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의 극단 – NT Live 연극 '예르마'

글 입력 2020.10.22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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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에 본인 명의의 3층짜리 집이 있고, 다니는 신문사에서의 승진도 빨라 벌써 편집장이 되었으며,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리고 재력과 능력을 모두 갖춘) 남편이 있는 30대 여성.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삶이다. 예르마의 삶은 누구든 부러워할 법한 삶이었다. 그녀가 아기를 원하게 되기 전까지.

 

예르마는 성공한 삶의 모든 조건을 본인의 힘으로 이뤄왔기에, 아기 역시 쉽게 가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랬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아기가 생기기를 기다린다. 그런데, 아기가 들어서질 않는다. 그녀의 신경이 조금씩 곤두선다. 업무상 출장이 잦은 남편이 자신의 가임기에 단 하루만 집에 머문다는 사실이 그녀에겐 아주 예민한 문제다. 그녀 주변의 여자들은 ‘원하지도 않았는데’ 자꾸만 임신을 하고, 그 사실은 그녀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1년, 2년, 8년, 시간이 점점 흐르는 동안 그녀는 전혀 임신이 되지 않는다. 아기가 생기지 않는 것에 대해 남편 탓을 해 보고, 유산한 친언니를 향해 안쓰러운 마음보다는 다행스러움을 느끼면서 아기를 갖고 싶다는 그녀의 욕망은 서서히 집착이 되고, 집착은 광기로 번져간다. 남편 때문에 아기가 생기지 않는다며 옛 애인과 관계를 가지려 하고, 체외 수정을 수도 없이 시도하느라 모든 재산을 거덜 낸다. 그리고 충격적이게도, 아기가 들어서지 않는 이유는 바로 예르마 자신에게 있었다. 모든 것을 잃고 광기만 남은 예르마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오지 않는 자신의 아기를 찾아 자신이 먼저 이 세상을 떠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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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예르마가 아기를 갖고 싶다고 가볍게 말하는 순간부터 자기 자신의 욕망에 잠식해버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 인생의 중요한 몇몇 순간들을 짤막짤막하게 보여주고, 그렇지 못한 부분은 몇 년이나 되는 긴 시간이라고 해도 과감하게 건너뛰며 그녀가 변하는 과정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핵심 요약본을 보는 셈이다. 또한 배우들은 커다란 유리 박스 안, 별다른 소품이나 장치도 없는 무대에서 지극히 일상적인 말투와 과장되지 않은 톤으로 연기한다. 마치 동시대에 실재하는 누군가의 삶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무대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예르마라는 인물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하지 않고 예르마의 삶을 아주 객관적인 시각에서 분석하듯 바라볼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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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thetheatretimes

 

 

덕분에 나는 예르마에게서 한 발 떨어져 예르마의 욕망에 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예르마와 같은 현대의 성공한 여성이 ‘아기를 갖고 싶다’는 구시대 여성 캐릭터의 전형과 같은 욕망에 미친다는 걸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르마에게 있어 ‘임신’에 대한 욕망은 말 그대로 아기를 갖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아기가 상징하는 무언가, 혹은 아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을 향한 욕망이라고 보는 것이 조금 더 수용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그녀에게 있어 ‘아기’란 그녀가 어린 시절 받지 못한 내리사랑, 모성애를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극 중 예르마의 엄마는 자신의 인생이 우선이었던 탓에 예르마를 삶의 걸림돌로 여겼고, 충분히 사랑해주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예르마는 자라면서 단 한 번 엄마가 자신을 안아주었던 손길이 아주 “불편해 보였다”고 기억한다. 엄마와 충분한 친밀감, 애정 관계를 쌓지 못해 모성 결핍으로 자라난 예르마는 자식과의 관계에서 그를 충족하고 싶어한다. 자신의 아이가 넘어져서 다치면 자신에게 다가와 안기며 자신을 “세상의 전부”로 느끼고 기대며 자신을 믿어주길 바란다. 평생 채우지 못하고 살아온 단 한 가지를 아기가 채워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토록 아기를 간절하게 원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예르마를 광기로까지 몰아간 것은 단순한 박탈감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남들이 보기에 충분히 성공했고, 부러울 만한 삶을 살고 있는 예르마지만 남들은 다 가졌음에도 본인만 없는 단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아이다. “남들은 다 있는데, 왜 나만 없지?” 라는 아주 간단한 심리가 사람을 잠식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특히, 그 사람이 남들보다 스스로가 잘났다고 믿는 경우에 더 그렇다. 예르마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극 중 예르마는 자신의 말과 생각만이 옳다고 믿고 남들에게 충분히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서도 무언가가 잘못되면 남 탓을 우선 하고 보는 모순적이고 오만한 모습을 여러 번 드러낸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여성 등장 인물이 예르마가 블로그에 쓴 글이 별로라고 평할 때 그 말을 전혀 듣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 그렇다. 그런 오만함과 박탈감이 합쳐지고 쌓여 집착이 되고 광기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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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르마’는 100분 남짓의 아주 짧은 공연이었지만, 핵심적이고 가장 강한 임팩트를 가진 장면들만을 골라 보여주고 또 한 사람이 광기에 도달하는 과정을 지극히 현실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려낸다는 점에서 짧지만 아주 굵은 연극이었다. 무엇보다 주연을 맡은 배우 빌리 파이퍼의 연기가 압권이었다. 순식간에 바뀌는 시간적 배경 가운데서 시간의 흐름을 관객에게 충분히 잘 전달하면서도, 예르마의 섬세한 심리 변화와 극단적인 결말까지 설득력 있게 설명해내는 연기였다. 빌리 파이퍼의 표정과 몸짓, 목소리만으로도 극장이 꽉 채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압도적인 배우였다. 또한 꽤 오래 전에 쓰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여성 서사라는 점에서 시사할 점이 분명히 있는 극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으로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열 살 때, 스무 살 때, 스물다섯 살 때 읽는 느낌이 전부 다르듯 ‘예르마’도 스물다섯 살 때, 서른 살 때, 마흔 살 때 보는 느낌이 각각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예르마’는 고전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기에 충분할 정도의 가치를 지닌 작품이 아닐까?

 

 

[최우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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