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아버지의 사과 편지 [도서]

글 입력 2020.09.20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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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책은 '사과'에 관한 이야기이다. 일반적인 상식에서 사과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하기 마련인데, 이 책의 작가는 가해자인 아버지가 피해자이자 딸인 자신에게 사과 편지를 보내는 일을 '상상'함으로써 수십 년 동안 묻어둔 진실을 생생하게 복원해낸다.


독특한 글쓰기 방식을 통해 사과를 이야기하는 이 책의 작가는 이브 엔슬러로 세계적인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작가이자 사회운동가지만 동시에 친족 성폭력 생존자이기도 하다. 그는 성폭력 생존자로서 피해 내용을 낱낱이 밝히고 가해자인 아버지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요구한다.

 

하지만 그가 심판대에 세워야 하는 가해자는 이미 31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사과 편지(심심 刊, 원제 : The Apology)》는 책임을 회피한 채 세상을 떠난 가해자, 더 이상 어떤 법적 처벌도 할 수 없고, 사과조차 기대할 수 없는 아버지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피해자인 자신 앞에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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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글은 '사랑하는 에비'로 시작된다. 아버지는 저자를 부르던 애칭인 에비를 사용하여 편지의 포문을 연다. 너에게 편지를 쓰다니 참 이상하다는 말과 함께.


그는 자신의 행동의 근원을 찾기 위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의 유년기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우리는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발견하게 된다.


당시 아버지의 부모님은 유명하고 인기 많았던 독일 의사 다니엘 고틀리프 모리츠 슈레버의 신봉자였다. 슈레버 박사는 아기들이란 처음부터 복종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울지 않도록 훈련해야 한다는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야 아기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는 부모에게 아이를 껴안거나, 보듬거나, 입을 맞추거나 하는 신체적인 애정 표현을 삼가도록 주문했다.


애정을 억제해 공포와 수치심을 주면 아이들은 권위 있는 인물에게 복종하며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이론이었다.


사과 편지 속 아버지는 딸에게 성적인 학대를 일삼고 심한 신체적, 정신적 폭력을 휘두른 이유를 자신이 복종을 강요하는 억압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데서 찾는다. 그로 인해 권위와 남자다움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가족이라는 왕국 속에서 아내와 아이는 엄격하게 다뤄야 할 자신의 소유물이었다고 고백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행복하지 않은 인생을 살던 자신에게 커다란 삶의 기쁨을 느끼게 해준 딸은 너무나 사랑스러운 존재였다고, 그래서 자기 안에 꽁꽁 숨겨둔 탐욕스러운 욕망을 억누르지 못해 다섯 살 아이를 성적으로 착취했다고 아버지는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드러날까 봐 딸이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고, 가족 모두가 딸을 가족의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로 받아들이게 만들었으며, 딸을 끊임없이 궁지로 몰아넣어 스스로를 나쁜 사람으로 여기도록 조종했다고 이야기한다.


아버지가 꺼내놓은 이 기막힌 이야기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의 본질을 드러낸다. 더불어 이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 '가부장제'라는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비극적인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의 행동을 합리화하며 악행을 이어간다. 가족들은 그런 상황을 묵인하고 아버지가 저지르는 폭력과 학대에 동조하며 엔슬러를 고립시킨다. 편지는 가감 없이 이브 엔슬러가 겪은 아픔을 묘사한다.

 

 

 

아버지의 서사를 꺼낸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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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엔슬러가 아버지의 목소리로 그를 고발한다고 해도, 아서 엔슬러가 딸의 설명을 통해 자신을 변호한다고 해도, 독자로서 이해도 용서도 하기 어려웠다.

 

아버지의 부모님이 아버지를 양육한 방법은 아이가 안정적인 애착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나기 어렵게 만들었다. 복종을 강요하는 권위적 부모 밑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다는 그의 성장 배경. 이 서사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버지의 불우했던 어린 생활을 통한 현재 죄의 면죄부? 절대 그럴리 없다. 피해자에게 사과도 하지 않은 사람의 죄가 이렇게 쉽게 소멸할 수 있다는 건 말도 안된다. 아버지의 죄는 그대로 있지만, 우리는 아버지의 서사를 통해 교훈을 얻는다. 어떤 문제의 해결 방법을 모를 때에는 최악을 상상하며 '이렇게는 하지 말아야지'하고 피하는게 도움이 될 때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가해자인 그를 통해 '양육의 책임'과, '진정한 사과'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아기를 낳아서 그 아이가 온전한 사회구성원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키우는 일은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다. 한 사람을 낳아 기르는 데에는 무수한 애정과 사랑, 관심, 경제적 지원이 소요된다. 신경쓴다라는 말을 레이더로 비유해보면, 아이를 낳는 순간 부부의 레이더는 상당수 아이를 향해 있을 것이다. 작고 취약한 생명체에게 그러하듯.

 

아서 엔슬러의 부모는 아이를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몰랐고 결국 그들의 아이는 사랑에 인색하고, 뒤틀린 욕구를 가진 사회 부적응자로 커버린 것이다. 한 사람을 키우는 일에 얼마나 정성을 들이는지, 나는 그만 아득해져버렸다.

 

 

 

아픔을 딛고 치유의 과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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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엔슬러가 아버지에게 원했던 것은 '사과'였다. 그 사과를 담은 이 책은 이브가 아픔을 완전히 딛고 일어서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누군가의 잘못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치유의 과정을 통해서 다시 일어서기 마련인데 이브의 경우 자신에게 상처준 사람이 도망갔기 때문이다.

 

사과를 하지 않은 채로 끝내 세상을 떴고, 피해자는 사과를 받지 못한 채로 그대로 서 있었다.

 

이 책은 이브가 가진 강인함의 증거이기도 하다. 그녀는 평생을 끊임없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또래 친구들처럼 생각하고 공부하고 놀고 꿈꾸는 것이 불가능했다. 마음 편히 쉴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어떻게 자신을 옭죄던 목줄을 잘라내고 집밖으로 뛰쳐나갔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이브 엔슬러가 서서히 자아를 드러내며 스스로 인생을 결정하는 과정과 그 속에서 아버지가 느낀 당혹감을 드러내는 부분은 엔슬러 자신이 더 이상 피해자에 머물지 않고 생존자로 거듭나는 드라마틱한 과정을 보여준다.

 

힘든 시간을 이겨낸 성폭력 생존자 이브 엔슬러는 여성에게 여성 폭력을 근절하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세계를 누비며 성폭력 희생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왔다. 그들이 치유의 길에 들어설 수 있도록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피해자가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고 있다.

 

듣고 싶은 말을 손으로 적어내려가기 까지 그녀는 얼마나 많이 아팠을까. 그리고 아직 세상에는 사과를 기다리는 상처입은 여성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자꾸만 무겁게 만든다.

 

 



[최서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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