김질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조금 덜 생산적인 일일지라도 누군가를, 혹은 어떤 것을 사력을 다해 좋아하는 것이 삶을 사는 데 더 도움이 될 때가 있다. ‘문학으로 덕질하다’처럼, 누군가의 덕질이 이렇게나 흥미로울 때도 있으니 나의 덕질도 마냥 적자는 아니지 않을까. 새삼스럽게 용기가 생기는 순간이다.


나혜석부터 데이비드 보위까지, 책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이 예술가들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나도 모르게 이들에게 ‘입덕’을 해버릴 수도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유일한 단점이다.

 

 

[정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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