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글쓰기는 다짐이니까 - 이지현의 이야기

글 입력 2020.10.18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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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의 서사


 

인턴 기자가 되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나를 지워야 한다’입니다. 수사가 많다, 표현이 중복된다, 두괄식으로 써야 한다, 같은 말도 들었습니다. 나는 주관을 배제하고 단문을 구사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제가 들었던 말은 하나로 수렴됐습니다. 글에 화자가 드러나 있다는 맥락이었습니다.

 

출근 첫날 국장은 기자의 글쓰기가 하찮다고 말했습니다. “기사는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고, 기자는 그 도구를 휘두르는 직업이다. 기사 몇 줄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우리는 현상을 글로 중개하는 이들이라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주관과 사상을 배제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거의 매일 혼납니다. 구태여 쓰지 않을 어휘와 문장의 수가 많다는 식입니다. 반성하고 가다듬어 다시 제출해도 돌아오는 말은 바뀌지 않습니다. “더 빼야 한다.”

 

그동안의 내 글쓰기를 되짚어 봅니다. 나는 솔직하게 썼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만한 나. 저열한 나. 비겁한 나. 그걸 글에 다 드러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겁니다. 어떤 순간, 나는 더 멋진 문장을 쓰고 싶어 어휘를 골랐고 같은 맥락의 문장을 또 썼습니다. 취재는 부족했지만 남의 문장을 인용했습니다. 문제 제기형 글에도 문제를 환기하는 일보다 내가 올바른 사상을 갖고 있음을 증명하려 문장을 골랐습니다. 이것 자체가 나를 포장하는 글쓰기 였습니다. 이런 글을 쓰는 나, 에 취하고 싶었던 겁니다. 생각해보니 그랬습니다. 보세요. 이미 이 문단 안에 오만함, 저열함, 비겁함, 이렇게 같은 맥락의 단어를 나열했습니다. 이렇게 나를 자학하는 표현을 반복해 자학으로서 내 윤리성을 입증하려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이제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글쓰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글에도 이 모양인데, 기자의 글쓰기를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나를 포장하고 싶은 마음은 어떻게 하면 버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솔직하게 글을 쓸까요. 내가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만났습니다. 당신의 글은 내가 읽었던 글 중에 가장 솔직했습니다. 물었습니다.

   

 

 

이지현의 서사


 

자기 인생을 서사화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러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전자에 가까워요. 내 인생을 편집하고 어떤 순간을 계속 곱씹습니다. 따지고 보면 글쓰기를 한 것도 자연스런 수순이지 않나 싶어요. 곱씹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싶어서. 나를 알고 싶어서.

 

착한 아이 증후군 같은 게 있었어요. 남에게 사랑받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어요. 그걸 위해 뭐든 잘해내려 했습니다. 중학교 때는 따돌림을 당했어요. 일련의 일을 겪은 후부터 제 인생의 기본값은 우울함었습니다. 즐겁지 않았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 특별한 궤적을 그릴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어요.

 

재수를 했습니다. 가장 많은 노력을 했던 시기입니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왔어요. 내 삶의 기본 값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더 열심히 했습니다. 변할 수 있다는 자각이 들었으니까.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나는 변했고, 앞으로도 변할 수 있다는 감각이었습니다. 동아리나 학회에 가입하고 여러 단체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재미있었습니다. 즐거웠습니다.

 

밴드 활동도 했어요. 보컬이었습니다. 좋아했지만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활동을 지속한 건, 나를 규정했던 언어나 평가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고 싶은 건 뭐든 다 해보자는 주의로 대학생활에 임했습니다. 공연기획도 해봤어요. 어쩌다 떠맡았는데 이리저리 수소문하며 흉내를 냈습니다. 라디오처럼 사연을 소개하는 시간도 가지고. 너무 재밌었어요. 공연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피드백도 좋았습니다. 아직 진로를 결정하진 않았지만 동아리 공연을 계기로 문화 기획 쪽 직업을 생각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뭔가 삐걱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가 버틸 수 있는 총량을 넘어서 관계나 활동에 시간을 쏟은 겁니다. ‘나’는 없어지고 있었습니다. 내 감정을 돌아볼 여유조차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가족에게 역시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웃고 떠들고 다른 사람들과 섞이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엔 우울했습니다.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휴학을 결심했습니다.

 

 

 

글쓰기는 자아 이동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한건 휴학 때부터였습니다. 나에게 확신이 없던 시기였어요. 무엇하나 확실한 게 없던 때였습니다. 글쓰기는 뿌리를 내리는 일이었어요.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모호하게 뭉쳐있던 생각을 글을 통해 정리했습니다. 그렇게 쓴 글은 힘이 생겨요. 단정이고 확언이 됩니다. 글에다 쓰면 내 생각이 지워지지 않으니까. 그래서 더 정리하고 골랐습니다. 글속 화자를 닮고 싶다는 생각으로 글을 썼습니다.

 

글 쓸 때 가장 경계한 건 자기연민입니다. 그건 나를 갉아먹는 생각입니다. 나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추합니다. 솔직하게 쓰려했습니다. 자기연민을 배격했습니다.

