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씬(Sinn)의 혁명] 004. Folklore: 테일러 스위프트, 인간적 세계관의 완성 ③

테일러 스위프트의 8집, 마지막 이야기
글 입력 2020.09.20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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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의 상념


 

(1) 출근길 지하철에는 얼굴들이 없다. 새벽 여섯 시 반, 기계적인 몸짓으로 나갈 채비를 마치고 전철로 빠져나왔을 사람들. 감정을 결여한 무신경한 시선들이 전철 안을 메운다. 저마다의 시선은 좁다란 스마트폰 안으로 고정된다. 누군가는 뉴스 헤드라인을 대충 훑다가 그만두고, 누군가는 쇼핑몰 앱 속 화려한 장신구와 의류로 시선을 돌린다. 또 다른 누군가는 카카오톡으로 친구나 연인과 대화를 나눈다. 대림에서 신도림으로, 신도림에서 합정으로 넘어갈 때마다 허공에 떠도는 무신경한 숨들도 자연스레 늘어난다. 시선과 숨들이 잔뜩 부딪힌다. 소리 없는 짜증들도 함께 쌓인다.

 

한창 광고대행사 인턴에 나갔을 시절, 출근길과 퇴근길을 오가며 내가 마주했던 사람들에게는 얼굴이 없었다. 머리만 있었다. 머리의 앞면에는 권태가 드리웠다. 그렇게 기름기가 빠진 채 공허감이 맴돌 뿐이었다. 그들의 상흔은 무관심으로 규정되곤 하는, 얼굴 없는 삭막한 표정에 한껏 서려 있다. 출근길에 내뱉는 현대인의 숨은 끊어질 위기에서만 자유로울 뿐, 삶을 건강히 메우기에는 여전히 모자라다. 책임을 묻기에 그들은 생각보다 연약한 존재일지 모른다. 출근길 지하철에는 그렇게 얼굴들이 아닌, 표정들만 난무하다. 그 표정이 마치 단단해 보이지만 위태로운 가면처럼 느껴진다. 가면 뒤에는 이익을 취하려는 소시민의 이기적인 온상이 아닌, 실존을 영위하려는 위기의식이 잔존한다. 그런 가면들이 전철 속에서 조마조마하게 들러붙은 듯했다. 얼마 전 모종의 연유로 출근길 지하철 속에 뛰어들어야 할 일이 생겼었는데, 그때 저런 기분을 느꼈다.

 

(2) 조금 아팠다. 기고가 늦어진 이유다. 일이 너무 많았다. 쓸 글도 많았다. 가을이 만연해 날씨가 청명했던 최근, 그랬던 탓에 바깥 공기도 제대로 쐬지 못했다. 오랜만에 눈이 지끈거리고 머리가 핑 도는 듯한 어지럼을 느꼈다. 과로로 쓰러진다는 게 이럴 때 통용되는 표현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꾸역꾸역 눈앞에 주어진 과제들을 하나씩 해나갔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것들을 썩 수습 가능한 퀄리티로 수행했지만, 그만큼 몸과 정신을 잔뜩 버렸다. 지금은 오전에 학원 스케줄을 마친 뒤 인사동의 한복판으로 피신을 온 상태다. 바쁜 한 주를 대강 마무리하고 나니, 드디어 몸에 피가 돌기 시작한다.

 

 

 

1.5. 마지막 이야기


 

테일러 스위프트의 8집을 주제로 삼은 시리즈 글 가운데 마지막 편이다. 오아시스를 찬양(!)하는 시리즈물을 연재한 이후로 오랜만에 긴 연대기를 썼다. 8집을 사랑했던, 앞으로도 사랑할 예정인 마음으로 즐겁게 마무리를 지어보고자 한다. 오늘은 남은 8집의 노래들 가운데 순전히 글쓴이가 애호한다는(!) 공통점이 존재할 뿐인 두 곡을 소개하고자 한다. 앞선 두 편에서 소개했던 세 곡과 달리 8집 내에서 대중적인 인지도는 확실히 떨어지는 곡들이다. 하지만 특정 앨범의 수록곡을 들을 때 항상 나의 최대 선호 곡이 됐던 노래들은, 이처럼 대중적으로는 메인 곡에 비해 저명하게 알려지지 않은 종류의 것들이었다. 내게 존재하는 ‘아웃사이더 감성’ 때문인 걸까.

 

각설하고, 두 가지 곡을 마지막으로 소개한다. ‘the last great american dynasty’와 ‘invisible string’이다.

