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가 가장자리(Edge)에 서야하는 이유 [문화 전반]

글 입력 2020.09.19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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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리샤 무어의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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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과잉 시대에 입문하던 1970년대 후반, 미국 산업디자이너 패트리샤 무어(Patricia Moore)는 노인으로 분장을 하고 3년 동안 미국과 캐나다를 돌아다녔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26세였다.

 

패트리샤 무어는 코카콜라병 디자인으로 최고의 명성을 지닌 디자이너, 레이먼드 로위(Raymond Loewy)의 사무실에서 일했을 때 상사가 자신을 꾸짖으며 했던 말을 도저히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새로운 냉장고 디자인에 관한 회의를 진행하던 중 '근력이 약한 노인들도 쉽게 열고 닫을 수 있는 냉장고 손잡이를 만드는 것이 어떻냐'라는 의견을 냈으나 돌아오는 답은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디자인을 하는 게 아니야'였다.

 

‘그런 사람들’이라니.. 당시 최고의 디자인 회사에서 약자들을 신경 쓰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그들을 위한 디자인을 한다는 말인가. 그녀는 디자인의 선한 영향력을 굳게 믿고 있었던 사람이었기에 대형 소비자에만 초점을 맞춰 약자 차별에 가담하고 있는 디자인계의 현실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소비자가 아니라는 사회적 의식에 대항해 나이, 사회적 지위, 재력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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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리샤 무어가 실제 노인의 삶에 직접 뛰어들어 몸소 불편함을 체험하려 했던 이유는 설문조사나 인터뷰 같은 2차 자료 연구만으로는 올바른 해결책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대상으로부터 타자화된 상태에서는 그 문제점을 완벽하게 인지할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결론이었다.

 

그래서 눈에는 도수가 안 맞는 안경을 쓰고 귀에는 솜을 넣었으며 철제 보조기를 이용해 걸음걸이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3년, 이 길고 힘든 여정을 통해 그녀는 모든 것이 젊은 사람들 위주로 형성된 세상에서 노인은 어떤 위치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20대인 자신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들이 큰 어려움으로 다가왔을 때 사람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디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맥을 짚을 수 있었다. 이후 패트리샤 무어는 모두의 불편을 이해하고 모두가 불편하지 않을 수 있는 '유니버설 디자인'을 내세우며 소리가 나는 주전자, 양손잡이용 가위, 저상버스 등을 디자인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패트리샤 무어는 모두의 주목하는 메인스트림의 반대편에 섰다는 것이다. 1970년대 후반은 2030 대형소비자 집단을 위한, 혹은 서양 부유층의 입맛에 맞춘 디자인이 성행하던 시기였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그 시대의 정답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세상의 결에 맞추지 않고 그녀는 중심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들의 곁에 섰다. 철저하게 가장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려 했기에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소외된 문제들을 찾아 해결할 수 있었다.

 

 

 

'엣지(edge)에 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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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치 존(Hzone) 대표이자 현대자동차 아트디렉터로 활동 중인 이대형 큐레이터의 강연을 들을 적이 있다. 그의 강연에서 처음 등장한 ‘생각의 엣지(edge)에 서라’라는 말은 나의 삶의 우선순위를 정할 때 평생 함께할 것 같은 문구가 되었다.

 

나약한 인간은 소외되지 않기 위해 중심에 서있고 싶어 한다. 불안할수록 우리와 우리가 아님과의 경계를 더욱 공고히 하여 자신이 안전한 중심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하려 하는 건 어쩌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는 태풍의 눈처럼 중심에서는 바깥의 것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다. 내가 담고 있는 세계의 모순을 보기 위해선 세상의 가장 자리로 가야 한다. 절벽에 서면 그제서야 전체의 모습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볼 수 있다.

 

 

 

'Exclusive contents에서 Inclusive context로'


 

중심에 있는 사람은 follower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을 배제한 디자인은 권력의 화려한 중심에 서 있는 '독점적인 콘텐츠(Exclusive Contents)'다. 반면 패트리샤 무어가 보여준 '유니버설 디자인'은 장애인, 노인과 같은 사회적 소수자를 사용자로 포함시킨 'Inclusive Context'로서 탄탄한 존재 맥락을 가진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이다. 베니스 비엔날레가 오랜 기간 세계 1위를 놓치지 않는 이유는 2년마다 큐레이터, 참여 국가, 작가 등 모든 것들을 새로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전의 방식을 전혀 답습할 수 없는 구조이기에 그들은 매 시즌마다 주제의 대척점을 거듭하게 된다.

 

어떠한 담론이나 작품이 한번 성공을 거두면 거기로 우르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개척해나가는 것이다. 푸코의 진자처럼 주변이 중심이 되었으면 다시 그 반대 지점인 주변을 향해 나아가는 반복적인 과정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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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 Center → Edge

 

과거 이대형 큐레이터가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밟던 중 MOMA(뉴욕 현대 미술관)의 큐레이터였던 Barry Bergdoll 교수가 MOMA 잡지를 던져주며 이들의 방식을 확인해보라고 했다고 한다.

 

2002년 1월 29일,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State of the Union Address(국정 보고)에서 이란과 이라크, 북한을 '악의 축'이라 명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MOMA는 곧바로 이슬람 여성 작가 전시를 기획했다. 신문에서 화두를 발견하고 예술은 그 대척점에서 해답을 찾았다.

 

권력의 중심이 공식적으로 선언한 '악의 축'을 대변하는 전시를 연 것은 패트리샤 무어가 '그런 사람들'을 위해 디자인을 한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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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enter is on the periphery.

경계선 위가 세상의 진짜 중심이다.

 

 

이대형 큐레이터가 처음 현대자동차 아트디렉터가 되었을 때 요즘 예술계에서 무엇이 ‘핫’한가가 아닌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가에 먼저 초점을 맞췄다고 한다.

 

그렇게 진행한 현대자동차 아트 프로젝트들은 이 결핍을 메우기 위한 일련의 작업이었으며, 모든 기획은 한국을 넘어 글로벌 예술계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우리의 입장이 아닌 예술계의 입장에서 관찰하고 고민했을 때 훌륭한 기획이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류에서 벗어나 다른 길을 갈 수 있는 용기. 여러 세계를 경험하고 '경계선' 위에 서있어야 자신의 관점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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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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