 

“인생재건 프로젝트”란 글을 쓴 적 있습니다. 거기서 “글쓰기는 자아 표현이 아니라 자아해방이고 동시에 이동”이라는 문장을 인용했습니다. 정혜윤 작가의 말입니다.

 

생각은 추상적입니다. 형태가 보이지 않습니다. 글쓰기는 그 추상을 구체화 하는 일입니다. 기저에 깔린 감정까지 끌어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글쓰기는 자아를 형성합니다. 내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글쓰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글쓰기는 자아를 해방합니다. 자아를 확장시켜서입니다. 자아를 확장하는 일은 타인과 세계를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타인의 말이나 문장을 내 글쓰기의 재료로 삼을 때가 있습니다. 또, 내가 겪은 세계와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글을 씁니다. 나는 글쓰기를 하면서 그들의 생각에 공감하고 세계를 이해합니다. 자아를 해방하는 일은 구태여 글쓰기를 통해서가 아니어도 될 겁니다. 그러나 나는 글쓰기를 제일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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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자아가 타인에게 온전히 이입하기를 바랍니다. 타인을 이해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걸 글쓰기를 통해 이루고 싶습니다. 그래서 ‘글쓰기는 자아 이동’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어쩌면 하고 되뇌어 봅니다. 어쩌면 글쓰기는 사랑과 닮았을지도 모르겠네요. 누군가를 사랑하면 내 자아가 확장됩니다. 사랑은 내가 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경험하는 일이니까.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의 처지를 오롯이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 사람의 심정으로 들어가 차라리 그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여길 때도 있습니다.

 

글쓰기가 사랑과 비슷한 건 이런 지점이 아닐까요. 이슬아 작가도 글쓰기는 부지런한 사랑이라고 표현한 적 있네요. 글쓰기는 흘러가는 생각을 흘러가지 않게 잡아두는 일입니다. 이것 자체가 부지런한 일입니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너와 나는 단독자지만, 사랑은 너와 나를 우리로 잡아끄는 지난한 과정이니까요.

 

 

 

남이 나를 구원할 수 없다. 나는 나를 구원할 수 있다.


 

외로움 전문가가 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외로움의 매커니즘은 어떻게 작동하는 걸까. 나는 왜 외로운 걸까. 외로워서 죽고 싶을 때가 있었고 동시에 외로워서 나쁘지 않다고 느낄 때가 있었습니다. 외로움 자체가 나쁜 건 아닙니다.

 

다만 외로움을 어떻게 다스리는지가 중요합니다. 남을 필요로 하는 외로움은 파괴적입니다. 남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게 됩니다. 외로워서 친구를 만나면 돌아가는 길에 다시 복원됩니다. 남을 필요로 하는 외로움은 남에게 내 감정의 열쇠를 쥐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남의 행동에 일희일비하고 타인이 내 감정을 지배합니다.

 

그건 결국 나를 망치는 일입니다. 외로웠고 그래서 슬픈 때가 많았습니다. 이제, 외로움은 필연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마냥 슬퍼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일단 내가 단단해야겠다고 느낍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에게 이끌려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허공으로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아를 2개로 만들어야겠습니다. 확실한 나와 남에게 보여 지는 나를 만드는 겁니다. 내가 아는 확실한 나를 만들어야 외로움을 그저 흘려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나하면, 삶은 이별을 대면하는 과정이니까. 나중에 거기 오롯이 서 있는 건 ‘나’일 테니까. 어릴 때는 영원을 쉽게 믿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영원할 거라 믿었습니다. 성장은 그게 아니란 걸 깨닫는 과정입니다. 엄마가 아팠던 때. 사랑하는 친구들이 위태로워 보일 때. 혹은 내가 사랑하는 나의 모습. 그런 것들을 보며 영원한 건 없다는 생각이 피었습니다.

 

이별 역시 필연입니다. 그래서 외로움도 필연입니다. 냉소를 갖고 있어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별의 여파를 덜어주도록 기능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막상 닥치면 슬픈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지속해서 되새겨도 되새길 때마다 아팠습니다. 그럼에도 끝이 다가오는 감각이 들면 냉소합니다. 그래도 냉소가 고통을 덜어주는 쿠션쯤은 되지 않겠냐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는 다짐이니까


 

당신은 ‘지금의 나를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때가 있다고, 열등감과 자격지심과 찌질함에 매몰돼 도무지 나를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나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냐고 묻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라, 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무기력에 찌든 나를 사랑하면 그건 자기연민입니다. 글을 쓰세요. 글에 다짐을 적으세요. 어리석은 나를 털어내세요. 변명에 그치지 말고 반성하면서 이제부터 어떻게 하겠다는 다짐을 쓰세요.

 

그러면 나를 사랑할 수 있어요. 나는 그랬습니다. 관성처럼 부끄러운 나로 돌아갈 때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글을 쓰며 나를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되고 싶은 나를 적고 거기 도달하기 위해 조금씩 애써보세요. 당신은 자신을 좋아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동시에 어떻게 하면 나를 사랑할 수 있는지 묻는 질문입니다. 내가 말한 것처럼 해보면 어떨까요. 실은 누구에게나 나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더 좋은 나를, 더 멋진 나를 선물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며 그렇게 글쓰기를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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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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