 


 

2. ‘설화’의 정석, ‘the last great american dynasty’


 

이번 앨범에서 글쓴이의 최대 애정 곡을 뽑으라면 단연 이 곡이다. (시리즈 첫 번째 편에서도 살짝 언급했던 것 같다.) 8집의 앨범명인 ‘folklore’(설화)에 가장 어울리는 곡이기도 하다. 레베카라는 한 여인에 대한 가십들이 가사의 주된 내용을 이루기 때문이다. 배경적인 설명, 다시 말해 테일러가 곡을 쓰는 과정에서 참조했던 이야깃거리들을 제외하고, 온전히 가사의 내용만으로 레베카를 둘러싸고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오히려 이러는 편이 ‘설화’라는 앨범명에 걸맞게 노래를 음미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레베카는 향간의 소문에 따르면 중산층 출신의 이혼 여성이다. 노래의 도입부는 이렇듯 레베카의 출신과, 그녀가 새로이 재혼할 예정인 남성 빌에 대한 언급으로 메워진다. 빌은 ‘스탠다드 오일(Standard Oil)’ 가문의 상속자다. 정확히 무얼 하는 가문인지는 추측할 수 없지만, 노래의 맥락상 빌이 어마어마한 부유층이라는 점은 명백해 보인다. 어느 화창한 오후, 레베카는 기차를 탔다. 정황상 그녀는 해안가에 위치한 소금 그릇형 가옥(saltbox house)으로 이동해 결혼식을 치른 것으로 보인다. 결혼식은 어딘가 조잡한 구석이 있었지만, 충분히 성대했다. 홀리데이 하우스를 따로 장만할 정도로 그들의 살림은 풍요로웠다. 그렇지만 어딘가 불안정한 면모가 있었다.

   

 

The doctor had told him to settle down

의사는 그에게 이제 정착할 때라고 일러줬지

It must have been her fault his heart gave out

그의 심장이 수명을 다한 원인은, 분명 그녀의 실수에 있었을 거야

And they said “There goes the last great American dynasty”

라고 사람들은 생각했고, 뒤이어 “저기 위대한 미국 대가문이 최후를 맞이하고 있네”라고 말했지

Who knows, if she never showed up what could’ve been

누가 알았겠어, 만약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There goes the maddest woman this town has ever seen

바로 저기, 이 마을에서 가장 미친 여자가 보이네

She had a marvelous time ruining everything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멋지게 시간을 보냈어, 모든 것을 망치면서 말이지

 

 

빌은 곧 위중한 심장 질환에 직면한다. 그러다가 결국 사망하기에 이른다. 사람들은 빌이 병에 걸려 죽은 이후, 레베카를 둘러싼 소문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그가 죽은 데에는 그녀의 실수가 분명히 큰 몫을 했을 거라면서 말이다. 동시에 마을을 돌아다니는 레베카를 손가락질하며 미국 대가문의 몰락이라 비아냥대고, 그녀를 미친 여자라 험담한다. 레베카의 시점은 곡에서 마지막 최후반부를 제외하고는 등장하지 않는다. 오롯이 3인칭의 시점에서 레베카는 끊임없이 주변의 감시와 관찰에 시달린다. 정작 그녀를 묘사하는 소문들 가운데 진실이 무엇인지는 검증되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어느새인가 악인으로 규정돼 있다. 하지만 그런데도 노래에서는 그녀가 소문에 분노했다고도, 소문의 사실관계를 설명하거나 시인했다고도 자세하게 기술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레베카의 주변부 이야기들만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구조에 있다.

 

믿고 싶은 것을 믿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는 군중심리. 어찌 보면 뻔한 지적이다. 하지만 뻔함과 별개로, 그것이 실현되는 사건의 온상을 살펴보는 일은 꽤나 흥미롭다. 소문이 소문을 낳고, 소문의 무게에 또 다른 허구가 더해짐으로써 더욱 선명한 악이 탄생하는 과정. 군중이 만들어낸 악의 화신으로서 레베카가 부풀려지는 양상을 지켜보며 기분이 오묘해졌다. 그런 와중에 엄청난 마이웨이로 마을을 자유로이 누볐을 레베카를 제멋대로 상상하기도 했다.

 

노래의 마지막에 이르러 시점은 ‘I’로 전환된다. 이때 ‘I’가 레베카 본인을 가리키는지, 노래를 작곡하고 부른 테일러 자신을 가리키는지 결정하는 일은 각자의 몫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나는 ‘노래 안에서는’ ‘I’가 레베카의 시점이라 판단했다. 사람들의 소문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소문의 당사자로서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모든 설화와 소문들에 총체적으로 시인하는 그녀. 그녀의 광기와 체념, 그리고 자유로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나아가, 노래 바깥에 서 있는 테일러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도 느꼈다. 노래 밖 이야기를 끌어들이지 말자고 소제목의 초반에서 밝히긴 했다만, 이 부분만큼은 예외로 하고자 한다. 레베카는 노래 안에서 형상화된 테일러이기도 하다. 저명한 싱어송라이터로서 대중의 인기와 사랑, 주목을 받으며 살아가는 테일러에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할리우드 안의 화살들. 온갖 연예인들이 연루된 루머, 스캔들, 조작된 일화까지. 진실이라 단언할 수 있는 것들은 몇 되지 않는데도 테일러를 겨냥한 가십은 언제나 할리우드에서 식을 줄 모른다. 테일러는 지금쯤 최소한 절반 정도, 체념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녀가 뭘 하든 언제나 그녀를 노려보고 감시하는 할리우드와 대중의 시선에 지친 상태로 말이다.

   

 

Who knows, if I never showed up what could've been

누가 알겠어, 만약 ‘내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There goes the loudest woman this town has ever seen

저기, 이 마을에서 목소리가 가장 큰 여자가 지나가네

I had a marvelous time ruining everything

나는 모든 것을 망치면서, 대단히 멋진 시간을 보냈지

I had a marvelous time

대단히 멋진 시간을 보냈어

Ruining everything

모든 것을 망치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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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 스위프트와 조 알윈

 

 

 

3. 소박한 편지, ‘invisible string’


 

마지막 노래, ‘invisible string.’ 보이지 않는 끈이라는 뜻의 노래. 현재 연인인 조 알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곡이다. 컨트리 느낌이 가미된 솜사탕 같은 노래다. 내가 기억하기로 조 알윈과 테일러는 대략 3년 전에 인연을 맺어 지금까지 연인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녀의 공개연애사를 회고해봤을 때, 조 알윈과의 만남은 손에 꼽힐 정도로 안정적인 상황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쓸데없는 오지랖이지만, 나는 테일러가 부디 그녀의 가치에 걸맞은 훌륭한 사람을 만나길 늘 바란다.) 여태까지 자신의 애인들을 위해 만들었던 사랑 노래와 달리, 이번 노래에서는 상대방을 향한 신뢰감이 저변에 짙게 깔려 있다. 그간의 노래들이 상대방을 향한 정념 표출에 방점을 두었다면, 이번 곡 ‘invisible string’에서는 상대방을 바라보는 시선 안에 차분함과 신뢰감이 있음을 보여주는 데에 방점을 뒀다.

 

노래를 들으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테일러의 지인도, 그녀를 열렬히 좋아하는 팬도 아니지만 언론 등지에서의 인터뷰나 SNS 활동에서 그녀가 보였던 행보를 지켜보며, 항상 마음을 졸이곤 했다. 다소 부적절하거나 감정 조절이 덜 된 발언들이 특히 테일러의 입에서 나올 때마다 더욱 그랬다. 그만큼 그녀의 심리 상태가 안정적으로 와닿지 않았기 떄문이다.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이 바람직함을 설파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옆에서 그녀의 심리적 건강을 안정시키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녀가 뮤지션으로서의 활동을 보다 건전하게 이어나갈수 있으리란 생각이었다. 조 알윈이 그런 사람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여러 번 노래를 들었다.

   

 

Time, curious time

시간, 나를 궁금하게 하는 시간

Gave me no compasses, gave me no signs

내게 방향도 알려주지 않았고, 신호조차 주지 않았는데

Were there clues I didn't see?

내가 보지 못했던 단서들이 있었던 걸까?

And isn't it just so pretty to think

생각만 해도 정말 어여쁘지 않아?

All along there was some

그 모든 시간이 흐르는 동안

Invisible string

보이지 않는 끈이

Tying you to me?

당신과 나를 이어주고 있었다는 것 말이야

 

 

3부작으로 막을 내렸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주변에 그러한 사람들처럼 테일러를 ‘사랑하는’ 수준의 팬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녀의 앨범이 발매될 때마다 상당히 빠른 속도로 전곡을 청취하는 편이다. 현 시대의 팝을 이끌어나가는 주역이기에,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작업물을 무조건 찾아들어야 한다고 몸이 인식하는 듯하다. 테일러는 내게 긍정적인 차원에서든, 부정적인 차원에서든 아메리칸 팝의 현재이자 미래다. 앞으로도 그녀의 행보를 꾸준히 좇을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실무진 명함.jpg

 
 
[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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